1900년 전후의 韓國 .
가을 품앗이... 가을 수확기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벼를 수확하고 있다. 이 때 쯤이면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빠지지 않고 일을 도왔다. 도리깨질... 추수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역시 함께 모여 도리깨질을 하곤 했다. 복 사세요... 복(福)조리를 사고 파는 모습.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한밤 중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사서 걸어놓는 조리. 조리장수는 초하루 전날 밤부터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각 가정에서는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1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의 복조리를 사는데, 밤에 미처 사지 못한 사람은 이른 아침에 샀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뜻에서 이 풍속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저 많은 생선을... 수많은 생선을 차곡차곡 쌓아 말리고 있다. 초가지붕 만들기.. 짚을 이용해 초가집 지붕을 만드는 일도 쉴 새 없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아이들도... 어린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집안 일을 돕는 것이 관례였다. 경성거리 누비는 일본군... 경성 거리를 행군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 한국을 전쟁터로 삼았던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들이다. 물자 수탈... 조선의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배가 정박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산된 쌀의 약 20~30%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에 조선인들은 쌀이 모자라 보리쌀과 만주에서 들어온 조와 수수 등 잡곡을 혼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게다가 1937년에는 일본이 지나사변을 일으킨 것이 세계 2차 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정부는 전시동원령을 내려 군량미를 싼 값으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우리 농민들은 공출미라는 이름으로 일본 정부에 쌀을 헐값으로 바쳐야만 했다. 공출제도에 시달렸던 우리 농민들은 일제로부터 해방은 곧 공출제도의 폐지라고 여길 정도였다. 고종황제 장례식... 근대 비운의 역사 한 가운데 있었던 고종황제의 장례식. 그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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