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⑦ 죽도·농소·마사왜성

백삼/이한백 2015. 10. 23. 09:35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을 함락한 뒤 밀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은 부산에서 언양(울산)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우리 3군은 김해를 거쳐 함안과 김천으로 속히 나아가야 합니다.”

임진왜란 발발 때 왜군 3군 수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참모한테 물었다. “나는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한테 황해도를 점령하라는 명을 받았다. 군을 움직일 때는 무릇 뒤가 든든해야 한다. 후방기지로 삼을 수 있는 전초기지가 필요하다. 김해는 어떤 곳인가?”

참모가 답했다. “김해는 영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호남으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의 도시입니다. 또 김해는 서낙동강을 끼고 있어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1592년(선조25년) 음력 4월19일 오전, 구로다 나가마사는 일본에서 1만여명의 대군을 태운 대선단을 이끌고 부산 다대포와 녹산을 통과한 뒤 서낙동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김해읍성(경남 김해시 동상동)에서 남쪽으로 5㎞가량 떨어진 죽도(부산 강서구 죽림동)에 상륙했다.

그는 곧바로 죽도에 진을 세우고, 불암창(김해 불암동) 공격에 나섰다. 불암창은 조선시대 낙동강을 통해 세곡을 모았던 조창이다. 왜군은 불암창 근처에 있던 조선군 정찰함을 빼앗은 뒤 불암창을 점령했다. 조선군은 수적 열세로 왜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김해읍성으로 후퇴했다.

김해읍성 전투

김해부사 서예원은 왜군이 침략했다는 보고를 받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지금의 경남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의 육군 사령관 격인 경상우병사 조대곤한테 급히 파발을 보내 위급상황을 알렸다. 이어 그는 경상도 여러 고을과 진성에도 구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합천 초계군수 이유검만 김해읍성에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을 뿐 나머지 고을과 진성에서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서예원과 이유검은 김해읍성 성문을 굳게 지켰다. 김해에서 명망이 높았던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4명의 의병장은 장정 수백여명을 이끌고 김해읍성 방어에 함께 나섰다. 고고학계는 당시 김해읍성에 있었던 주민 수가 1000명 가량인 것으로 보고 있다.

곧이어 벌떼같이 모인 왜군이 김해읍성을 겹겹이 에워싼 뒤 공격했다.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다 성안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유검은 서문에서 적과 직접 맞섰다. 4명의 의병장들도 김해읍성 각 성문에서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1434년(세종 16년) 석성으로 세워진 김해읍성은 성벽이 높고, 성곽 주위에 땅을 파고 만든 방어시설인 해자가 깊어 왜군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투는 이날 오후까지 계속됐다. 왜군의 파상공격에 읍성 주민들은 지쳐갔다. 화살 등 물자도 바닥을 드러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작은 읍성을 반나절동안 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짜증이 났다. 참모가 계책을 냈다. “김해읍성 근처에 호계천이 흐릅니다. 물길을 막으면 읍성 식수원이 고갈될 것입니다.” 왜군은 호계천 상류를 막아 김해읍성의 물을 끊었다. 읍성 주민들은 갈증으로 괴로워했다. 이때 의병장 류식이 김해읍성 땅모양을 살핀 뒤 객관 마당에 땅을 파 우물을 만들어 주민들의 갈증을 풀어줬다고 한다.

이날 저녁, 왜군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이유검이 야간경계를 핑계로 성문을 열고 달아났다. 서예원도 “이유검을 잡아와야 하겠소”라는 말을 남긴 채 서문을 열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지휘관이 사라지자 읍성 주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4명의 의병장은 “김해부사가 떠났지만, 우리 네 사람은 한 마음으로 읍성을 지키고자 한다”고 결의한 뒤 주민들을 다독여 전투를 이끌었다.

왜군은 밤새도록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 안으로 던지고, 공성전을 하는 척 함성을 지르며 읍성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 사이 왜군은 근처 논과 밭에 있는 볏짚과 보리이삭을 날라 김해읍성의 해자를 메워 성벽과 비슷한 높이까지 쌓았다. 읍성 주민들은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해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아침, 왜군은 김해읍성 동문 쪽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은 읍성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왜군은 김해읍성을 지켰던 의병장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3명한테 항복을 권했다. 이들 3명은 끝까지 손에 쥔 무기를 놓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다.

의병장 송빈은 “예부터 우리 선조들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후손이 어찌 선조를 배반하고 오랑캐에 항복하리오/ 힘은 다하고 성은 외로우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먼저 두 적장을 베어 충성을 다하리라/ 남의 절개 세울 것을 남이 어찌 권하리오/ 자네들은 이제 스스로 헤아리기 바라네/ 북쪽을 향해 백번 절하고 우리 임금님께 하직하노라”는 시를 읊은 뒤 왜군과 싸우다 숨졌다.

조선 조정은 1871년(고종 8년) 이들 4명의 의병장을 기리는 사충단(경남 기념물 제99호)을 김해읍성 근처에 세웠다. 해마다 음력 4월20일 이곳에서 이들 의병장을 기리는 제사가 열린다.

김종국 김해문화원 이사는 <의병사의 시원지 김해성의 전투>라는 학술지를 통해 “곽재우 장군은 김해읍성 전투가 끝나고 이틀 뒤인 음력 4월22일 의병을 일으켰다. 김해읍성 전투에 참여했던 4명의 의병장이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라고 주장했다.

왜군 통치 김해읍성에서 주민 구한 권탁

1630년(인조8년) 김해 역사와 행정규모 등을 기록한 뒤 1929년 속간된 <김해읍지>에는 김해의 인물로 권탁을 꼽고 있다. <김해읍지>에는 “권탁은 경북 안동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의 한글 교서를 받들고 적진에 잠입해 100여명의 우리 백성을 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1593년 4월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 의병의 봉기, 조선수군의 활약 등으로 한양 이남으로 후퇴했다. 조선은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한글로 쓴 <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를 1593년 9월 전국 곳곳에 뿌렸다. <선조국문유서>에는 “왜군을 잡아오거나, 실정을 조사해오거나, 동포를 데리고 오는 공로가 있는 자는 양인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과 상을 내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권탁은 김해 수령을 맡겠다고 조정에 청했다. 당시 김해엔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죽도왜성과 김해읍성, 농소왜성 등에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다. 권탁은 김해 근처 왜군이 세운 진지에 홀로 잠입해 땔깜을 구하러 온 백성들한테 말했다. “김해성의 장수 권탁이다. 전하께서 너희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할까 가련히 여겨 불러들이라 했으니 나를 따르라.”

백성들이 울며 답했다. “왜군의 종으로 일하기를 달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잡혀 있어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권탁이 계책을 일러줬다. “일본으로 건너갈 친척들을 배웅하고자 김해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가져와 청하니 함께 나가 배부르게 먹고 오자는 말로 왜군을 속여라.”

다음날 밤, 백성들은 가족들과 왜군 40여명을 권탁과 미리 약속한 곳으로 데려왔고, 권탁은 왜군을 베고 백성 100여명을 구했다. 하지만 권탁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1593년 11월 숨졌다. 권탁은 1722년(경종 2년) 정3품 당상관(통정대부)에 해당하는 관직인 장례원 판결사로 추증됐다. 권탁의 후손들은 1836년(헌종 2년) 김해 흥동에 ‘선조어사각’(경남 문화재자료 제30호)을 세우고 권탁이 갖고 있던 <선조국문유서>를 보관했다. 국문학 연구의 중요자료인 <선조국문유서>는 현재 부산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서낙동강의 전략적 요충지, 죽도왜성

부산 강서구 죽림동 823번지 일대에 있는 죽도왜성(부산시 기념물 제47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조선군 공격에 대비해 만든 왜성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임진왜란에서 100여명이 넘는 조선 도공을 납치한 것으로 악명 높은 왜장이다. 그는 납치한 조선 도공들의 기술력으로 자신이 다스렸던 일본 규슈의 아리타 지역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로 만들었다.

죽도는 부산 녹산 쪽 바다에서 서낙동강 물길을 따라 김해평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추진하면서 1595년 단계적으로 병력을 일본으로 철수시켰는데, 죽도왜성과 증산·안골·가덕왜성에는 병력을 남겨놓았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왜성들이기 때문이다. 왜군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죽도왜성 병력을 증강해 부산과 김해를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죽도왜성은 동·서로 길게 늘어선 모양새로 북쪽으로는 김해시, 동쪽으로는 낙동강과 부산 북구 구포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죽도왜성 동쪽 부분이 서낙동강과 맞닿아 있어 배를 댈 수 있었다.

죽도왜성 본성은 해발 47.5m 오봉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천수각이 있던 1곽을 포함해 동서쪽으로 모두 10개의 성곽을 배치했다. 본성에는 현재 높이 1~5m, 길이 10~30m의 성벽이 곽마다 남아 있다. 성벽은 60~70도로 비스듬하게 쌓아져 왜성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죽도왜성 본성에선 서낙동강 뱃길과 김해평야, 김해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본성 중심부에는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으며, 일부 외곽 성터는 밭이 돼 있다. 죽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왜성 터 곳곳에서 대나무 숲을 찾아볼 수 있다. 본성의 북동쪽 중턱에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 유골 39기가 안장돼 있는 국군묘지가 있다. 이 묘역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유골을 모신 곳이다.

본성 서쪽 끝자락에서 100m가량 떨어진 구릉에는 죽도왜성 제1외성이 자리잡고 있다. 본성과 제1외성 사이에는 부산신항만 배후도로인 가락대로가 지나가고 있다. 동아대 박물관은 2005년 가락대로를 건설할 때 죽도왜성 제1외성 터를 발굴조사해 제1외성의 7개 곽을 확인하고, 제1외성 석축 일부, 상평통보, 기와 조각 등을 출토했다.

본성 동남쪽에서 150m가량 떨어진 낮은 구릉에는 제2외성 터가 있다. 제2외성 구릉 정상은 평평한 땅이 있고 아랫쪽으로 작은 규모의 공간이 계단식으로 나열돼 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제2외성 터엔 문헌상의 기록 말고는 왜성과 관련된 흔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멸실돼 가는 농소·마사왜성

김해에 있는 농소왜성과 마사왜성은 죽도왜성 방어를 돕는 지성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 두 왜성의 축성시기는 불분명하다.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 21번지 일대에 있는 농소왜성은 김해시가 보이는 낮은 구릉(해발 70m)에 자리잡고 있다. 농소왜성에서 남쪽으로 서낙동강의 지류인 조만강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이곳 앞까지 낙동강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농소왜성은 2001년 김해국도 대체구간 공사를 진행하다 발견됐다. 당시 학계는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의 왜성 일부를 확인했다. 농소왜성은 구릉 정상에 1곽을 중심으로 그 아래쪽으로 2곽과 3곽을 나란히 배치한 모양새이다. 현재 이 왜성의 1곽에는 무덤들이 들어서 있으며, 2곽과 3곽 추정 지역에는 밭이 있다. 1곽 북서쪽 모퉁이에서 석축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 팀장은 “멸실 직전 상태”라고 분석했다.

마사왜성은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 있는 작약산(해발 377m) 산등성 끝자락의 구릉(해발 80m)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왜성 서쪽 아래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으로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가 내려다 보인다. 마사왜성도 구릉 정상에 1곽을 중심으로 아래쪽으로 계단식으로 2곽과 3곽을 배치한 모습이다. 학계는 마사왜성과 농소왜성이 비슷하게 작은 규모의 진지 격 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사왜성도 성터와 성문의 위치를 가늠해 왜성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눈에 드러나는 왜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작은 규모의 왜성 터는 사유지가 대부분이다. 정부나 지자체가 왜성 터를 방치해 점점 황폐해지고 있다. 남아 있던 왜성의 흔적도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왜성을 다음 세대에 교훈으로 남기려면 관할 지자체의 보전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죽도왜성: 부산 강서구 죽림동 823 일대.
 - 농소왜성: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 21 일대.
 - 마사왜성: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산 205,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 1 일대.
 - 주변 관광지 : 김해읍성, 무척산, 맥도생태공원, 부산경남경마공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