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근대에 가장 인기 있었던 관광지는?

백삼/이한백 2015. 10. 22. 10:31

근대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는 금강산이었다.

1889년 캠벨 주한 영국 부영사는 9월과 10월 두 달에 걸쳐 북한의 주요 도시와 중국과의 국경지역을 여행(혹은 정탐)하면서 백두산과 금강산을 다녀왔다. 그는 이때 약 25점의 사진을 찍었는데, 금강산 사진으로는 온정리 입구, 장안사에서 본 금강산 전경과 계곡, 표훈사와 주지스님, 내금강의 사자암 등 5점이 전하고 있다.

1894년 우리나라에 온 이사벨라 비숍과 안내 겸 통역을 한 F. S. 밀러 선교사도 금강산을 여행했다. 두 사람은 장안사에 묵었는데, 새벽 예불을 비롯한 스님들의 절제된 생활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대웅전과 금동불 등을 살펴본 후 사찰 건축의 아름다움에 감동했으며, 표훈사 · 정양사 · 유점사 · 구룡폭포를 구경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영국 기자 해밀턴도 1903년 금강산을 방문한 후 《오리엔틀 시리즈, 조선의 역사와 사람들》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말을 타고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 유점사, 신계사를 방문해서 당시 승려들의 일상을 자세히 취재한 후 해금강으로 향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시작된 외국인들의 금강산 관광은 해가 갈수록 그 수가 늘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와 있던 외교관과 언더우드, 게일 등 선교사들의 추천이 금강산을 유명 관광지로 부각시킨 것 같다.

금강산은 조선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의 사신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 조선왕조의 《실록》을 보면, 태종 2년(1402) 10월에 중국 사신 온전(溫全)과 양영(楊寧)이 날씨가 춥고 얼음이 얼었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 해 5월에 사신으로 온 황엄(黃儼) · 조천보(曹天寶) · 고득(高得) 등도 “금강산은 모양이 불상(佛像)과 같기 때문에 보고자 하는 것이오”라며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어 했고, 그들은 표훈사에 들러 비단 30필(匹)을 시주했다.

황엄은 5년 후에도 사신으로 와서 다시 금강산을 다녀갔고, 숙소인 태평관을 방문한 황희 정승에게 “공중(空中)을 우러러보니, 오색(五色) 구름이 흩어져 꽃이 되어 날아 내려오고, 또 백학(白鶴)과 청학(靑鶴)이 산중에서 날며 춤을 추었다”고 하면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세종대왕 9년(1427) 5월에 온 사신 창성(昌盛)과 백언(白彥)은 황제가 꼭 다녀오라고 했다면서 금강산을 방문했다. 그들은 표훈사에 머물렀는데,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여러 절을 유람하고, 사흘 동안 머물면서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전한다.

조선 초 중국 사신들의 금강산 방문 기간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대개 10~20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신이 다 금강산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마주(對馬州, 지금의 대마도) 태수(太守)는 세조 14년(1468) 4월에 “신이 오랫동안 금강산 유점사를 우러러 예불하기를 원하고 바랐습니다. 비록 그러나 몸소 섬의 정무를 잡아서 귀국의 동쪽 울타리의 임무를 담당해야 하므로 마침내 스스로 갈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앙지(仰之) 화상(和尙)을 특사(特使) 삼아 이제 소향(燒香) 한 포(包)를 가지고서 보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 아뢰어 금강산 유점사에 이르러서 신을 대신하여 향을 올리게 하여주소서”라는 서한을 앙지 화상 편에 보냈지만, 조정에서는 우리나라 지리를 엿보는 간첩 행위를 할 수 있다 하여 불허했다.

근대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도 금강산을 찾아 여러 점의 그림을 남겼다. 키스는 자신의 또 다른 화집인 《동양의 창(Eastern Windows)》(런던, 1928)에, 금강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비가 쏟아질 때는 계곡에 물이 불어나 두려웠지만, 비가 그친 후 시원한 바람을 따라 골짜기를 내려오는 자욱한 안개에서는 신비로움이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금강산에서 세 작품을 그렸는데, 유점사의 창건 설화를 담은 〈금강산의 전설〉과 〈금강산 구룡폭포〉, 그리고 절의 부엌에서 밥하는 공양주, 불 때는 소년, 찬거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보살이 함께 등장하는 〈금강산 절의 부엌〉이다.

근대의 금강산 방문자들은 대부분 유점사와 장안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이 두 사찰은 표훈사 · 신계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힌다. 그중 유점사(楡岾寺)가 가장 크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인도 월씨국(月氏國)으로부터 온 쉰세 분의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유점사를 방문한 근대의 외국인 관광객들은 주지스님으로부터 예외없이 이 설화를 들은 듯, 여러 사람의 방문기에 소개되었다.

53명의 스님이 인도에서 와 불교를 전파하려고 금강산에 들어와서 무릅나무 아래 연못에 앉았다. 그러자 연못에서 살던 용 세 마리가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스님들과 싸움을 시작했다. 결국 스님들이 이겼고, 큰 돌로 연못을 덮은 후 그 위에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바로 유점사다.
- 이사벨라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옮김, 도서출판 살림

엘리자베스 키스 역시 유점사를 방문했을 때 이 설화를 들은 듯,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스님들과 연못에서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용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키스가 유점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높이가 채 30센티미터가 안 되는 소형 금동불 53점이 있었다. 1931년 봄 유점사를 방문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금강유기〉에서 “유점사 하면 누구나 아는 척하는 것이 53불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만큼 많이 알려진 설화를 키스가 작가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것이다.

〈금강산 구룡폭포〉는 유점사 연못에서 쫓겨난 ‘아홉 마리의 용이 사는 폭포’라는 전설을 그린 작품이다. 이 판화를 잘 살펴보면 아홉 마리의 용이 보인다. 〈금강산의 전설〉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판화 속의 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늘로 오를 때를 기다리며 못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욕을 하면서 장난을 치는 모습이다. 아마도 당시 유점사 스님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손짓발짓으로 들려준 ‘목욕하는 용’ 전설 때문인 듯하다. 1894년 이사벨라 비숍과 함께 금강산을 방문했던 선교사 F. S. 밀러는 〈금강산 답사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유점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부도탑을 지나 옛날에 용들이 목욕했다는 구룡연에 다다랐다. 폭포에서 물줄기가 계속 내려오면서 바위에 구멍이 생긴 형태의 못이었다. (······) 조선 땅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인도에서 온 53명의 스님이 용을 못으로 쫓아버리고 큰 돌로 연못을 덮은 후 그 위에다 유점사를 세웠다고 설명한 스님은, 그 이야기의 증거로 유점사 근처에 물이 흐르는 시냇가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용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 연못에서 목욕을 했다던 그 용들인가 보다. 그런데 스님이 말해주는 이 전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한국의 용은 늘 목욕을 한다는 것이다.
- 《서양인이 본 금강산》, 박영숙 · 김유경 엮음, 문화일보사

1928년에는 서울 주재 미국 영사의 딸 릴리언 밀러가 금강산을 방문했다. 밀러는 마하연 풍경을 비롯해 만물상, 금강산 전경, 계곡의 조그마한 폭포 등을 판화로 남겼다.

금강산에서도 마하연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많지 않다. 조선시대 작품으로는 김윤겸(1711~1775), 김하종(1793~?) 두 사람의 마하연 그림이 전할 뿐이고, 근현대 화가의 작품으로는 밀러의 판화가 유일하다. 금강산을 가장 많이 그린 겸재 정선도 마하연까지는 가기가 힘들었는지 전하는 작품이 없고, 금강산 그림으로 《금강 사군첩》이라는 화첩을 엮은 김홍도도 마찬가지다.

근대에 금강산을 그린 화가는 많다. 심전 안중식, 해강 김규진,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등의 동양화가들과 최초의 미국 미술대학 유학생으로 예일대를 졸업한 임용련, 최초의 유럽 미술대학 유학생 배운성 같은 서양화가들이 금강산과 해금강을 그렸지만 마하연을 그린 화가는 없다. 해강 김규진이 1920년대에 〈마하연 동자석〉이라는 작품을 남겼지만, 숲속에 있는 괴석을 그렸을 뿐이다.

일본 화가 중에서도 도쿠다 교쿠류(德田玉龍), 가와세 하수이(川瀨巴水) 같은 유명 화가들이 금강산을 다녀갔지만 만물상과 그 부근을 그렸을 뿐 아무도 마하연을 그리지 않았다. 근현대 화가의 작품으로는 릴리언 밀러의 1928년 작이 유일하게 마하연의 모습을 담은 작품인 셈이다.

밀러는 마하연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부감법으로 그렸다. 고즈넉한 뒷마당이 묘사되었는데, 53칸의 방이 있었다는 본채는 그림의 왼쪽 뒤편에 있다. 본채를 그리려면 언덕 아래에서 위를 보고 그리는 구도가 되기 때문에 뒷마당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마하연(摩訶衍)은 내금강 백운동의 울창한 수림과 기암절벽 사이에 있었던 사찰로 유점사의 말사(末寺)다. 신라 문무왕 때인 66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십찰에 들었던 유서 깊은 사찰로, 율곡 이이(1536~1584)가 19세 때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서 참선하며 불교의 이치를 연구할 때 마하연에도 잠시 머물렀다는 내용이 《선조실록》 1584년 1월 1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내금강 마하연은 지리산 칠불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참선도량이다. 근대의 고승 만공 선사가 1905년부터 3년 동안 선을 지도했고, 성철 · 청담 스님 등도 젊은 시절 이곳에서 선을 공부했다.

밀러는 마하연 뒷산인 중향성을 은빛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문장가 농암 김창협(1651~1708)이 묘사한 것과도 통한다. 그는 금강산을 유람한 후 쓴 〈동유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마하연 등 뒤에는 중향성이 있어 병풍을 친 듯하며 앞에는 혈망봉, 담무갈 등 여러 봉우리가 빙 둘려 역시 병풍을 친 듯하니 진실로 명가람이다. 지는 해가 아름다워 앞마당을 산책하면서 중향성 봉우리를 쳐다보니 완만한 은색으로 빛나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뜰에는 삼나무, 전나무 등이 울창하다. 그중에는 줄기 곧고 껍질 붉고 잎은 삼나무 같은 것 한 그루가 있어 옛날부터 전해오기를 계수나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송강 정철도 〈관동별곡〉에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마하연을 언급했고, 육당 최남선은 《금강예찬》에서 “마하연은 금강의 심장”이라고 극찬했다. 정비석도 수필 〈산정무한(山情無限)〉에서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보면 바람소리만도 아니요, 물소린가 했더니 물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라며 마하연 여사(旅舍)에서 느낀 정취를 읊었다.

마하연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까지 1,200년이 넘도록, 내금강 깊은 곳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영주 부석사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 속에서도 무탈하게 자리를 지켰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주춧돌 일부와 돌계단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마하연과 유점사는 왜 사라졌을까?
일제강점기에 마하연의 유리원판 사진을 소개한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아름다운 금강산’ 전시회 도록은 “1932년 53칸의 건물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옛터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에서 발행한 《금강산의 력사와 문화》(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는 “전쟁 시기 미제의 폭격으로 이 암자들의 거의 전부가 파괴 · 소각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금강산에는 보덕암, 불지암, 마하연의 부속건물인 칠성각 등 불과 몇 채의 암자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군 전투기가 내금강 깊숙한 곳에 있는 마하연을 조준폭격했는지 혹은 불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소각했는지는 훗날 객관적 자료가 발견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점사 역시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지만, 이 또한 자세하고 정확한 경위는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밝혀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