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전투기 조종 33년 유병구 예비역 소장

백삼/이한백 2015. 8. 12. 10:41

영화 '탑건'의 주인공 매버릭(톰 크루즈 분) 대위는 패기만만하다. 부츠에 G슈트를 입은 그는 화려하다.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종사의 실제 삶은 영화와 딴판이다. 긴장 속에 산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든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추락사고가 나면 시신을 못 찾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난 10년간 모두 24명의 조종사가 순직했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생 중 기수별로 5~10%가 순직했다. 그래서 조종사의 부인은 날씨가 조금만 끄물거려도 하늘을 쳐다본다. 조국의 영공을 지키는 자부심과 현실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F-15K 추락사고를 계기로 이런 조종사의 삶과 세계를 베테랑 조종사 출신인 유병구 예비역 공군 소장에게 들어봤다.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자 주)



-5월 5일 어린이날 에어쇼를 하던 블랙이글팀의 김도현 소령이 순직한 데 이어 7일엔 F-15K 추락사고로 김성대 중령과 이재욱 소령이 세상을 떠났다. 선배 조종사로서 심정은.

"참담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조종사는 항상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1000억원에 달하는 전투기의 손실도 안타깝지만 훌륭한 인재를 잃은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손실이다."

-F-15K 조종사들이 "임무 중지"라며 차분히 마지막 교신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행착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조사 결과가 나와야 정확한 사고 원인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흔히 조종사들에게 버티고(Vertigo)라고 부르는 '공간 정위 상실' 현상이 나타난다. 나도 수차례 경험했다. 깜깜한 밤이나 구름 속에선 전투기가 뒤집어져서 날아가는지 정상으로 날아가는지 모르는 혼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버티고가 오면 조종사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나.

"버티고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몸이 뭔가에 눌려 꼼짝 못하게 된다. 조종사들은 어떤 거대한 힘(Invisible Giant Hand)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순직한 공군사관학교 동기가 있나.

"공사 동기생 88명 중 8명이 순직했다. 가장 먼저 순직한 친구는 1971년 6월, 흑산도 인근의 대간첩 작전에 투입됐는데 간첩선에서 발사한 대공포에 맞았다. 마지막으로 순직한 친구는 78년으로 기억하는데 팬텀 전투기로 폭격 훈련 중 추락했다. 훌륭한 동기생들이었는데 너무 안타깝다."

-비행대대의 '사랑의 전화'는 무엇인가.

"비행대대의 대대장실에 설치한 전화다. 예를 들어 조종사의 부인이 전날 꿈자리가 사나웠거나 남편이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판단할 경우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놓은 장치다. 부부싸움을 했다고 전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비행은 민감하다."

-조종사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요소는 뭔가.

"날씨라고 본다. 날씨는 비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비행 중 갑자기 비가 오거나 구름이 심하게 끼면 비행 안전을 크게 위협한다. 계기판에 의존하긴 하지만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전투기 조종사를 '고독한 결단자'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조종사는 수만 피트 상공의 반 평 남짓한 공간에서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비행 중 최고의 지휘관은 조종사 자신이며 최종 결단은 조종사 본인의 몫이다."

-인간의 한계에 직면하는 임무 특성상 전투기 조종사는 안전 규정이 많다는데.

"그렇다. 비행 전날은 금주(禁酒)해야 하고, 최소 8시간은 자야 하는 등 최상의 몸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규정이 있다."

-조종사의 출퇴근 시간은.

"전투기 조종사는 일정한 출퇴근 시간이 없다고 보면 된다. 새벽 초계비행을 할 경우에는 오전 3~4시에 출근한다. 야간 비행훈련 시에는 밤 10시 이후 퇴근한다. 시각을 다투는 임무를 맡고 있는 전투기 조종사들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다."

-전투기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데 비용이 상당히 든다고 들었다.

"F-16 조종사가 되려면 86억원 정도가 든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F-5는 41억원가량이다. 고성능 전투기로 올라갈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낮은 성능의 기종을 조종해 본 뒤 고성능 전투기를 타기 때문이다."

-조종사의 급여는.

"군인 월급은 계급과 호봉에 따라 결정된다. 다만 조종사는 비행수당으로 월 90여만원을 더 받는다. 평균적으로 민간 항공기 조종사의 60% 수준에 불과하다. 위험도에 비해 너무 적다."

-조종사에게 최고의 영광은 뭔가.

"위관 장교 때는 주력 전투기를 타고 싶어한다. 소령이나 중령이 되면 탑건이 되고 싶어한다."

-조종사는 체력이 중요할 것 같다. 특히 G 내성훈련은 엄청나게 힘들다고 들었다.

"G 내성훈련이란 조종사가 급격한 공중 기동 때 지구 중력의 6 ~ 9배에 달하는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다. 머리의 피가 다리 쪽으로 몰리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이다. 일반인은 4G 정도면 기절한다. 훈련은 일명 '곤돌라'라고 불리는 기구에 탑승해 지구 중력의 6~9배가 넘는 강한 압력을 견디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한다고 보면 된다."※G(Gravity)는 중력 가속도를 의미하며, 9G라면 지구 중력 아홉 배의 중력 가속도가 적용된 상태임.

-F-15는 기동 때 9G까지 걸린다는데.

"그렇다. 많은 전투기 조종사가 비행을 하고 나면 실핏줄이 터지고 멍이 드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 고중력 상태에선 손도 잘 못 움직인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투를 해야 한다. 심지어 목이 삐는 경우도 있다. 눈이 감기고 조종간을 놓치기도 한다. 조종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훈련을 한다."

-조종사들이 입는 G슈트가 어느 정도 도움을 주나.

"통상 G슈트라고 부르나 정식 명칭은 안티-G슈트다. 그러나 G슈트는 어디까지나 보조장비일 뿐 기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과하도록 도와줄 순 없다."※G슈트는 조종사에게 G가 가해지면 조종사의 복근과 대퇴근을 압박해 피가 하체로 쏠리는 것을 막아 주는 장비다.

-전투기 사고가 나면 처벌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사고가 나면 항상 누가 책임을 지느냐를 놓고 말이 많다. 선진국에선 그렇게 안 한다. 조종사가 목숨을 내놓고 비행하므로 일반 사고와는 다르게 대하고 고의성이 없는 한 처벌하지 않는다. 우리도 처벌보단 재발 방지 대책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정리=신용호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이철희 정치부문 차장

*** 유병구 예비역 소장은

유병구(58) 한서대 항공운항학과 초빙교수는 공사 19기로 33년간 전투기를 조종했다. 총 비행시간은 3000시간에 달한다. 대개 파일럿 사이에선 1000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을 가지면 베테랑 조종사라고 부른다. 공군교육사령관(소장)으로 근무하다가 2004년 4월 예편했다. 조종사 시절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비행 안전 위탁교육을 받는 등 항공 안전 분야 전문가로 손꼽힌다. 1995년 사천비행장 고등비행훈련기 사고 직후 그곳의 단장으로 투입돼 2년 만에 이 부대를 공군 비행단 중 안전 최우수 부대로 이끌었다. 그는 한서대에서도 '비행안전론'을 강의하고 있다. 충남 홍성 출생으로 공군본부 비서실장, 국방부 연구개발국장, 공군본부 인사참모부장 등을 지냈다.


*** 공사 생도 40%만 '빨간 마후라' 맨다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조종사 훈련이 실시된다. 훈련에 앞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는다. 전투기 조종에 필요한 시력.청력.혈압.심전도 등의 신체검사와 함께 'G 내성 테스트'를 받는다. 6G를 견뎌내지 못하면 탈락한다. 훈련기간은 2년. 실습과정과 기본훈련.고등훈련 등 3단계로 나눠 진행된다. 때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이 실시된다. 단계별로 테스트를 실시해 일정 기준에 미달하면 탈락시킨다. 단계마다 20 ~ 30%가 탈락한다. 이 훈련 과정을 모두 끝내야 전투기 조종사로 태어나게 된다. 전투기 조종사를 상징하는 '빨간 마후라'와 '조종사 윙'은 고등훈련을 마쳐야 받는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생의 40% 정도만 공군참모총장이 한 명 한 명 직접 매주는 빨간 마후라를 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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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6.11 20:33 입력 / 2006.06.12 08:55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