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선의 중인들/허경진

백삼/이한백 2015. 8. 5. 17:54

 

 

정조의 르네상스를 만든 건 사대부가 아니라 '중인'이었다.

 

조선 시대 신분 계층은 크게 양반과 평민,천민으로 나뉘지만,실제로는 양반과 평민 사이에 중인이 있었다.중인은 글자 그대로 중간 계층이다.

한양에서 실세 양반이 살던 북촌과 물락한 양반이 살던 남산 사이의 중간 지역인 청계천 일대에 기술직 하위 관원이 많이 살았기에 중인라고도

했지만,거주 지역보다는 중간 계층이라는 신분상 의미가 더 크다,실제로 역관이나 의원은 청계천 일대에 많이 살았지만.하위 관원인 경아전이나

서리는 인왕산 기슭에 많이 살았다.

중인은 평생 한 직장,한 분야에서만 근무했기에 전문성이 강했다.사대부는 여러 관청에 옮겨다녔으므로 실무에 능통할 수는 없었다.

중인 관원을 선발하는 과거는 雜科---譯.醫,陰陽,律(경국대전)등 4과...잡과에 없는 과목은 예조에서 取才라는 형식으로 선발했는데,의학,

천문학,지리학,율학,산학 등을 전공한 기술관과 화원,악공 드으이 에능인이 대상이었다.주인은 그야말로 '전방위 지식인'이었다.

중인들은 신분은 낮았지만 재산을 모은 사람이 꽤 있었다.---허생에게 일만냥을 빌려준 변중업,인왕산 호걸 임준원은 내수사 서리를 사직하고

큰 재산을 벌자 가난한 중인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모아 詩社를 결성하였다. 이들이 있었기에  중인의 세력이 결집할 수 있었으며 여러 대에 걸쳐

시사를 결성허여 문화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혹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부자 임준원의 모델?)

특히 외교에서 역량을 발휘한 중인 역관(사대부님들은 중국어를 몰랐다. 한자는 잘 알았지만) 조선통신사도 마찬가지.

하지만 외국에서는 크게 대접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신분과 사회적 차별이 많았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문학 동인 '詩社'가

탄생하였고 주인의 傳記를 편집하기도 했다.그러나 여전히 중인 신분 상승이 허용되지 않자 ,집단적인 움직임도 일어났다.

사회제도에 불만이 많은 중인들은 천주교가 들어오자 다른 계층보다 먼저 이를 받아들였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그들이 차지하는 신자의 비율은

높아진다.기득권을 가진 양반은 조정이 정책에 순응하여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대문이다.평민들이 많았던 천주교 신자들은 한문을

읽기 힘들었다.신도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던 역관 최창현이 '성경직해'를 한글로 번역한다.

이들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양반보다 앞서 외국어를 배웠으며 새로운 전문직으로 진출하였으며,통역이나 세관 직원,측량기사는 물론 선교사의

서기로 취직한 이들도 대부분 중인었다.

지금의  선망 직업인 의사,약사,변화사,동시통역사,공인회계사 등의 '士'자 돌림 직업과  화가,음악가,서예가 등 예술가가 조선시대에는 모두

중인이었던 것이다.

 

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계급 이하였다....청계천 일대가 바로 위항있다.그리고 좁은 집이 모여 있던 樓上洞,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상인 등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인왕산 언저리에는 주로 서리나 아전이 살았다.

인왕산 골짜기를 따라 여러 중인들 마을이 형성됐다....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텅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

여기서 자신들만의 서재를 짓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문학을 함께한 이들이 위항시인이다. 그들은 저마다 시사라고 하는 시문학동인을 만들어

조선 중 후기에 위항문학의 꽃을 피운다.

 

인왕산을 노래한 시문학동인 千壽慶의 松石園詩社(1786,7,16, 옥계 청풍정사에서)

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을 모은 玉溪社 수게첩은 張混이 발문을 썼다.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달을 가지 못하며,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기지 못한다.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

1779년에 임명된 서얼 출신의 네 명의 초대 檢書官...李德懋,柳得恭,朴齊家,徐이수를 '四檢書;라고 한다.

유득공은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을 구경했다.

살구꽃이 피어 한껏 바바졌으니/육각봉 어귀에서 또 한 차례 술잔을 잡네/낡이 맑아 아지랑이 산등성이에 아른대고/새벽 바람 불자 버들꽃이

궁궐 담에 자욱하구나/새해 들어 시 짓는 일을 필운대에서 시작하니/이곳의 번화함이 장안에서 으드미라/아스라한 봄날 도성 속 사람바다

속에서/희끗한 흰 머리로 반악을 흉내내네

 

화원 趙熙龍(1789-1866)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친구들을 사귀어 선배 시인 42명의 시인들의 시를 모아 壺山外記를 저술하고 의원

유최진의 집 당호를 따서 碧梧社라는 문학동인을 조직했다.

또한 김홍도에게서 그림을 받아 표지를 꾸민 중인드르이 시집도 있다...

가난한 중인들의 시선집을 펴낸 홍세태---海東遺珠

180년에 걸쳐 출판된 중인들의 시선집---六家雜詠---서문으 이경석이 썼다.1658.남응침 등

조선후기 최고의 출판편집인 張混(1759-1828)---풍요속선,동사촬요 등등...그리고 핈본으로 남은 자신의 문집 而已广集...

而已...'그만'.....

홀로 머물 때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옛 책을 읽으면서 그 사이에 누웠다가 올려다보면 그만이고,마음이 내키면 나가서 산기슭을 걸어

다니면 그만이다.손님이 오면 술상을 차리게 하고 시를 읊으면 그만이고,흥이 도도해지면 휘파람 불고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다.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만이고,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으면 그마닝고,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비 오는 아침과 눈 내리는 낮,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이같이 그윽한 삶으 신선 같은 정취를 바깥세상 사람들엑 말해 주기

어렵고,말해 주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장혼은 "그의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므로 난들은 그가 가진 것이 없음을 비웃었지만,' 그 자신은 69세 되던 해 입춘절에 "굶주림과 배부름,

추위와 더위,죽음과 삶,재앙과 복은 운명을 따르면 그만이다."라고 자부한 뒤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예술인들로는 술에 취한듯 말듯할 때 신필을 휘들은 '달마도' 등의 화원 그림의 귀신 인조 대의 醉翁 金明國

왕실으 광대가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한 눈을 찔러버린 崔北(1712-86)

이용후생의 부산 화가 卞璞(18세기말)---조선 통신사 조엄을 따라 일본 수행,부산진 순절도(보물 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의 작가.

이 그림은 1760년에 변박이 모사한 것임

위항시인에게 가장 많이 청탁을 받은 호산 조희룡,

조선 최고의 골동 서화 수집가 8대 역관 집안의 오경석.--간송 전형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침.

오경석의 아들로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오세창...槿域書畵徵...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기자....만세보,한자에 한글로 음을 달고(루비 활자)

여기에 '血의 淚'가 연재된다.

인왕 호걸지사의 맹주 가객 박효관(1800-1880)---歌曲源流

공산에 우는 접동 너는 어이 우짖는다/너도 나와 같이 무슨 이별 하였느냐/아무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한양의 유흥가를 눈빈 군악대 용호영의 리더 이패두.

 

 

 

침술의 대가 허임,그의 제자 최유태와 오정화 신의라 불린 백광현.(1625-1697)--백광현이 없어 내가 죽는군아..아아

고약 처방으로 종6품까지 오른 피재길,정조 임금의 병을 고친다.하지만 정조의 죽음을 고치지 못하고 귀양길에 오른다....이명래 고약은 전통

고약과는 좀 다르게 공세리 성당을 지은 프랑스 드비즈 신부가 창안한 고약을 신도로서 전수받았다.

마마로부터 왕실을 구한 유상,그는 숙종을 마마 즉 두창으로부터 구했다.

해시계를 만든 농사꾼 출신 천문인 김영,(1749-1817)은 평면 해시계 地平日구.

중인 등청에 앞장 선 律官 장지완---율학 생도 정언은 무려 2,388명,(1806-67)

청령강직의 표본 호조 아전 김수팽

그리고 진정한 호인 임준원,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천재 國手 유찬홍

한강 물로 술못 을 삼아/마음껏 고래 같이 마셔봐 야지/그런 뒤에야 내 일이 끝나리니/죽어 버리면 곧바로 달게 잠들 테지/그대들도 보았겠지,

이 든 세상을/만사가 한 바탕 꿈이란 것을

 

예배 장소를 제공한 첫 순교자 김범우--그곳에 들어선 명동 성당,

천주교 지도층으로 활약한 중인들--- 최필공 京居邪魁의 노방전도,언문으로 교리서를 번역한 의역관 최창현, 聖經直解

 

 

대륙과 바라를 넘나들며 신세계를 꿈꾼 역관 --17-8세기 한류를 일으킨 홍세태.홍순언,추사의 제자 이상적,

186편의 시로 신세계를 묘샇ㄴ 김득련---민영환의 수행원으로 세계 일주.

역관 부자 인동 장씨 집안에서 배출된 왕비 장희빈,조선 최고의 갑부 오블리스 노블레스 변승업(1623-1709) 후손 변원규는 미국 연대론 주정,

 

한양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와그너 교수가 1663에 작선된 한양 북부(서울 서부 사대문 밖) 분석 결과 호주 중 양반은 16,6%,평민 30%.

노비는 53,3%..노비의 비율이 높은 것은 양반이 많이 사는 서울이어씨 때문이며 중인은 워낙 적어 평민 속에 묻혀 있었다.

조수삼(1762-1849)은 양반에 60년 뒤져 83세에 급제한다.---이 분 병풍이 우리 집에 있다.10폭이나 된다다 ㅎㅎ)

뱃곳에 든 시와 책이 몇 백 짐이던가/올해에야 겨우 난삼을 걸쳤네/구경꾼들아,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육십 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

 

 

 

 

 

인왕산도,강희언 1780....늦봄에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다

 

정선,장동팔경 중 수성동,

 

이인문,옥계청유도 1791,6 지금의 우리은행에서 조금 올라간 곳.

 

장시홍,필운대.겸재풍으로 그렸다.

 

 정선,육강현

 

송석언시사 동인 임득명의 登高賞華

 

유숙,수계도1853,30여명의 중인이 모여  시회를 개최하다.

 

유숙,벽오사소집도.유최진의 벽오당에 모인  73세의 조희룡 등 다섯 친구가 모였다.

 

김홍도,송석원시사 야경,1791

 

홍세태가 일본에서 그린 산수도

 

임득영,인왕산의 人士,小塢鷄犬

 

임득명의 인왕산 天時 泉流晝夜

 

임득명의 인왕산의 아침.絶崖輕嵐

 

임득명,인왕산의 저녁,翠峰返照

 

이재관/草葉題詩.파초잎에 시를 쓰다.

 

임득명의 인왕산 사계

 

 

 

김명국,심산행려도

 

 김명국 죽음의 자화상,한때 은사도로 알려짐

 

 

김명국의 포대도,포대화상

 

김명국,노엽달마도

 

김명국 습득도

 

최북의 指頭作 갈대와 게,손가락에 먹물을 찍어 그렸다

 

최북,표훈사도

 

최북,공산무인도,空山無人 水流花開

 

이한철/최북 초상

 

변박/왜관도,1783

 

조희룡/묵란도

 

조희룡,매화서옥도

 

圍棋圖.작자미상

 

궁내청에 있는 조선인 희마도

 

성시전도 북부 부분.1780

 

소과응시.....난장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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