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경주 분황사 (芬皇寺)

백삼/이한백 2015. 8. 4. 11:59

  경주 분황사 (芬皇寺)




분황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3년 (AD634)에 건립되었으며,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영묘사, 천왕사, 담엄사, 분황사』 중의 한 곳인데, 조선 선조 25년 (AD1592)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려서 다시 지은 것이랍니다



신라의 백정(白淨)인 진평왕과 마야(摩耶)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덕만공주는 바로 신라의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한 지방인데, 그런 석가족의 우두머리 백정인 정반왕(淨飯王)이 석가모니(석가족의 성자)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으로 알려져 있슴』로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양육되고, 불즉왕(佛卽王) 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아래서 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은 즉위 즉시 분신과 같은 소지품들을 사리함에 봉안한 자신의 가묘(假墓) 격인 모전석탑을 축조시킴으로써 부처(佛陀)로서의 공덕을 널리 드러내고자 하였으나, 여자가 왕이 되자 이웃인 고구려와 백제가 얕잡아 보고 계속 괴롭히므로 부처님의 공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분황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절의 가람 배치는 발굴조사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1탑 3금당의 품(品)자형 가람 배치로써 신라 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고구려 지역에서 밝혀진 품 자형 가람배치는 3금당이 모두 탑을 향하고 있는데, 분황사는 모전석탑을 앞에 두고 중앙금당 및 좌우 금당이 모두 남북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창건 당시 주지는 자장율사(慈裝律師)였고, 그 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에 머물면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薛聰)이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정제한 점토로 만든 흉상』을 만들어 분황사에서 모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총이 원효대사의 소상 옆에서 예배를 드리자 소상이 그쪽으로 돌아보았다고 하는 고사가 전해 오고 있으며, 이 소상은 고려 말까지 분황사에 모셔져 있었다고 합니다.

 

 

화정국사비대 (和靜國師碑臺)

이 비는 고려 숙종 6년(AD1101)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숙종은 원효(元曉)대사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원효에게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답니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손상을 입은 화정국사비의 비신은 없어지고, 비신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확인하고 이 비대 윗면에 ´차화정국사지비적´(此和靜國師之碑蹟)이라고 쓴 친필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 (模塼石塔)

흑회색 안산암(安山岩)『화산암 분류의 하나인 중성화산암의 총칭』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탑인데, 이런 탑을 모전석탑『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전탑 (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음 )이라 하는데, 이런 전탑을 모방하여 벽돌 대신에 돌을 사용해서 모전석탑 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가 쿠쉬나가르에서 80세에 열반에 든 뒤 가까운 간지스강 가에서 화장을 한 후 조그마한 물체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를 영원한 물체(Sarira)라고 하며 한문으로 '사리(舍利)'라고 합니다.

불전(佛典)에 보면 사리가 모두 8말 4되가 나왔다고 하는데 당시 인도는 8國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리를 8등분하였으며, 이때부터 分舍利가 생긴 것이며 나누어진 사리는 8개의 塔을 세워서 모시니 그 명칭을 STUPA라고 하는데 이는 인도말로 '높은 분이 돌아가서 계신 곳'이라는 뜻이며, STUPA의 소리를 한자로 탑파(塔婆)또는 줄여서 탑(塔)이라 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 신라에서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경이나 불상 그밖에 귀중한 보물 등 )를 모시고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탑돌이도 그런 의미이며, 그래서 아주 옛날 절에는 탑만 있었답니다』

 

  이 탑은 9층 탑 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반쯤 헐어버림으로서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습니다.











복구전 (AD 1914 ), 후 모습 및 9층 상상도, 복구 후 잉여 벽돌 무더기


기단부는 자연석으로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의 아랫부분을 다듬어 고르게 맞추어 놓았는데, 이런 방법을 ´그렝이 공법´이라고 한답니다.

기단부 네 모서리에는 사자 및 물개를 2마리씩 세워 탑을 지키게 하였고,












1층 탑신은 동서남북 네 면에 화강암으로 된 출입문이 있으며, 출입문 안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출입문 양편에는 부처님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하였는데, 그 모습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이 역동적입니다.

   

『 분항사 모전석탑에 출입문을 두고 있는 구조의 아이디어는 인도 중서부의 미디아 프라데시주에 위치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산치대탑의 기능을 일부 모방한 형태라고 합니다 』


따라서 신도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동서남북 문 앞에 줄을 선 모습을 형상화한 모양이 곧 절 만(卍)자가 되었답니다.

 

일제시대(AD1915) 이 탑을 수리할 때 탑 속에서 사리함이 나왔는데, 그 속에 부인들의 소지품인 금/은 바늘, 가위, 실패, 방울 등이 나왔는데, 아마도 여왕의 소장품 이였던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그 밖에 고려 때 사용했던 엽전도 나왔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때 크게 수리했던 걸로 생각되며, 국보 제 30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석정(石井) - 호국룡 변어정(護國龍 變魚井)

탑의 북쪽에 8각의 돌출된 우물이 있는데, 현존하는 신라 우물 가운데 가장 우수하며, 우물의 겉모양은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이랍니다.

외부의 8각 모양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八正道)『원시불교의 阿含經의 법-중생의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해탈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8가지 방법 - 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勤,正念,正定』를 상징하고, 내부의 원형은 원융(圓融)의 진리 『우주의 근본 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이 우물과 동지, 청지에는 호국룡(護國龍) 3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제38대 원성왕 11년(AD795) 때 당나라 사신이 호국룡 3마리를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신하를 시켜 빼앗아 온 후로부터 이 우물을 ´호국룡 변어정´ 또는 ´삼룡 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