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히틀러는 사이코패스도, 야망가도 아니었다

백삼/이한백 2015. 7. 28. 12:30

올해는 세계를 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터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70주년을 맞습니다. 화요기획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에서는 연중 이 대전의 주역에 얽힌 통념들을 되짚어보고, 승패가 교차한 전투의 이면을 살펴보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첫 회는 '히틀러' 이야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하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굴까? 모르긴 몰라도 아돌프 히틀러일 것이다. 히틀러를 모르고는 사상 최대의 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한 인물이 역사를 좌우했다는 식의 영웅주의 역사관을 좋아하는 역사학자는 많지 않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사건에 히틀러의 개성이 깊고 진하게 배어 있음을 부인하는 역사학자도 그리 많지 않다. 희대의 악인이라는 가치판단은 때로 역사의 행위자로서 히틀러가 지닌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교란한다. 현대사의 속살을 들여다보려면 통념을 떨치고 히틀러라는 인물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일반인은 히틀러를 감정이 메마르다 못해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일종의 성격장애자로 여기기 쉬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켜 제노사이드를 수행했겠냐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가까운 사람에게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파시즘 신봉자가 아닌 평범한 여성으로 인연이 닿아 세 해 동안 사무원으로 히틀러 곁에서 지낸 트라우들 융에가 훗날 쓴 회고록을 읽어보면, 평균적인 사람보다 더 다정다감한 히틀러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 히틀러는 의외로 소박ㆍ다감한 캐릭터

히틀러는 "심지어"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복수심을 이글이글 불태우는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쇄도해오던 1945년 4월 초 에바 브라운은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이동해 연인 히틀러가 머물던 지하 벙커에 들어섰다. 에바에게 철딱서니 없이 왜 죽으려고 여기에 왔느냐면서 짐짓 화를 내는 히틀러의 눈망울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고 트라우들 융에는 증언한다. 배신하는 부하가 속출할 만큼 패색이 짙어진 상황인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곁으로 온 여인의 사랑에 감격한 히틀러는 4월 30일 이 여인과 동반 자살한다.

또한 히틀러는 미국이나 일본의 애니메이션에나 나옴직한 악당처럼 세계 정복을 꿈꾼 허황된 야욕의 소유자로 흔히 각인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의 힘은 '히틀러가 어떻게 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라는 군인 출신 역사가의 저작이 한국에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는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무릎 꿇었던 '약소국' 독일의 정치가였다. 아무리 허세로 상대의 기를 꺾는 도박꾼 기질을 지녔던 히틀러였어도, 그 두 나라만 상대하는 것도 이만저만 버거운 일이 아닌데 지구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을 리 없다.

히틀러의 포부는 '소박'했다. 그의 꿈은 독일을 유럽 대륙의 패권 국가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이 꿈을 이루고자 히틀러는 1939년 8월에 이념의 적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등 뒤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1940년 늦봄에 숙적 프랑스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하지만 유럽 최강의 육군 전력을 지녔던 프랑스를 6주 만에 꺾은 그가 도버 해협 너머의 영국에게는 항복을 강요하지 않고 종용했다. 영국이 독일을 유럽 대륙의 패권자로 인정해주기만 한다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과 굳이 애써 전면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히틀러의 판단이었다. 미국과의 대결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보다는 주어진 정세에서 최대의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적 정치가에 더 가까운 인물이 바로 히틀러였다.

아돌프 히틀러(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1940년 6월 프랑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뒤 나치 수뇌부를 이끌고 파리의 명물 에펠탑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베를린 프러시아문화유산이미지자료원 제공

● 존중했던 '영국' 항전에 꺾기로 결심

히틀러의 구상에서 영국은 새로운 패권자 독일과 함께 세계 정치를 주도할 존중할만한 제국이었다. 다만 영국은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일본에게 각각 지중해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넘겨야 할 터였다. 영국 역사가들 중에는 1940년 여름의 전황과 정세에서는 독일과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영국 정치가들이 취해야 할 합리적 선택이었다고 보는 이가 적지 않다. 프랑스를 꺾은 독일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영국에 새로 들어선 전시 내각의 총리는 합리성보다는 낭만성이 앞서는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히틀러의 예측을 무참히 깨뜨리고 화평이 아닌 결사 항전을 선택하는 도박꾼 기질을 발휘한다.

구상이 어그러지자 히틀러는 영국에 파상 공세를 퍼부었다. 공군력으로 영국을 제압하려던 계획이 벽에 부딪치자 히틀러는 대서양에서 미국과 영국을 잇는 보급선을 잠수함으로 끊어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영국은 말라 비틀어져가면서도 버텼다. 히틀러는 생각했다. 유럽 동쪽에 소련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영국이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으면서도 양면 전선의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을 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41년 6월 22일 독일 국방군은 불가침 조약서를 휴지로 만들고 소련 침공에 나섰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 졌지만 소련 침공도 처음엔 승산 있어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다. 독일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소련으로 밀고 들어갔지만, 프랑스와 달리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붉은 군대에게 1941년 11월 모스크바 바로 앞에서, 1942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1943년 8월 쿠르스크에서, 1944년 한여름 동유럽에서 대패한 뒤 1945년 4월 백기를 내건다. 프랑스를 단숨에 꺾고 영국을 빈사 상태에 몰아넣은 독일이 왜 소련에게 졌을까? 히틀러가 독일 국방군의 작전에 일일이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 히틀러가 군사 엘리트인 독일 명장들의 손발을 옭아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히틀러가 군사학의 문외한이었다면, 소련 침공 전에 독일군이 유럽의 북쪽, 서쪽, 남쪽, 그리고 대서양에서 거둔 연전연승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히틀러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준재 소리는 들을 만한 전략가였다. 앞서 말한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의 저자는 '바르바로사 작전은…처음부터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시각은 '사후 판단'의 전형일 따름이다.

독일이 소련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은 히틀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독일 장군들이 공유한 감정이었다. 이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기관도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기껏해야 한두 달 막아내고 패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1941년 8월 파죽지세로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독일군의 주력을 우크라이나로 돌린 히틀러의 결정 탓에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면서 궁극적인 패전으로 치달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결정의 군사학적 타당성을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판단에도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음을 뜻한다. 독소전쟁사의 권위자인 데이비드 글랜츠는 1941년 8월에 모스크바보다 키예프를 주목표로 삼는다는 결정이 군사학적으로 옳았다며 히틀러의 손을 들어준다.

● 능력 과신으로 결국 모든걸 잃어

히틀러가 설쳐대는 바람에 독일의 명장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통념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실력이 떨어져 패장이 된 독일 장군들이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감추는 구실로 나중에 히틀러를 써먹었다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 군사사가 앨런 클라크는 히틀러가 옳고 장군들이 틀린 적이 훨씬 더 많았다면서 "전쟁이 끝난 뒤 히틀러는 독일 군사정책의 모든 실수와 오판을 떠넘기는 편리한 봉이었다"고 주장한다. 죽어서 말이 없는 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공모자들의 속성이자 전술임을 고려해야 한다.

히틀러는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도, 세계 정복을 노리는 황당무계한 야심가도, 군사학의 기본도 모르면서 설쳐대는 바보도 아니었다. 외려 그 반대였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20세기 최대의 오점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을까? 그 까닭은 역설적으로 그가 거둔 성공에 있다.

부랑아에 지나지 않던 히틀러는 1920~30년대 격변을 거치면서 독일을 이끄는 지도자로 떠올라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를 주도했고, 1941년까지는 전쟁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이런 성공에 도취된 히틀러는 자기가 인간의 한계와 윤리를 뛰어넘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하지 못한 러시아 정복을 자기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열등인종'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도덕적 우월감이 도출되었다. 그 결과는 다 알다시피 인류의 재앙이었다.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두 권짜리 히틀러 평전을 쓰면서 1권에는 '휘브리스', 2권에는 '네메시스'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한낱 인간이 성공에 도취되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오만(휘브리스)에 빠지면 율법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린다. 커쇼가 붙인 부제에 히틀러의 운명이 오롯이 담겨있다. 히틀러는 잘 나갈 때 자제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