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석의 축구 한잔
1985년 11월 3일, 그러니까 30년 전 일이다. 가위바위보도 상대에게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승부에 있어서는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던 한국과 일본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축구 한·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 당시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라는 이승만 대통령(당시)의 서슬 퍼런 말을 들어야 할 정도의 시대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일본에 패한다면 한동안 국민으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는 건 다를 바 없었다. 더욱이 뛰는 선수 처지에서도 스스로 용납 못할 결과이긴 했다. 언제나 일본은 한 수 아래의 상대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결은 여타 한·일전보다 더욱 과열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1986 멕시코 월드컵 본선행이 걸린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일본은 사상 첫 월드컵 본선행을 각각 노리고 있던 터라 한·일전이라는 타이틀을 떠나서라도 무조건 이겨야 했다. 아니 한·일전에 월드컵 본선행 티켓이 붙으면서, 역사상 가장 뜨거운 라이벌전이 됐다.
30년 전 기억이니 축구팬 뇌리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기억일지 모르나, '진돗개' 허정무가 일본 골문을 뒤흔들고 환호했던 그 경기라고 하면 "아!"하고 무릎을 탁 칠지 모르겠다. 32년 만에 일본을 제물 삼아 월드컵 본선행에 성공했으니, 전 국민이 크게 들뜰 수밖에 없었다. 한국 축구 최고의 순간이었다. 당시 한·일전은 허정무가 결승골을 성공시켰던 그 경기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은 허정무가 결승골을 성공시킨 이 경기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아시아 최종 예선 2라운드였다. 1주일 전 한국은 그보다 더 중요한 대결을 일본에서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 대결에서는 월드컵행의 마지막 한 점을 찍은 허정무 못잖게 맹활약을 펼친, 꼭 기억해야 할 선수가 있다.
한국의 월드컵 가는 길을 연 주인공
1985년 10월 26일 도쿄 국립경기장. 감독 교체 등 진통 끝에 어렵사리 최종 예선에 오른 한국과 달리 일본은 자신만만한 분위기였다. 최종 예선에 오르기까지 여섯 경기를 치르며 5승 1무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고, 14골 3실점이라는 빼어난 골 득실까지 기록했다. 당연히 그들 나름대로 월드컵 본선행을 기대하는 분위기로 부푼 것이 당연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을 발밑에 둔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파죽지세를 이끈 인물 중 하라 히로미라는 선수가 있었다. 훗날 일본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전무 이사를 맡게 되는 인물로, 당시로서는 아시아권 내에서 압도적이라 할 수 있는 체격 조건(183㎝ 80㎏)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를 찍어 누르는 포스트 플레이에 능했다. 일본 내에서 '아시아의 핵탄두(アジアの核弾頭)'로 불릴 정도로 명성을 날렸던 선수였다. 한국에서도 하라를 어떻게 봉쇄하느냐가 큰 숙제였다. 180㎝가 넘는 수비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하라가 그 중요한 경기에서 숫제 지워졌다. 그것도 자신보다 5㎝가 적은 수비수에게 완벽하게 짓눌렸다. 한국이 내세운 하라의 대항마는 바로 정용환이었다. 198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토퍼이자 맨 마크 능력만큼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던 정용환은 하라를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슈팅을 방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최전방 화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일본이 한국과 두 차례 대결에서 넣은 득점은 단 1골, 그것도 '프리킥 스폐셜리스트'로 불리던 기무라 가즈시가 먼 거리에서 시도한 프리킥 골 외에는 전무했다. 정용환의 맹렬한 저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철벽 수비였다.
게다가 정용환은 수비에서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전반 30분 코너킥 상황에서 볼이 뒤로 흐르자 페널티 박스 밖에서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일본의 골망을 뒤흔들었다. 당시 하라가 체격적 우위를 앞세워 수비에 가담하자 맨 마킹하기 위해 덩달아 상대 진영에 올라간 것이었는데, 덕분에 잡게 된 단 한 차례 찬스를 멋진 슈팅으로 골까지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골은 한국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내심 자신했을 일본을 심리적 면에서 완전히 무너뜨린 득점이었다.
정용환의 선제골과 이태호가 12분 후 터뜨린 추가골에 힘입어 한국은 무척 어려울 것이라 여겨던 원정 1차전에서 2-1로 승리하며 월드컵 본선의 7부 능선을 넘을 수 있었다. 허정무가 본선행 마침표를 찍었다면, 정용환은 월드컵 본선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연 선수였다.
정용환의 축구 인생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만 언급했지만, 기실 이 경기 외에도 그가 남긴 족적은 매우 깊다. 월드컵 본선행뿐만 아니라 1986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금처럼 A매치가 빈번하지 않았을 시절인 1983년부터 1993년까지 A매치 85경기에 출장해 3골을 성공시키며 팬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K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용환은 부산 대우 로얄즈(現 부산 아이파크)의 원 클럽 맨이다. 프로 통산 150경기에 출장해 7골을 성공시켰다. K리그 우승 3회, 1986 AFC(아시아축구연맹) 클럽 챔피언십(AFC 챔피언스리그 전신) 우승 1회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991시즌에는 팀의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이끌며 MVP까지 거머쥐었다. 수비수로서 150경기를 뛰면서 경고를 받은 적은 단 한 차례에 불과할 정도로 깔끔한 경기 매너로도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초창기 한국 프로축구사에 있어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스타였다.
뜬금없이 정용환의 일대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안타깝게도 그가 지난 7일 1년 위암 투병 끝에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현역 시절을 뒤로하고 은퇴한 후 프로팀 지도자 등 세간의 시선이 닿는 무대에서 활약하지 않은 터라 시나브로 팬의 기억 속에 잊히고 말았다. 하지만 현역 시절 주어진 소임을 충실히 해내던 성실함을 은퇴 후에도 이어 갔다. 고향과 다를 바 없는 부산에서 유소년 축구 발전에 힘썼고, 부산 외국어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학문적 시각에서 축구를 연구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국 축구 발전에 공헌했다.
음지든 양지든 주어진 자리에서 한국 축구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자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이른 죽음이 아주 안타깝다. 대표팀이든 프로팀이든 그는 '레전드'라는 평가를 충분히 받을 만한 큰 별이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뗄 A대표팀은 물론 그가 숱하게 땀을 흘렸던 K리그 클래식에서 먼 길을 떠나는 대선배를 추모했으면 한다. 당연히 축구팬 역시 1980년대 한국 축구 수비진을 책임지며 큰 사랑을 받았던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애도를 표했으면 한다.
글=김태석 기자(ktsek77@soccerbest11.co.kr)
사진=베스트 일레븐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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