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汚吏, 감사, 암행어사의 어제와 오늘

백삼/이한백 2013. 11. 5. 18:35

汚吏, 감사, 암행어사의 어제와 오늘

 

《『기강이 해이하여 도무지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욕심이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수령자리를 놓고 머리가 깨지도록 경쟁하는가 하면 한번 자리를 얻어 나면 오직 백성의 재물을 긁어먹는 데만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조선 왕조가 건국 초부터 부패했었다면 5백년이나 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큰 외침을 겪고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불가사의로 여겨지고 있다. 서양은 물론 중국의 역대왕조도 2백년 정도 가는 것이 고작이요, 평균 수명이 3세대 정도면 끝났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려 5백년에 이어 조선 5백년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오랜 정치적 안정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통치자가 정치를 잘하고 백성들이 임금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를 보면 그렇게 조선왕조의 정치가 잘 됐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한 왕조가 5백년이나 가는 나라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고까지 혹평하면서 1923년경 그가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도중 서울역에서 내려서 한국을 구경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그것은 토인비의 큰 잘못이 었고 한국에 대한 심한 편견에서 나온 착각(?)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토인비의 오해를 풀만큼 부정부패가 없는 건강한 나라요, 청렴한 관리들로 가득 찬 국가였는가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조선왕조는 분명 부정부패로 망한 나라였다. 부정부패가 심했던 만큼 백성의 원성도 높았고 민란 또한 잦았다. 그래서 외적이 침략하기 쉬운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를 건국 초부터 부패한 나라였다고 매도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반대였을 것이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 건국 초부터 19세기 초의 순조(純祖) 때까지 4백년간 과연 얼마나 많은 공직자가 청백리(淸白吏)로 추대되었을까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 연구가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왕조의 청백리는 4백년 동안에 1백57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청백리가 1년에 평균 0.4명 정도밖에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고 보니 청백리 되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청백리를 고려시대에는 양리(良吏)라 하였다. 청백리의 개념이 단지 청렴결백할 뿐 아니라 능력과 노력까지 겸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므로 차라리 양리라 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주례(周禮)』에 보면 『재상은 염선·염능(廉善·廉能)하여야 한다』고 했다. 청렴결백할 뿐 아니라 재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기준에 맞아야 청백리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탐관오리는 청백리의 반대 개념이므로 저절로 그 개념이 나온다. 더럽고 무능한 관리, 즉 오리(汚吏)와 장리(贓吏)라고도 불린 탐관오리는 악리(惡吏)요 동시에 무능 리(無能吏)였던 것이다.

청백리 1백57명 가운데 대다수가 조선초기의 현군(賢君) 밑에서 일하던 재상들이었다. 요즘에도 국무총리직을 웬만큼 수행했으면서도 재수가 없어 모신 대통령이 부정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도매금으로 나쁜 재상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옛날에도 연산군 밑에서 재상 노릇 하던 사람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은 사람이 드물었다.

따라서 청백리는 세종대왕 같은 명군(名君) 밑에서 나는 법이다. 임보신(任輔臣)의 『병진정사록』에 보면 조선 건국 초의 공신인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 조정의 어진 재상으로는 황희와 허조를 으뜸으로 삼는다. 이 두 사람이 세종을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린 업적은 국사에 실려 있으므로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두 분 모두가 전조(前朝·고려조)에 등용된 일이 있으므로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업적보다 절개를 중히 여긴다』

청백리의 대명사 황희 정승에게도 지울 수 없는 흠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대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두 왕조를 섬기는 실절(失節)을 했던 것이다. 깨끗하고 능력이 있다는 요건 외에도 청백리는 모름지기 지조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완벽한 청백리가 되기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 보면 황희 정승처럼 여러 대에 걸쳐 요직을 맡은 사람이 많다. 그런가 하면 자유당 때의 얼굴이 국회의사당에 버젓이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1965년의 을사조약」을 맺고서도 뻔뻔스럽게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청렴·재간·노력·지조 그 어느 덕목도 갖추지 못한 오리요 장리들인 것이다.

 

종이 한 장의 부정  

세종대왕 때 이야기로 넘어가자.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많은 학자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자 장안에 글 읽는 소리가 요란했고, 글 쓰는 사람도 늘어나 지가가 폭등하 여 종이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세종은 국립제지공장을 세워 그 이름을 조지청(造紙廳)이라 했다. 기록에 보면 이 조지청에서는 여러 가지 종이를 만들었는데 그때 사 람들은 조지청의 종이를 만져보기를 몹시 원했다. 어떻게 하면 조지청에서 만든 고급지를 얻어 쓸까 궁리하던 어떤 선비가 조지청장 송(宋)모씨에게 애첩이 있다는 것을 알 고 그녀를 통해 유엽지(柳葉紙) 한 장을 몰래 빼냈다.

그런데 이 일이 발각되어 조지청장 송씨는 옥에 갇히고 파면당했다. 종이 한 장을 유용했다 하여 장물죄로 처벌한 것은 그 당시의 관례에 비추어 보더라도 너무나 가혹한 일 이었다. 몇 십년이 지난 뒤 어느 날 임금이 갑자기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송모라고 하던가 못된 첩 때문에 종이 한 장에 파면당한 조지청장이 있었지. 그 사람 너무 억울했어. 지금 다시 복직시켜 주려고 하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그때 그 여자 와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가 아니면 버렸는가』

모두가 대답하기를 『송모는 아직도 그 여자와 헤어지지 않고 삽니다』라고 했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한 계집으로 인하여 누명을 썼으니 마땅히 뉘우치는 의미에서라도 그 여자와 관계를 끊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아직도 같이 살고 있다고 하니 용기가 없는 자다. 어찌 그를 다시 기용할 수 있겠는가』

이 임금이 성종(成宗)이었으니 송씨가 세종 때 지은 죄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종이 한 장의 부정이 평생이력서에 올라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된 사례를 보고 우리는 조선 건국 초기에는 임금은 현명했고 그 신하들은 깨끗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 는 것이다.

『패관잡기』에 보면 중국의 명나라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는 조선과 달리 건국 초부터 부정부패가 심하여 『일억부자 여낭중 십만 부자 왕상서(一億呂郎中 十萬往尙書)』란 말이 나돌았다. 나라가 크니까 뇌물액수도 커서 이미 이때 명나라 이부(吏部=내무부)관리 여씨가 1억을 먹었고 왕씨는 10만냥을 해먹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신들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올 때면 꼭 중국 탐관오리에게 돈을 뜯겼다. 산해관(山海官)이라는 관문에서 세관원에게 돈을 바쳐야 출국할 수 있었다. 사신 일행은 그곳에서 짐검사를 당하는데 세관원들은 칼을 들고 보따리를 찢는가 하면 끈을 잘랐다. 놀란 일행은 명나라에서 산 선물을 모아 뇌물로 바쳤다. 그 값을 은으로 환산하면 무려 7천~8천냥에 이르렀다는 것이며, 줄 것이 없는 사람은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고 왔다고 하니 기막힌 일이었다.

중국을 여러 차례 가본 사람이면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도 중국은 명나라 때 못지 않은 「뇌물왕국」이다. 대만은 거기에 비하면 청렴한 편이다. 중국 시장이 크다고 덮 어놓고 대만과 관계를 끊고 중국과 수교한 우리나라는 요즘 톡톡히 그 보상을 치르고 있다.

최근 내무장관이 암행어사를 보내 근무이탈자나 태만자는 사정없이 적발 징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길바닥에 차를 세워놓고 낮잠 자는 교통경찰차가 없어지고 심지어 순경이 모두 순찰나가서 파출소가 텅 비어 도둑이 들어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사와 감사의 키재기  

그런가 하면 한보비리에 연루되어 옥에 갇힌 어느 국회의원은 선물과 뇌물의 차이를 몰라 억대 뇌물을 선물로 착각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고백을 하여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 었다. 도대체 공직자의 이런 부정부패 불감증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실로 조선왕조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암행어사 제도는 이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나오는 것이니까 제도 자체는 건국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주목적이 지방행정 책임자인 감사(監司=도지사)와 수령(守令=군수)의 부정을 적발하여 이를 중앙에 보고하고 징계하는 일이었다. 여간 중요한 국정 감시 제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임금 이외에 아무도 암행어사를 임명할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宣祖)가 어느해 큰 기근이 들자 지방에 암행어사를 보내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사람이 없어 재상에게 『누가 좋겠는가』고 물었다. 영의정이 대답하기를 『어사의 임명권은 오로지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사오니 신들이 참여할 일이 못됩니다』라고 했다. 선조는 다시 삼공(三公·영의정·좌의정· 우의정)을 모두 불러 『누가 좋겠느냐』고 물었다. 삼정승은 숙의 끝에 대답하기를 『삼공이 암행어사를 천거하는 일은 그 전례가 없사옵고 만일 이 전례를 깨뜨리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오니 통촉해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이처럼 암행어사는 반드시 임금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계급은 매우 낮았다. 지방감사의 품계보다 낮았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사가 지방에 가서 감사의 잘못 을 지적하면 감사가 화를 내면서 『나보다 낮은 놈이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하니 괘씸하다』라고 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선조때까지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비록 벼슬 이 낮다 하여도 어사는 감사보다 위』라고 선조가 직접 단정하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감사란 그 이름이 말해주듯 관내 수령들을 감시하여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중앙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직책이었다. 그래서 어사와 상극이 아닐 수 없었다. 감사가 있는 곳을 감영(監營)이라 했는데 도청소재지가 대체로 감영 있던 곳이었다.

팔도 감사의 주된 임무는 앞에서 말했듯이 관내 수령들의 비행을 염탐하는 일이었으나 나중에 감사의 권한은 감사권에 국한하지 않고 각종 세무와 형사 군사 행정까지 확산,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감사 자리치고 나쁜 데는 없었으나 특히 좋은 곳이 기생이 많은 평양이었다. 그래서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안 한다』는 속담이 나왔던 것이다.

감사는 분명히 수령보다 위에 있었고 어사는 수령은 물론 감사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었으니 수령의 행차는 서울에서 지방의 임지까지 독교자(獨轎)를 타고 갔고, 감사는 지체가 높아 쌍교자(雙轎)를 타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사는 교자를 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옷차림도 거지로 변장하여야 했으니 참으로 할 짓이 아니었 다.

 

「世祖의 교서」 

감사가 수령들의 고과성적을 매기는 것을 전최(殿最)라 했는데 잘하면 「최」, 못하면 「선(善)」이라 했다. 감사를 잘 대접해야 「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수령들의 감사대접은 융숭했다. 성종 때 일인데 성종이 하루는 지방에서 감사를 하다가 중앙의 승정원 승지로 영전해온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들으니 감사가 지방에 나갔을 때 수령이 대접하는 음식이 융숭하고 그렇지 못한 데 따라 성적을 매긴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승지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화가 나서 『어찌해서 그렇단 말인가. 수령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입과 배에 바치는 음식으로 가름한다고 하니 통탄할 일이로다』 그랬더니 승지 하는 소리가 『음식을 바치는데 입에 맞게 바치는 것은 쉽습니다. 이렇게 쉬운 일도 못하는 수령이라면 다른 일도 못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고 성종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랫사람은 당연히 윗사람을 대접하여야 한다는 이 관례는 몇 억의 떡값으로 불어나고 유흥비와 여비로 변형되어 오늘의 공직사회 비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백성이 편히 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수령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근태는 감사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요즘의 말로 바꾸면 『국무총리 이하 내각이 잘하 면 민생이 잘되고 대통령이 잘하면 내각이 부지런을 떤다』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나라 안팎이 하도 안 되니까 옛날 고사라도 들어서 귀감으로 삼을 수밖에 없겠다.

옛날의 감사는 오늘의 도지사에 해당하지만 대통령 못지 않게 업무가 과다하고 머리를 잘 써야 하는 자리였다. 그 좋은 예문이 「세조(世祖)의 교서」다.

『감사는 왕명을 받아 민과 근심을 나누고 착한 자를 올리고 악한 자를 물리치는 것이 그 임무인데 요즘 들으니 수령들이 청렴·공평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자 적고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데만 급급하여 심지어는 사사로운 일을 위해 백성을 괴롭힌다는 말까지 들었다. 만일 감사가 이를 적발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감사가 수령들을 책하고 과인이 감사를 책하면 나라의 체통이 서고 이것이 나라의 큰 정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이 시각부터 성심성의껏 백성을 위로하고 사랑하며 농사 와 잠업에 힘쓰며 축산의 번식을 부지런히 하여 병마(兵馬)를 기르며 옥에 죄수가 오래 지체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생활을 박하게 하고 늙고 병든 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학교 를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과인이 마음으로 발탁해 쓸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와 어긋나는 자가 있으면 꼭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세조의 교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청렴하고 밝아야 하며 또 근면하고 재간까지 겸비하여야 하는 것이다.

 

흉년에 탐관오리 난다  

보통 상식으로는 관리의 부정부패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흥청망청 윤택할 때 많을 것 같으나 조선시대의 탐관오리들은 반드시 그렇지 않고 흉년이 들었을 때 더 극성이었다. 이때는 암행어사까지 정신이 나가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윤황(尹惶)이 그 좋은 예다.

1628년 인조 6년의 일인데 윤황이 암행어사가 되어 평안도를 두루 돌았다. 그때 유산죄(遊山罪)를 범하고 말았다.

『무릇 암행어사란 직책은 이토록 어려울 때가 아니더라도 산놀이(遊山)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윤황은 평안도를 두루 다니면서 눈으로 참혹한 농촌생활 상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입으로는 「국가가 조석에 망하게 되었으니 종묘사직의 음악을 파하지 않을 수 없다」고 까지 말한 자가 감히 산놀이를 하며 절간에 머물렀으 니 이것은 태평성대에나 할 일입니다. 그 행실이 괘씸하기 짝이 없사오니 그를 어사직에서 물러나게 하소서』

윤황에 대한 이 파직상소는 뒤에 기각되고 말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감사가 수령에게 음식대접을 융숭하게 받아도 좋다는 관례나 어사가 공무집행중 산에 놀러가도 좋다는 것이나 다 오늘까지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몇 국회의원이 미국에 갔다가 술 마시고 골프를 즐겼다는 보도가 나와 가뜩이나 우울한 나라 상황을 한층 더 울적하게 한 일이 있다. 결국 유야무야로 끝났다는 점에 서 3백60년 전 인조 때의 사건과 같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인조 때는 요즘처럼 잘 먹고 잘 살지 못했기 때문에 암행어사의 직책은 엄청나게 막중한 것이었다. 요즘에도 한보사태로 야기된 경제위기가 옛날의 흉년 못지 않은 국난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도 국회의원이 기업의 돈을 받아 외유하고 돌아왔으니 윤황의 유산죄보다 몇 곱절이나 큰 추태요 탐욕인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할 때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기도 하지만 김기종(金起宗)과 같은 훌륭한 감사도 나왔다. 인조임금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면 새까만 까마귀떼 속에 한 마리 흰 학을 보는 듯 마음이 후련하다.

『예나 지금이나 제왕으로서 누가 백성을 안정시키려 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궁궐 안 깊은 곳에 있어 바깥 사정을 다 알지 못하므로 지방행정을 감사에게 맡기는 것이고 임금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게 하는 것이니 그 책임이 막중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여러 도의 감사 가운데 평안도 감사 김기종이 청렴하고 진실하고 기민한 재질로 나라를 위해 노고를 다하니 평안도 백성들이 우러러 받들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한다고 들었다. 이에 과인이 한 계급을 올려주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다. 그 사 람 이외에도 선치(善治)하는 감사가 없지 않으나 모두 김기종만 못하니 모름지기 김기종을 본받도록 하여라』

 

공명첩으로 빈민 구제  

여기서 1628년의 한해(旱害)가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병조참의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문은 이렇다.

『나라가 불행하여 유례없는 한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른 곡식이 익으면 도적들이 밭에서 밤을 새우다 새벽에 곡식을 베어 가고 심지어 밭주인을 묶어 놓고 죽이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견디다 못해 목매 죽고 명화적(明火賊·떼강도)이 농촌을 횡행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초가을인데도 벌써 이 지경인데 내년 봄 춘궁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금년은 눈 비가 오지 않아서보다는 바람이 불어 농사를 망친 풍재(風災)였습니다. 풍재는 수재나 한재보다 더 무섭습니다』

유백증은 이어 수령들의 탐학과 백성들의 원성(怨聲) 그리고 암행어사의 출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근자에 보건대 기강이 해이하여 도무지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욕심이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수령자리를 놓고 머리가 깨지도록 경쟁하는가 하면 한번 수령자리 를 얻어 나면 오직 백성의 재물을 긁어먹는 데만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원(民怨)이 날로 늘어나고 재력이 탕진되어 가는데 수령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암행어 사 출두입니다. 그들은 암행어사 출두를 두려워해서 「호랑이 온다(虎行)」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암행어사를 잘 변장시켜 시도 때도 없이 지방에 내려보내시면 수령들이 두려워서 감히 마음대로 백성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흉년이 들면 조선시대에는 어떤 대책을 세웠을까. 아무리 임금이 암행어사를 지방에 많이 보내도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구제할 방도가 없다.

호조판서 심열(沈悅)의 상소문을 보면 모든 공직자의 봉급을 줄여서 그 돈으로 빈민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즈음의 불경기는 곧 옛날 농경시대의 흉년이다. 세계 경제는 이미 1980년부터 장기 불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유독 한국만은 거품경기에 오만한 소비생활을 해오다가 최근 조업단축을 하니 명예퇴직을 시키니 하는 바람에 노동자들이 봉급동결에 동의하고 있는데 옛날 흉년 때 공무원 봉급을 깎아 빈민구제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또 하나의 방법은 돈 많은 부호들에게 공명첩이라는, 실직이 없는 관리임명장을 발부하여 주고 그 대신 그들에게서 곡식을 받아내 이를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불합리한 것도 같지만 사실 매우 유효한 빈민구호책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돈이 많다는 사람들의 돈은 상당수가 「검은돈」이다. 그래서 실명을 드러낼 수 없는 돈들이다. 옛날처럼 장관발령장이나 문화훈장 같은 것을 주고 이 돈을 끌어내 중소기업에 융자해주면 어떨까. 공명첩을 갖고 옛날 영의정했다고 자랑하는 집이 얼마나 많은가.

공명첩이란 실직이 없는, 즉 자리가 없는 임명장이다. 진휼종사관이 지방에 갈 때 이름이 적히지 않은 공명(空明)의 임명장을 많이 가지고 가서 구호 곡식을 많이 내는 지주 들에게 주는 것인데 이것을 무척 영광으로 생각해서 지금도 농촌에 가면 『교지(敎旨)』라는 고문서를 가보로 갖고 있는 집이 많다. 워낙 벼슬 좋아하는 나라의 백성들이라 지금도 장관임명장을 돈 주고 살지 모를 일이다.

 

3백70년전의 北 난민  

최근 황장엽이 망명하면서 북한의 식량난이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라 10년 전부터 누적된 실책의 결과라고 말했는데 황장엽이 역사가가 아니어서 조선시대 북한에 얼마나 흉년이 자주 들었는가를 모르고 한 말이다. 북한은 결코 남한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금까지 버텨온 것인데 하루 속히 3백70년 전의 일을 배워 흡수통일을 환영 해야 할 것이다.

이해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올린 글을 보면 북한 난민들이 서울에 밀려 들어오고 있다.

『북쪽 사람들이 서울에 몰려와서 이들 가운데 1만여 가구를 배에 실어서 영호남지방으로 보내고 배보다 육로로 가겠다는 걸식 희망자는 따로 허가해 주었다. 그런데 서울 근방에 와서 걸식하는 사람은 모두 선천, 철산, 용천, 의주 등의 평안도 농민들이라 한다』

만일 지금 당장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의 굶주린 백성들이 서울에 몰려올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다시 영남이나 호남으로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남쪽 의 농사도 시원치 않아 북쪽의 피난민을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민들이 몰려오니 영호남에 연합한 떼강도가 등장하였다. 이른바 불한당(不汗黨)이라는 것인 데 무서운 강도단이었다.

『백성들이 궁하면 도둑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전쟁이 끝나자 떠돌이가 되어 직업을 잃었고 이미 생활을 의탁할 데가 없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기근을 만났으 니 부득불 겁탈하여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듣건대 영남과 호남 여러 고을 백성들이 서로 불러모아 무리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좀도둑이 되었다가 결국 불한당이 되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데다 무리 속에는 무사들과 기사들이 끼여들어 그 수가 날로 늘어나 단속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창고의 곡식을 털어가고 지방관리를 잡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하오니 하루 속히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즉 이들 불한당 속에는 프로급의 무사가 끼여 있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강도단을 맞이하여 용감하게 싸운 감사가 남원부사를 지낸 송상인(宋象仁)이었다. 송상인이 남원부사로 있을 때 도둑떼의 근거지를 습격하여 한꺼번에 수십명의 도둑 을 잡아 처형하여 그 뒤부터 이일대가 조용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각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역사를 돌이켜보고 반성하고 깨달아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박성수<역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