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스크랩] 한국사 지리는 조작된 것

백삼/이한백 2015. 6. 2. 09:10

한국에서는 흔히들 왜종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이병도 이하 식민사관자들이 한국사를 왜곡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곡이란 사실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말하며 사실 즉 해석 대상인 자료는 변형되지 않아야 하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한국사에 왜곡이란 용어를 쓸 수 있을까요?

또 근대사 지리는 정상일까요?

 

추정도 - 왜종일본이 1934 년 꼭두각시 만주국의 지도에서 지도변조.지명이동 시킨 원래 및 현재의 란하.요하

 

주) 성호 이익과 이중환은 지관의 말이라 하며 백두산이 해(亥) 방향(11 시 방향)에 앉아 사(巳) 방향(5 시 방향)의 조선으로 뻗은

     산줄기를 보고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지금의 백두산은 축 방향에 앉아 미 혹은 오 방향을 보는 위치이니 이익.이중환이 인식하는

     백두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 한국사학계가 주장하는 한국사 통설은 시간.공간적으로 모두 조작된 역사입니다.

왜종일본은 시간적으로는 기원전 2000 여년의 역사를 삭제.축소시켜 설화로 만들었고 강역을 다루는 지리 부분도 조작하였는데 다르게 해석될 수 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는데 아주 교묘합니다. 

무슨 말일까?

 

36 년간의 국치 시기를 지나보니 요하.압록강.백두산 등의 위치가 현재 지도 표기와 같이 된 것입니다. 즉 대략 1918 년 이전의 요하.압록강.백두산 등의 위치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였습니다. 광복 후에라도 제자리를 찾아야했으나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인들은 역사서에 언급된 요하, 요동이 지금의 요하,요동이 아니라 하면 아예 미친놈 취급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고대의 요수나 요동은 지금의 요하나 요동이 아니였었다고도 하며 그 시기를 윤내현과 같이 지금으로부터 2000 여년 전이나 아니면 막연하게 1000 여년 전 어느 때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결국 현재와 같은 지명상황이 1000 여년 전부터 혹은 2000 여년 전부터 있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 안이한 대처이며 어수룩한 지리지 검토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역사지리부도는 1900 년 전후에 일본.왜종들이 동경에서 만든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 볼 것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게다가 1922 년 이후에는 이 땅에 남아 있는 51 종 20 여만 권에 이르는 역사지리서등을 압수하여 어찌했다 하며 그 지리조작,지도변조를 합리화하려고 일본.왜종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서 우리 조선사를 편찬했습니다. 이들이 순수하게 한국사를 엮어냈을까요? 천만에요. 엄연한 역사를 신화.전설로 만들고 연나라 사람이라는 위만이나 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한 4 군에서부터 시작하는 서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한 역사로 만들고 이것도 모자라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에 불과하였던 요하를 떼어내 지금의 요하로 옮기는 지명이동.지도변조 등을 강행하여 지리를 조작시킨 결과 조선의 강역은 축소되고 이를 합리화하고 증거하려고 봉니,점제현신사비,호태왕비 등 유적.유물까지도 창조해내고 또 옮겼습니다.

 

그러면 왜곡이든 조작이든 밝히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그나마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볼 만한 것으로는 중국의 25 개 정사입니다. 특히 25 번째 정사라는 <청사고>에는 1911 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곧 이어 손문의 남경정부가 세워졌으니 아무리 이민족인 여진족이 통치를 했어도 어쨋든 명이 멸망한 1683 년 이후의 역사를 정리했을테고 그 <청사고>의 지리지에는 조선과의 경계 지역에 설치한 봉천.길림성의 부.구.주.현 등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을테니 조선의 서북쪽 경계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즉 조선의 압록강.토문강 강변에 설치된 청나라 봉천성의 흥경부,봉황직예구,장백부와 길림성의 왕청.연길.혼춘 등 군.현에 대한 고찰은 당연히 한국 근대사 지리의 진면목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청사고> 기록의 핵심은 지리지에 기록된 조선과 청 경계를 흐르는 압록강이 백두산에서 발원하고 그 하류는 지금의 산해관 표시가 있는 서쪽 지역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지금의 란하로 합쳐졌다는 사실입니다. 즉 1911 년 당시의 중국인들 설명이며 기록입니다. 곧 청인들이 인식한 조.청 경계인 압록강은  지금의 란하 동쪽 큰 지류 2 개 중 남쪽에 흐르는 청룡하였습니다. 이 청룡하는 단군조선 시기에 열수로 불리웠으며 고구려 초기이후 1900 년 초까지 약 2000 여년 동안 압록수로 불리웠습니다. 

 

지금의 란하는 유방이 한을 세운 이후 즉 <한서/지리지>에 2100 리 염난수와 1250 리 대요수가 합쳐진 강이며 그 하류는 강폭이  넓어 바다로도 불렸는데 <수경주> <요사/지리지> <명사/지리지> <청사고/지리지>나 송.요 시기 제도된 <지리도>, 명 시기 제도된 <요양총도> 등에도 똑같이 하류는 바다로 기록.묘사되어 있으며 바다가 시작되는 북쪽 지역은 삼차하 즉 요하.혼하.태자하 하류가 흘러들어왔고 서쪽에서는 대릉하.황하 등의 지류가 있었다고 기록.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지도 - 송.요 시기 제도된 <지리도>와 우상귀 부분도

 

 

 

반면에 당시기 <통전>을 저술한 두우만큼은 고구려의 압록수가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친다고 700 여년 전 반고가 기록한 <한서/지리지>의 염난수를 언급한 것입니다. 즉 바다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바다가 바다든 강물이든 한국사학계는 이 압록수가 흘러드는 염난수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겨우 지금의 압록강 하류 북쪽 지류인 애하 또는 애양하를 염난수였을 것이라고 비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쨋든 후한 시기의 반고와 당 시기 두우만이 염난수를 언급했지만 대다수 역사서 저술가들은 본류인 염난수보다 지류인 요하를 본류 요하로 인식했습니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대의 요수는 란하`라 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1934 년 제도된 만주국지도에는 요하가 지금의 요하로 표시된 것입니다. <한서/지리지>부터 <청사고/지리지>까지 중국의 25 개 정사에 딸린 지리지 기록 모두나 고대에 제도된 모든 고지도를 훑어도 대요수.요하의 흐르는 모습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그 길이도 겨우 1300 리를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주국지도에 표시된 요하는 지리지 기록의 3 배에 이르는 3300 여리를 흐르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도 아니고 크게 한글 ` ㄱ `자 모습으로 흐릅니다.

 

지금부터 2000 여년을 거슬러 오르면서 전시기에 걸쳐 중국인들은 지금의 요하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왜일까?

서국의 한.진.연.위.수.당.송.요.원.명.청과 동국의 조선.삼국.고려.조선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는 지금의 란하였기 때문입니다. 

 

추정지도 - 기원전 82 년 경 한의 현토.낙랑군 추정지

 

 

추정지도 - 1911 년 조칙까지 기록된 <청사고/지리지>에 설명된 청나라 직예.봉천.길림성 강역

 

주) 1. 직예성의 동쪽 경계는 영평부에 속한 임유현의 산해관이며 북경에서 동쪽으로 650 리였음.

      2. 직예성 승덕부에 열하.평천.건창.적봉.조양현이 속해 있었으며 승덕부와 봉천성 봉천부 사이에 봉천성 금주부가 설치되었음.

      3. 요하는청이 멸망하는 1911 년까지도 봉천성 해룡부에서 발원하여 짧게 서북쪽으로 흘러 길림성 영역을 잠시 지난 후 서남,남쪽으로

          흘러 창도부와 봉천부 해성을 지나 지금의 란하 하류인 바다로 흘러들었으니 서기 83 년경 반고가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

          현에서 주석한 1250 리에 불과하였음.

 

 

왜종일본이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만주철도를 장악한 이후 급속도로 요동.만주 지역을 장악해 나갔고 1932 년에는 꼭두각시국 만주를 세우면서 세계가 저들 것인양 기고만장하여 시건방이 하늘을 찔렀나 봅니다. 결국 저들 마음대로 청 시기의 란하를 지금의 란하로,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하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지금의 요하가 되면 당연히 압록강도 지금의 압록강으로, 백두산 역시 지금의 백두산으로 표시되어야 하고 이뿐만이 아니라 동쪽으로 옮겨야 할 대상이나 적정한 위치 등을 찾는 것이 보통 문제거리가 아닙니다. 아무튼 왜종일본은 무지막지하게 실행하였고 이동사실을 지리지에 연혁.교치 등으로 남겨야 함에도 입을 싹 닦았습니다.

사기꾼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결국 2015 년 지금까지도 한.중.일 삼국은 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이해하고 있으며 반고가 저술한 <한서/지리지> 요동군을 경유하는

1250 리 길이의 그 요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심한 일입니다.

 

중국은 일본.왜종들이 조작한 지도 덕분에 땅을 엄청나게 늘린 셈이고 이렇게 얻은 땅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적석총.옥기 등을 저들의 시원문명 유물이라 강변하며 지금의 백두산.압록강까지를 역사이래 고유의 경계라고 합니다.  이것이 탄로날까봐 최근에도 지금의 집안에서 발견되었다는 마선비 같은 되지도 않은 출토물을 만들어내어 지금의 지명을 고착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왜종일본도 사기.조작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 독도 등 엉뚱한 짓으로 시끄럽게 하여 모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어수룩한 우리 한국사학계는 지 선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아랑곳없이 지 밥벌이만 신경쓰고 있습니다.

정말 빙충이같은 한국역사학계입니다.

 

 

 

출처 : 우리 국사 무엇이 사실인가
글쓴이 : 덕림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