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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백삼/이한백 2015. 4. 14. 13:45

초 중퇴후 110원 들고 상경, 대아그룹 오너 로

매출 1조 넘는 건설그룹 일궈,  2만여명에 장학금

 

 

 

 

추풍낙엽처럼 떨어진 자유선진당의 몰락속에 빛난 인물이있다. 충남 서산·태안의 성완종(61) 당선자다. 성완종 당선자는 여론조사와 방송3사 출구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했고 득표율 42.6%(3만9615표)로 당선됐다.

성 당선자는 어떻게 자유선진당 후보들이 쓰나미처럼 쓸려나가는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성 당선자는 정부투자기관, 지방자치단체, 민간기업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서민주택 3000가구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이 공약이 지역민들에게 먹혔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성 당선자는 건설 CEO(최고경영자)로 유명하다. 경남기업을 거느린 대아그룹 오너다. 대아그룹은 2011년 매출 1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재력(財力)으로 당선됐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서산·태안 사람들은 그의 입지전적 스토리를 안다. 그는 19대 당선자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맨주먹으로 매출 1조5000억원의 대기업을 일으킨 사람 성완종.

그의 경력에는 학력이 없다. 목원대 명예경영학 박사가 전부다. 성 당선자는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정규 학력의 전부다. 왜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했을까. 여기에는 눈물 나는 가족사가 있다.

10대 때 4남매의 가장 역할

그는 1951년 충남 서산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산에서 유통업을 했다. 서산에서 쌀, 보리 등 곡물을 수집해 배에 싣고 인천으로 가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생필품을 도매로 사들여 다시 서산에서 팔았다.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1950~1960년대에 충남 해안가 사람들은 배편으로 인천을 왕래하면서 생업에 종사했다. 인천에 충남이 원적인 사람들이 많이 사는 배경이다.

평탄했던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깨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인천에서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작은 부인을 들인 것이다. 졸지에 4형제는 한 지붕 아래서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처지가 됐다. 그러던 1964년 12월, 차가운 겨울날 4형제와 어머니는 집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었다. 어머니와 4형제는 동네 이웃 사랑방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10여일 지난 어느 날 밤 어머니는 4형제를 깨워 손에 인절미를 쥐여줬다. 그러곤 장남 완종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새 여자가 둘째는 냉대를 안 하니까 거기 맡기고 셋째와 넷째는 소생이 없는 외삼촌에게 맡겨라.”

어머니는 그날 밤 집을 나가 서울에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 이후 완종은 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두 살짜리 막내 동생을 돌보는 일은 완종의 몫이었다. 모유를 먹지 못한 어린 동생은 밤마다 잠을 못 자고 울었고, 그때마다 작은 어머니는 완종을 구박했다. 결국 완종은 어린 동생을 업고 걸어서 서산에서 70리 떨어진 해미의 외삼촌 집으로 갔다. 외삼촌 내외에게 막내 동생을 맡긴 완종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완종은 학교를 갔다오면 작은 어머니 가게를 돕기 위해 꼭 땔감을 해왔다.

그렇게 1년여가 흘렀다. 어린 완종은 생모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완종은 외삼촌 집에서 서울에 기거하는 어머니 주소를 알아내 무작정 상경했다. 완종의 호주머니에는 외삼촌에게서 받은 110원이 들어 있었다. 영등포역에서 내린 완종은 이삿짐 센터를 찾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주소를 들이밀었다. 그 집에서 아침까지 얻어먹고 완종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거둘 형편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완종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완종은 어머니가 사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잠자리를 얻었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낮에는 광생약국에서 ‘약 배달 소년’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밤에는 교회 부설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완종은 신문 배달과 약 배달로 버는 돈을 꼬박꼬박 고향의 외삼촌에게 보냈다. 외삼촌은 이 돈으로 장리쌀을 놓아 알뜰살뜰 늘려 7년 만에 해미에 집 한 칸과 전답 3000평을 마련했다. 잠잘 곳과 농사 지을 땅이 생기자 어머니와 4형제는 눈물의 재상봉을 했다.

공사판·배달… 안 해본 일 없어

완종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생계는 물론 동생들 학비를 책임져야 했다. 완종은 돈을 벌기 위해 공사판이란 공사판은 다 다녔다. 이때 완종은 화물운송 중개업에 눈을 떴다. 아는 사람이 화물차 2대를 가지고 성신화물 해미영업소를 차렸다. 이 사람은 화물을 확보해 온양까지 운송해주고 대당 1000원씩 소개료를 받았다. 완종은 1974년 해미영업소 직원 신분으로 화물차를 운전했다. 들소처럼 일하며 생활비를 제외하곤 악착같이 저축했다. 이렇게 지독하게 일한 끝에 완종은 90여만원의 목돈을 만질 수 있게 됐다. 이 돈을 종잣돈으로 삼아 할부로 화물차 1대를 구입했다. 3년여 공사자재·채소·곡물 등을 운반하며 착실하게 재산을 늘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화물을 싣고 밤길을 달리다 사고를 당한다. 이후 목숨을 담보로 한 화물 운송에 대한 미련을 접는다.

1977년 완종은 자신을 친아들처럼 대해주던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건설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건설업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지만 젊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서산토건 대주주가 농협조합장에 당선되면서 200만원의 소유 지분을 완종에게 넘겼다. 이게 건설업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서산토건을 탄탄한 기업으로 키워나갔다. 서산토건은 이어 대아건설을 인수했다. 그리고 2003년 대아건설은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이로써 대아그룹은 매출 1조2000억원대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경남기업은 대아그룹의 주력 기업이 됐다. 이때부터 그는 베트남 등 해외시장을 공격적으로 개척했다. 2008년 대아그룹은 1조500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그는 기업가로 성공한 뒤 베푸는 삶을 살아왔다. 1991년 그는 34억원을 출연해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알기에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을 돕고 싶었다. 현재까지 2만15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성완종 당선자는 2001년 충청포럼을 설립했다. 충청포럼을 통해 각계에 진출해 있는 충청지역 인사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왔다. 충청 출신 인사들은 그로부터 직·간접으로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사회로부터 얻은 부와 명예는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철학을 이미 마흔 살 때부터 실천해왔다.

윤창중 ‘윤창중칼럼세상’ 대표는 성완종의 입지전적 성공을 주목해온 사람 중 한 명이다. 윤 대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인간이 성공을 하게 되면 혹독했던 시절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이나 불행한 상황에 소홀하기 쉽다. 하지만 성 회장은 남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일처럼 인식한다. 그는 놀라운 인간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성우종 도원E&C 대표가 성 당선자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성우종대표는 경남기업에서 30년을일한 뒤 독립했다. 성당선자는 국회의원 후보등록시 재산을 134억원으로 신고했다.부인 동영숙씨와의 사이에 두아들이 있다. 그는 2007년 자서전 ‘새벽빛’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삶을 털어놓았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은 나의 스승이요, 근면은 나의 재산이다. 가난하면 저절로 간절함이 생기고 저절로 부지런해지는 법. 나도 우리 가족이 부유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돈 없는 서러움을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성완종 사건으로 인해서 정치판은 살얼음을 걷는 기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국민들은 그 살얼음판 위에서 누가 먼저 다치나 지켜보고 있는 분위기 입니다. 지금 미운털 박힌 정치인도 성완종 리스트에 있다고 하니,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요.

그런데 또 반대로 성완종 자살 이유가 모호한 지금, 아무래도 힘있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한명을 희생시킨것이 아니냐는 의문들이 나오고 있고, 만약 그런 1%의 가능성이 사실이라고 친다면, 그정도로 절박했던 상황이었을테니, 성완종 리스트에 누가 있던 오히려 힘있는 자들이 다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으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봤을테니, 왠만한 핵폭탄급 증거 아니고서야. 이런저런 이슈 좀 터뜨리고 하다보면 성완종 자살 사건은 잊혀지겠죠.. 슬픈 현실 입니다.


 


성완종 그는 누구인가, 성완종 학력, 성완종 자살 이유 그리고 성완종 리스트 홍준표

성완종 전 회장은 맨손으로 자수성가해서 일어선 인물 입니다. 그가 걸어온 길 그리고 그가 맨손으로 일구어온 그의 인생을 보면 이렇게 쉽게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것이 주변사람들의 의견인데요.

성완종 회장이 13살이었을때 집을 나왔고, 30대때는 고향으로 가서 기업 인수를 할 정도로 추진력과 의지력이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져있습니다. 70년 초반에, 백만원의 종잣돈으로 화물운송 영업소를 운영했고, 2년뒤에 그간 벌어놓은돈을 합해서 5백만원을 가지고, 서산토건을 인수하면서 건설업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입지전적 인물 성완종,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가 왜이리 허무하게 갔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3년후인 79년에는 충남에서 손꼽히던 대아건설을 인수하면서 가파르게 성장해나갔고, 2004년에 경남기업을 인수했었는데요. 당시에 도급순위가 30위 안에 들정도로 아주 큰 기업이었습니다.

연매출이 2조까지 올라갔으나, 2013년도에 경남기업은 3차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3차까지 가게 됐다는 것은 1차, 2차에서 채권자들에 그래도 기회를 줬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만큼 성완종 회장의 수완과 능력이 믿을만 했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궁금해하시는 성완종 학력, 정주영 회장과 비교되는 성완종

성완종이 10대 초반에 집을 나와서 독립했기 때문에 ‘성완종 학력’에 대한 호기심이 많이들 생기시나 봅니다. 13살때 집을 나간 이유는 ‘계모의 폭력’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친모와 동생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상경한 상태였는데, 그런 엄마와 동생을 찾고 자신도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나가게 된 것이지요.

성완종 학력은 부성국민학교(지금은 부성초등학교) 중퇴 입니다.

학력은 보잘것 없지만 그런 그가 어린 나이에 남의집 헛간에서 잠을 자면서, 폐지를 줍고 신문배달에 막노동까지 해가면서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자신의 ‘친모’를 데리고 가출한지 19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수성가한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 성완종 자살 이유 더 궁금해진다.

CCTV를 봐도, 그가 살아온 인생을 봐도, 그렇게 쉽게 의문을 남긴채로 자살했을거라고 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성완종 전 회장이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힐 정도로 성공을 했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실패했습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당선이 되었으나, 2년후에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국회밥 먹어본 사람이고, 기업생활 오래 했기 때문에 정치인들과 연줄은 상당했었는데요. 그의 돈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것이 분명 하기 때문에 성완종 리스트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성완종 리스트 홍준표 김기춘 허태열 유정복 홍문종 어떻게 할것인가?

지금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사람중에 가장 욕먹는 두사람은 김기춘과 홍준표 일 것 입니다. 김기춘은 현정부의 실세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고, 홍준표는 무상급식 때문에 미운털이 박힐대로 박힌 사람 입니다.

거기다가 돈까지 받아먹었다고 하니, 여론은 수직하강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경남에서는 또 다음 선거에서도 새누리 후보 뽑아줄게 뻔하니, 홍준표에 대한 여론이 식는다 해도 사람만 바뀌겠지만요..

성완종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내려왔으면 좋겠지만, 절대로 그러지 않을것입니다. 힘을 가진자들은 그들이요, 다음 선거때가 되면 또 금방 잊고 하던대로 뽑아줄테니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 이야기 까지 나오고 있는 지금 분위기는 현 정부에 대한 불신도 크다.

성완종 전 회장의 자살이유는,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해서 함께 엮이게 되면서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아직은 정말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 두 가능성 사이에 있는 교집합이라 할 수 있는, 압력에 의한 극단적 선택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성완종 회장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던 2012년 당시에 후훤회장을 맡았던 박성호씨는 성완종 회장의 빈소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모임을 조직해서 박근혜 정부와 이완구 국무총리를 향해서 왜 성완종의 목에 칼을 댔는지 진상을 따지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박성호씨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자신은 "자살하지 않는다"며, "어렵게 자라면서 굶주리고 배우지도 못했지만 2만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줬고, 이번 정권이 탄생하는데 큰 공을 세웠는데, 어찌해서 성완종에게 칼을 겨누었냐"며, "비서실장이 10만달러 받은것 등 진상을 밝힐것"이라고 외치며 자신은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굳은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변인들이 이렇게 나서주는걸 보면, 성완종 회장이 의리가 있었나 봅니다.

(* '서산장학재단'은, 초등학교 5학년이 학력의 전부였던 성완종 전 회장이 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만든것으로, 총 21500여명의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학재단을 아꼈는지, 문제가 터지고 나서 친구와 지인들을 만날때마다, "장학생 아이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무슨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명박때보다 더 답답합니다. 도무지 소통이 되지 않으니..


성완종 리스트 - 김기춘 10만달러(11억에 가까운돈)

성완종 전회장은"난 MB맨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도왔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억울하다 이것이지요.


성완종 리스트 홍준표 1억

이 억울한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 앞으로 계속 정치생활 편하게 잘 할 수 있게 된다면, 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성완종 리스트 허태열 7억

이 와중에 허태열은 박근혜 대통령을 호위하기 위해서 몸을던지는군요. 하긴 이때가 기회죠. 돈에 대해서 결백하다며, 호주머니를 털어서 캠프 운영했다고 합니다. 저런 기사를 보고 믿는 사람도 있을까요?

정수장학회 부터 시작해서 박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거란 말입니까?


성완종 리스트 메모 어디갔나?

성완종 유서 왜 이것만 검찰이 가져갔나요?

유족디 메모를 돌려달라고 해도 검사가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드라마 '펀치'가 생각나는군요.


성완종 측에서 유가족의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고있고, 복사나 열람도 못하게 한다고 하네요.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의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