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절대 권력 조선임금들도 인사권 함부로 못 휘둘러

백삼/이한백 2015. 1. 6. 15:50

연말 또는 연초 개각설이 또다시 정치권에서 회자된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면, 그를 누가 추천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거꾸로 가는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영의정 격인 국무총리까지도 누가 추천했고 어떤 경로로 선정되었는지를 전혀 모른다. '밀실 인사' '깜깜이 인사'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지만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이는 조선의 인사제도에 비하면 원시인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조 51년(1775년) 11월20일, 만 81세의 영조는 드디어 세손(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세손이 세 가지 사항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어린아이가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 남인(南人)을 알겠는가, 소북(少北)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겠는가?"(<영조실록> 51년 11월20일)

↑영조 시대 당파 싸움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룬 SBS 드라마 <비밀의 문>의 한 장면.

3명의 후보 가운데 임명해야

당시 세손 이산은 24세였다. 15세면 병역 의무를 부여하던 조선시대에 '어린아이'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의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일 수 있었다. 영조는 국왕이 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항 3가지를 물은 것인데, 첫 번째는 '노론·소론·남인·북인'이란 당파의 구조를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조정 일과 나랏일을 아는가를 물었다. 주목되는 것은 세 번째다. 영조가 차기 국왕의 조건으로 꼽은 것이 병조판서와 이조판서의 적임자를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왜 영의정·좌의정·우의정도 아닌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꼽은 것일까.

병조판서에겐 무신의 인사권, 이조판서에겐 문관의 인사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인사가 국사에 가장 중요하다는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사상의 반영이었다.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을 주망(注望) 또는 의망(擬望)이라고 하는데, '주의(注擬)와 삼망(三望)'의 줄임말이다. 주의는 후보자를 물색하는 것이고 삼망은 세 사람의 후보를 올리는 것이다. '바랄 망(望)'자를 쓰는 이유는 '여러 사람이 바라는 물망(物望)'을 살펴서 천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만 올리는 것을 단망(單望)이라고 하는데, 단망에도 기준이 있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 '교민지법(敎民之法)'에서 "무릇 향·수관원(鄕遂官員·지방 고을 관원)은 모두 호조판서가 천거해서 제수하는데, 단망한다"라고 말했다. 지방 관원을 임명할 때는 단망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시대인 세종 20년(1438년) 6월 "이제부터 수령을 제수할 때 전함(前銜·전직 관료)이면 3인을 망(望)에 올리라"고 명한 것처럼 지방 수령관은 원래 세 사람 중에서 뽑았다. 삼망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고 순서가 있었다. 세 명을 '수(首)·부(副)·말(末)'로 구분해 순서를 두었는데, '1순위·2순위·3순위'라는 뜻이다. 3명 중에서 2명은 이전에도 그 자리의 물망에 올랐던 인물을 주의하고, 한 명 정도는 물망 경험이 없는 신참을 주의하는데, 이 신참을 신통(新通)이라고 했다. 임금이 가끔 '수(首)·부(副)'를 제치고 주로 말(末)에 천거되는 신통을 발탁하는 깜짝 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노론 청명당' 사건으로 영조 분노

이처럼 조선 임금의 인사권은 세 명의 후보자 중에 점을 찍는 추필(抽筆)인데, 이것이 바로 낙점(落點)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들어 당파 간 경쟁이 극도로 치열해졌다. 특정 당파의 권력 독점을 막는 장치인 탕평책을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탕평책은 간단하게 말해 각 당파를 고루 등용함으로써 격렬한 당쟁을 완화시키고 체제 내에서 정책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영조 때의 탕평은 남인과 북인은 거의 배제하고, 노론과 소론만 정권에 참여시키는 제한된 탕평이었다. 그마저도 영조는 자신을 지지하는 당파인 노론은 온건·강경파 할 것 없이 모두 등용한 반면, 소론은 영조 자신이 왕세제(王世弟)였던 시절, 목호룡의 옥사 등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자신을 도와주었던 소론 온건파만 등용하는 제한된 탕평책이었다.

영조 때의 탕평책을 호대쌍거(互對雙擧)라고도 한다. 소론 온건파 조현명(趙顯命)의 형 조문명(趙文命)이 영조에게 건의한 인사 원칙으로서, 호대(互對)라고도 부른다. 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을 등용하는 식의 인사 방식으로 각 부서 내에서도 두 당파가 균형을 이루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호대쌍거의 전제는 삼망(三望)에서부터 균형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3명을 주의할 때부터 각 당파 사람을 고루 천거해야 호대쌍거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재위 31년(1755년) 나주벽서 사건을 계기로 소론 온건파마저 조정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탕평책이 붕괴되면서 이후 정국은 노론 일당 독재로 흘러갔다. 나아가 영조는 재위 38년(1762년) 노론과 손잡고 소론을 지지하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이후 탕평책은 완전히 붕괴되고 노론 일당이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소론과 남인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보니 집권 세력인 노론 내부에서조차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정파가 나뉘는데, 청명당(淸名黨)도 그중 하나였다.

영조 48년(1772년) 3월 성균관 대사성 자리에 주의된 3명의 후보가 문제가 된 사건이 이른바 '노론 청명당' 사건이다. 이조판서 정존겸(鄭存謙)과 이조참의 이명식(李命植)이 3명의 후보를 주의했는데, 조정(趙晸)·김종수(金鍾秀)·서명천(徐命天)이 모두 청명당 소속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3명 중 한 명만 1위 후보자인 일망(一望), 즉 수(首)로 올려야 하는데 3명 다 일망이었다. 게다가 3명 모두 처음 주의된 신통이었다. 이는 3명 중 한 명에 낙점하는 정도가 전부였던 임금의 인사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다시 말해 성균관 대사성에 대한 인사권을 임금이 아니라 노론 청명당수가 갖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노론 청명당은 다른 모든 당파를 배척하는 당파로서 탕평책 자체를 반대했다.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 후에 일기 시작한 세자에 대한 동정론까지 비판하는 벽파 계열로서 사회의 모든 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수구에 가까운 정파였다. 세상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이런 자세를 청명으로 자칭한 명칭이었다. 영조는 이에 분노해 정존겸을 회양(淮陽), 이조참의 이명식을 장연(長淵)에 유배 보내고, 청명당 당수이자 전 영의정이었던 김치인(金致仁)을 해남(海南)으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로써 청명당은 붕괴되었지만 이는 영조의 자업자득이었다. 겉으로는 탕평을 내세웠으면서도 속으로는 그 자신이 편당심(偏黨心)을 버리지 못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노론만을 중용했다. 끝내는 소론을 지지하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까지 뒤주에 넣어 죽이면서 노론의 절대 권력을 제어할 상대 세력을 말살했기 때문이었다. 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의 탕평심인데 영조에게는 이것이 부족했던 것이다.

↑10월2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인사 난맥상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삼망 폐단 견제책으로 '중비' 제도 둬

인사에 국왕의 사심(私心)이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삼망이지만 국왕도 적극적인 인사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었다. 이때 사용할 수 있는 제도가 가망(加望)과 중비(中批)였다. 삼망 중에 임금이 원하는 인물이 없을 경우 임금이 직접 추천해 삼망에 넣는 것이 가망이었다. 숙종은 즉위년(1674년) 9월 승지로 쓰고 싶었던 외척 김석주(金錫胄)가 삼망에 들지 못하자 "선조(先朝·현종)의 유지(遺旨)가 있었다"고 변명하면서 가망을 사용했다. 이렇게 승지가 된 김석주는 숙종 6년(1680년) 남인 허새·허영 등을 역모로 모는 정치공작을 자행해 이에 반발한 젊은 서인들이 소론으로 분당하기도 했다.

삼망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임금이 이조·병조의 전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임명하는 것이 중비인데, 특배(特拜) 또는 첨서낙점(添書落點)이라고도 한다. 임금이 직접 후보자의 이름을 써서 임명하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숙종이 우의정 후보를 여러 번 퇴짜 놓은 끝에 조사석을 임명한 것이 특배를 악용한 사례라면, 정조가 재위 12년(1788년) 지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 임명한 것은 선용의 사례다. 정조는 우의정으로 임명하는 어필을 용정(龍亭·나라의 보배를 싣는 가마)에 싣고 북 치고 피리 부는 무리를 앞세워 채제공의 집에 보내게 했는데, 남인 정승 출현에 노론이 장악한 승정원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특배로 정승이 된 채제공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정조 15년(1791년) 권력과 결탁한 관상(官商)들의 배타적 상행위 독점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하고, 사상(私商)들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용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해 조선의 상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비단 현 정권뿐만 아니라 지난 여러 정권에서 인사 문제는 '회전문 인사' '측근 인사' '깜깜이 인사' 등의 비난을 받아왔다. 무명을 발탁하는 것도, 능력은 있지만 줄이 없어서 적체된 인사들이 아니라, 정권에 줄 대는 것이 유일한 능력인 인물들만 골라서 발탁하니 고위 공직 자체가 희화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하자가 없으면 고위 공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이니 공직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짐작이 간다. 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할 능력이 없으면 조선처럼 시스템에 의지한 인사를 하는 것이 그나마 나라의 체면을 조금은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