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반도 진출을 역사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주일 러시아공사 로젠의 보고가 상징하듯이(‘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 1891~1907’ 33쪽·최덕규), 일본은 수십 년에 걸쳐 집요하게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립해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나아가 이른바 ‘만몽(滿蒙)’ 분쟁까지도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지배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57~63쪽·야마무로 신이치)
이처럼 일본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한반도 주민들은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 전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전국의 의병이 13도 창의군(倡義軍)이라는 연합군을 이루어 한양을 공격한 1908년의 ‘서울 진공작전’이었다. 이해에는 국내에서 교육활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던 안중근이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연해주로 망명, 의병군을 이끌고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서울 진공작전’을 비판하며 백두산 지역에서 지구전을 펼칠 것을 주장한 유인석 등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최재형(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의 지원을 받아 13도 의군(十三道義軍)을 구성했다. 함경도의 노비 출신이었던 최재형은 러시아령 연해주로 넘어가 쌓은 막대한 재산을 독립 전쟁에 쏟아부었으며, 끝내 연해주를 침입한 일본군에 살해되었다. 이처럼 만주와 연해주(외만주)는 한반도 내에서 독립 전쟁을 전개하기 어려워진 한국인들의 새로운 저항 거점이 되었으며, 만주·연해주를 거점 삼아 한반도를 공격하는 전략은 김구의 ‘만주계획’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만주계획이란 1947년 말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 김구를 비롯한 이청천, 이범석 등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을 무력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전에서 장제스 군대와 동맹해 한·중(韓中)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계획은 한국·중국·미국·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반공군사동맹체제의 수립을 지향하였으며, 이를 통해 동부 유라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셴양(瀋陽)에서는 1947년 4월 27일에 장연지구 민주자위군(長延地區民主自衛軍)이라는 한인반공부대가 구성되었다. 광복군과 조선혁명군 출신 간부를 중심으로 한 이 부대는 비록 1948년 11월에 해산되어 1년여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이 부대를 통해 38선 남북의 분단 상황을 공세적으로 해소하고자 한 만주계획은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시야에 넣고 국가 전략을 구상하던 20세기 전기 독립 전쟁의 흐름을 잇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기 남한의 민족주의 계열 정치가들은 점차 현실화되던 한반도의 분단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승만은 20세기 후기에 현실화될 냉전 질서를 한반도 주민들이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반면, 김구는 만주계획을 포기하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과 협상하여 분단 상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정병준은 김구가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북한을 적대시하다가 1948년 시점에 분단을 막고자 민족 협력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 일부 추종세력에 충격을 주어, 결국 우파 암살단체인 백의사에 소속한 안두희의 김구 암살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정병준)
이처럼 일본이 한반도의 독립국을 멸망시키자, 한반도 주민은 만주와 연해주(외만주), 그리고 의도치 않았지만 중앙아시아까지 그 거주 영역을 넓혔다. 이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라는 역사적 흐름이 끊기면서 한반도 주민의 활동 영역에서 배제되어 온 만주 지역에, 거의 천 년 만에 한반도 주민이 다시 대규모로 거주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서기 918년에 왕건이 새 왕조의 이름을 ‘고려’로 삼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을 보이고 발해의 이민자들을 수용한 이래, 고려는 성종 때 서희가 강동6주를 차지하여 고려의 국경을 압록강 근처까지 올리고, 예종 때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에 아홉 성을 쌓는 등 북진(北進) 의지를 분명히 했다. 조선 역시 북진정책에서는 고려를 계승하여, 세종 때에는 김종서 등이 압록강 쪽의 4군과 두만강 쪽의 6진을 확보했으며 이 정복 전쟁에 참가한 바 있는 이징옥은 반란을 일으켜 여진인의 황제가 되고자 하기도 했다.(‘대금황제’) 고종 때에는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반도 주민의 수가 늘어나자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 확보하고자 안변부사 이중하 등이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동진(東進)이나 미국의 서부 정복이 양국 주민의 정신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천여 년에 걸친 북진의 역사도 한반도 주민들에게 ‘프런티어 정신’을 길러주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 20세기 전기에 만주·연해주 지역에서는 한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국을 수립하고자 시도했다. 1917년의 ‘고구려국’ 구상, 1930년대의 ‘단자유국(檀自由國)’ 구상 및 이광수의 ‘고려공국(korean principality)’ 구상 등이 그러하다.(‘간도 문제의 시대적 변화상, 17~21세기’ 311쪽·박선영, ‘이광수 연구의 새 자료와 과제’·최종고) 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전쟁 중이던 이회영은 1918년에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국내에 잠입한 바 있고,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은 상하이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해 1919년에 만주로 넘어갔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연해주에서 독립 전쟁을 수행하던 김경천은 연해주·만주·한반도를 중심으로 ‘부여민족’이 동부 시베리아 전체에 퍼져 있음을 지도로 나타내며, “4000년 전부터 만주 및 부여반도에서 웅비하고 또 흩어지던 우리 민족은 지금 이 같은 발전력으로 아시아 전역에 산재하지 아니한 곳이 없도록 분산되었”으니 “그 열매는 언제 열릴까!”라고 한탄한 바 있다.(‘경천아일록’ 187~188쪽) 이처럼 20세기 전기는 한반도 주민이 독립을 상실한 시기임과 동시에 만주 지역을 자신들의 역사적 공간으로서 인식한 시기였으며, 그 여파는 21세기까지 한반도의 남과 북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편, 한반도를 정복한 일본은 한반도 주민들의 이러한 상상력을 역으로 이용하여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려 하였다. 아무르강(흑룡강)까지 일본의 영향권에 둔다는 취지로 결성된 일본의 우익 조직 흑룡회(黑龍會) 소속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일본의 조선 병합을 주장하던 일진회를 이용하여 대아시아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나의) 계획은 미리 이용구·송병준과 숙의한 결과, 일·한합방 이후에는 일진회 백만의 대중을 거느려 만주로 이주시켜 지나혁명의 기회에 타서 만주와 몽고를 독립시키고, 일·한연방에 따라 만몽연방국을 만들려고 했다.”(‘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과 대아시아주의’ 364쪽·강창일) 또한 아시아주의자 스에나가 마사오(末永節)는 1920년대에 일부 한국인을 포섭하여 ‘대고려국’을 구상하고자 했다. 스에나가는 대고려국이 “고구려와 부여족이 획득한 최대의 영역, (중략) 즉 산해관 이북과 장가구 이동의 직예성과 내몽고와 성경성과 길림성과 러령, 나아가 중국 영내의 흑룡강성과 연해주와 캄차카 전부”를 영토로 하며 그 수도는 “간도의 용정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고려국을 건국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인의 일부가 조선의 독립을 외치고 자주 음모를 꾀하고 있다. 또한 불령선인은 독립을 핑계삼아 약탈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럴 때 옛날의 대고려국을 부흥하여, 한편으로 조선인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가지고 러시아 및 지나에 대한 완충국으로 하려는 계획”(‘1920년대 만주에서의 대고려국 건국 구상’·삿사 미쓰아키)이었다. 나아가 1943년에는 ‘중앙계획소안(中央計劃素案)’이라는 국토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일본의 수도를 오늘날의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부지로 옮기고 한반도의 한국인을 만주로 이주시킨다는 구상이 논의되기도 했다.(‘국토연구원 소장 희귀자료 및 진서 해설’ 35쪽·김의원)
이처럼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는 비한족(非漢族) 주민을 이용하여 중국 및 러시아와의 완충국을 만든다는 일본 측의 구상은 1932년의 만주국 건국으로 실현되었다. 한편으로 1917년 10월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권과 구세력 간의 충돌로 혼란에 빠져 있던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 등 연합군의 힘을 빌려 전 러시아 임시정부(Временное Всероссийск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를 비롯한 백계(白系) 정부가 여럿 수립되었다. 이에 혁명 정부는 소비에트 계열의 극동공화국(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Республика)을 수립하여, 철군을 거부하고 시베리아에 주둔하던 일본군과의 완충지대로 삼았다. 이때 연해주의 한인 독립군은 볼셰비키와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일본군에 맞섰다. 동부 시베리아에 잠시 등장했던 이들 임시정부와 국가들은 일본군이 철수하자 모두 소멸했다.(‘볼셰비키 혁명사’ 383~396쪽·E. H. 카)
한편, 일본은 자국이 지원하던 장쭤린(張作霖)의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1928년에 이를 암살하고,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을 부추겨 1931년 7월에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일으키는 등 이른바 만몽(滿蒙) 지역에 서서히 자국 세력을 침투시켰다. 그리고 1931년 9월 18일에는 랴오둥반도 남단의 일본령 관동주(關東州) 및 일본의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 부속지역의 보호를 애초의 목적으로 하고 있던 관동군이 만철 철로의 일부를 스스로 폭파하고는 그 책임을 중국 측에 돌리며 만주 전체를 점령하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은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 머물고 있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Aisin Gioro Puyi)를 옹립하여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수립한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는 일본 측에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일체의 대응을 피했고, 소련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중이어서 중립불간섭을 선언했으며, 미국과 영국은 대공황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66~83쪽) 이처럼 동북부 유라시아 지역을 개념도 불분명한 ‘만몽’이라는 단어로 지칭한 일본은(‘滿州事變から日中戰爭へ’ 19~28쪽·加藤陽子), 이 지역의 핵심 인종이 한족이 아닌 일본인과 상통하는 만주인·몽골인이기 때문에 일본이 정복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77쪽) 이러한 주장은 현대 한국의 일부 근본주의 민족주의자들에게서도 확인된다.
청나라를 건국한 핵심 세력인 만주인의 독립국 수립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인종적으로 한족이 우세를 보이던 내만주 지역에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뒤이어 내몽골 지역을 중국에서 떼어내려 했다.
1911년 8월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소멸하자, 만주인과 함께 청나라를 지탱하던 양대 축이던 몽골인은 한족 중심의 중화민국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오늘날의 몽골국에 해당하는 외몽골 지역의 몽골인은, 한족 주민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내몽골 지역과 함께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외몽골만으로 1911년 9월에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자치주를 이루었다. 1915년에 러시아제국과 캬흐타조약(Treaty of Kyakhta)을 맺어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 바 있는 중국은, 소비에트 10월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제국이 소멸하자 1919년에 외몽골의 자치권을 폐지했다. 그러나 1920년에 반혁명 세력인 로만 운게른(Рома н Фёдоровичу нгерн)이 백군을 이끌고 외몽골로 들어와 중국군을 몰아내고 몽골 정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담딘 수흐바타르(Дамдин СУ хбаатар)의 몽골인민당은 소련 적군 및 극동공화국 군대와 연합하여 1921년에 백군을 축출하고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이처럼 외몽골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면, 내몽골 지역의 몽골인은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다. 신해혁명 이후 외몽골이 러시아의 힘을 빌려 독립을 선언하자, 마적(馬賊) 바부쟈브(Бавуужав)를 비롯한 내몽골 주민들도 외몽골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5년의 캬흐타조약이 외몽골의 독립만을 인정하자, 바부쟈브는 만주족의 독립을 꾀하던 청나라 황족 아이신 기오로 샨치(Aisin Gioro Shanqi) 숙친왕(肅親王) 및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자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 등과 연합하여 내몽골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바부쟈브는 1916년에 장쭤린 군에게 살해되었으나, 그 후에도 일본의 힘을 빌린 내몽골 독립운동은 계속되어, 1937년에는 뎀치그돈로브(Дэмчигдонров) 덕왕(德王)의 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合自治政府)가 수립되었다. 덕왕은 1274년과 1281년의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침공했다가 전사한 몽골·고려 연합군의 시신을 묻은 ‘몽고총(蒙古塚)’을 참배하고 몽골의 침략을 사과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내몽골 독립운동가 바부쟈브를 죽인 장쭤린이 덕왕과 마찬가지로 몽고총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얄궂은 역사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만몽 지역을 중국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하여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935년 이후 익동방공자치위원회(冀東防共自治政府), 중화민국 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 난징 중국정부(南京國民政府) 등의 괴뢰 국가를 차례로 수립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1883~1886년 사이에 러시아와 청나라의 경계 지역에 잠시 존재했던 ‘아무르의 캘리포니아’ 또는 ‘젤투가공화국(Желтугин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라는 기이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아무르강에서 황금이 발견된 뒤 이 지역에 모인 금 사냥꾼들은 넘치는 황금을 바탕으로 금본위제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여러 국적의 주민들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는 등 국가 수립의 과정을 밟아 갔으나, 러시아와 청나라의 견제를 받아 4년 만에 멸망했다.(‘시베리아 속의 숨겨진 공화국, 아무르의 캘리포니아’·강인욱) 동북부 유라시아 지역에서 조선·중국·러시아 등의 중앙집권 국가가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만주와 연해주(외만주)는 이들 국가들의 접경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기에 걸친 혼란의 시기에 이 지역에서는 여러 집단이 국가 수립을 꿈꾸었다.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을 뿐인 젤투가공화국은 ‘건국의 요람’으로서의 이 지역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한국인’들은 천여 년 전의 연고권에 바탕하여 ‘수복’을 꿈꾸었고, 몽골인은 칭기즈칸의 옛 영화를 조금이나마 되찾고자 하였고, 일본인은 만주족의 이름을 빌려 동북 지역을 중국에서 떼어내려 했고, 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연해주와 만주는 한국인에게만 건국의 권리가 부여된 땅이 아니었으며, 이곳에 국가를 만들고자 한 것 역시 한국인뿐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건국의 요람이었으나, 이들 가운데 건국의 꿈을 이룬 것은 소련의 힘을 빌린 일부 몽골인들뿐이었다.
끝으로, 이번 회의 집필에 도움을 주신 교토대 김현경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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