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길, 승리의 왕도(王道) 지킨 장수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한 야망과 광기(狂氣), 일본 내전이 만들어낸 침략전쟁이다. 게다가 이 전쟁은 세계사를 바꿀 수 있었던 국제전쟁이기도 했다.
자나깨나 간절히
이순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쓴 출전 계획 보고서에서 그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몹시 원통해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다(憤膽如裂 분담여열)”고 하면서,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수치를 씻겠다(竭心力 擬雪國家之恥 탄갈심력 의설국가지치)”라고 했다.
조정에서 내려온 경상도 출전명령서를 읽고 쓴 장계에서는 “분노가 가슴에 서리고 쓰라림이 뼈에 사무쳤다(怒膽輪 痛入骨髓 노담윤균 통입골수”고 하면서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찔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는 마음이 자나 깨나 간절합니다(一犯賊窟 忘身效力之衷 寤寐益切 일범적굴 망신효력지충 오매익절)”라고 복수심을 천명했다.
또한 일본군이 서울까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했다(不堪垂淚 撫劍嗟 불감수루 무검돌차)”고 하면서 “원하옵건대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바로 호랑이 굴을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해 나라의 수치를 만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합니다(願以一死爲期 直虎穴 掃盡妖 欲雪國恥之萬一 원이일사위기 직도호혈 소진요분 욕설국치지만일)”라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굳게 결심한 뒤 이순신은 출전했고, 승리했다. 승전보고서를 쓰면서 그는 서울까지 점령되고, 임금이 피난갔다는 소식에 대해 “오내(五內, 오장)가 찢어지는 듯 했다(五內焚裂 오내분열)”고 가슴 아파했다.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난 후 매일매일 자신의 간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고, 분노가 응어리져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티끌만 한 공로나마 보답하려고 고심”했으며 심지어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아 있다(心死形存 심사형존)”고 까지 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그런 고통과 슬픔, 분노와 한탄의 세월 동안 언제나 “이를 갈고 마음을 썩였다(切齒腐心 절치부심)”고 했다. 절치부심의 결과는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조선의 백성과 군사들에게는 불패의 신화를 쓰는 리더로 불멸의 존재로 기억되게 했다.
이순신이 쓴 절치부심은 본래 사마천이 쓴 『사기』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진나라의 진시황이 중국의 제후국들을 정복해 통합시켜 갈 때다. 제후국들은 진시황의 침략에 걱정이 태산같았다. 연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태자 단(丹)은 진시황의 야망을 꺾을 해법에 고심했다. 때마침 진나라 장군 번어기(樊於期)가 진시황에게 죄를 짓고 수배되면서 연나라로 도망쳐 왔다. 진시황을 두려워했던 연나라의 신하들은 번어기의 망명요청을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태자 단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여 연나라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진나라는 두려운 상대였다. 번어기를 받아들였기에 더더욱 전전긍긍해야 했다. 태자는 진시황의 야망을 설득해 정복전쟁을 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묘책이 없었다. 그 때 그에게 위(衛)나라 사람인 형가(荊軻)가 찾아오면서 비책을 생각해냈다. 태자는 형가에게 자객을 이용해 진시황을 협박해 진시황 스스로 정복 이전 상태로 진시황이 정복한 제후국을 돌려주게 만들고, 진시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객으로 하여금 진시황을 죽이자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형가는 태자의 계획에 찬성하며, 그 자객의 역할을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복과정에서 많은 원한을 쌓은 진시황은 철저하게 자신의 신변을 지켰다. 때문에 진시황의 신뢰를 얻지 않으면 접근이 불가능했다. 진시황의 신임을 얻기 위해 고심하던 형가는 진시황의 분노를 산 번어기를 생각해 냈다. 그는 태자에게 번어기의 머리를 요구했다. 번어기를 머리를 가져가 진시황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태자는 진시황을 피해 귀순한 번어기를 죽일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형가는 번어기를 직접 만나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그때 번어기가 말했다.』
“그것은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마음을 썩이고 벼르는 것이었소(切齒腐心 절치부심).”
그 직후 번어기는 진시황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형가가 택한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형가는 번어기의 머리를 갖고 진시황을 찾아갔다. 그러나 진시황을 협박해 제후국을 되돌리지도, 죽이는 것 모두 실패했다.
예측되지 않는 재앙을 이기는 법
번어기가 ‘절치부심’을 이야기한 뒤로 ‘절치부심’은 이순신이 말한 것처럼 ‘몹시 분노해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며 마음을 썩이는 것’을 뜻하며 고사성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나라의 울타리를 침략자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 그는 처음 무과에 급제한 이후부터 언제나 불의에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을 대비해 절치부심하며 살았다. 또 북방에서 호시탐탐 침입해오는 여진족과 전투했고, 임진왜란 전에는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 거북선을 건조하고, 무기를 점검했다. 전쟁이 일어난 뒤에도 항상 스스로 “창으로 베개를 베고 잠을 잘”만큼 스스로 솔선수범했고, 부하 장수와 군사들에게 엄명했다. 이순신의 불패의 승리는 결국 그의 절치부심의 자세와 노력때문이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절치부심하지 않는다면 패배자로 영원히 추락할 뿐이다. 삶이 풍족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도 때때로 패배의 고통, 실패의 아픔을 잊는다면 또다시 절치부심을 할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실패를 했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들은 모두 절치부심했다. 또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도 항상 절치부심의 힘으로 목표에 한 걸음씩 다가갔다. 고난이 힘겨울수록, 고통이 클수록 그 열매는 달다. 절치부심의 힘으로 고난에 맞서라. 그것이 승자의 길이다. 승리의 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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