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복원공사 전말’ 자료 첫공개
196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정부가 주도한 경주 불국사 복원 공사 현장. 한국 건축문화유산의 대명사라는 경주 불국사는 어느 시대 건물일까?
일반인이라면 열에 아홉은 통일신라 건축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불국사의 대웅전·무설전·비로전·관음전 등을 비롯한 주요 전각과 회랑은 고려·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뒤섞은 다포·주심포식 기둥에, 맞배·사모지붕 건축물들이다. 터는 통일신라 것이지만, 건물은 1970~73년 절을 복원할 당시 장인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양식을 짜내어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불국사는 대부분 고증되지 않은 근현대 건축의 산물이다. 그 이면엔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민족 정기 회복을 앞세워 벌인 저돌적인 문화유산 정책의 그늘이 있다.
70년대 불국사 경내를 돌아보는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 서울 한양대 박물관에 차려진 ‘한국건축문화재 복원과 창조의 경계(境界·警戒)’전(새해 2월23일까지)은 70년대 불국사 복원 비사를 통해 당시 권력과 건축문화유산의 미묘한 관계를 전해준다. 1968년 대통령의 경북 순시 당시 청와대가 적극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시작된 불국사 복원공사의 숨은 건축유산 복원의 정치·사회적 의미망이 바로 이 전시가 말하려는 고갱이다.
불국사 복원은 해방 뒤 국가가 주도한 첫 대형 복원사업이었고, 후대 문화재 복원 수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층 1부 전시장엔 이와 관련해 40년 전 복원공사의 기록인 일간·월간 공사일지와 사찰 복원 청사진, 정부 공문서와 여러 전각들 공사장면, 박정희·육영수 대통령 부부의 시찰 장면 등을 담은 낯선 사진들이 모자이크처럼 진열되어 있다. 70년대 복원공사 현장감독이던 유문용씨가 이 대학의 한동수 건축학과 교수에게 일괄 기증해 처음 공개하는 것들이다.
1969년 5월 경주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불국사 복원은 해방 뒤 처음 벌어진 대규모 문화재 복원 사업이었다. 복원 공사 당시 건물 평면도. 가장 궁금한 대목은 왜 건축물 고증이 거의 전무했을까 하는 부분일 것이다. 2층 전시장 한쪽에는 당시 공사책임자였던 김정기·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등과 4월 진행한 구술 간담회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일문일답 패널이 붙어 있다. 여러 차례 고증·설계 관련 회의를 열었으나, 터 외에는 신라 건축양식을 확인할 근거 자료가 전무했으며, 결국 기존 사찰의 경관 등을 고려해 고려 중기부터 조선 중기 양식까지 건축양식을 뒤섞을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들이 보인다. 당시 기술력이나 학계의 연구수준 등을 고려하면 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가공의 건축물을 당시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통일신라 건축물처럼 포장했다는 후대 학계의 비판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만약 다시 짓는다면 부재·설계 등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란 김정기 전 소장의 회고에는 자괴감이 비친다. 청운교·백운교 앞마당에 있었던 신라의 옛 연못 구품연지가 당시 공사 전 발굴에서 확인됐지만, 수학여행단 등 관객들 동선을 방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묻어버렸다는 관계자들의 회고 또한 그러하다. 삼성·현대 등 대기업 사주들을 불러 시주금 형식으로 거액을 강제로 거둔 뒤 공사 비용으로 충당한 것을 보여주는 시주금 목록과 기업 사주 설명회 공문 등에서는 당시 정치권력이 불국사 복원에 끼친 입김 또한 짐작하게 된다. 현재의 불국사 전경 문화재 복원의 사전적 의미는 ‘본디 형상대로 회복하는 것’이지만, 실제 작업 과정은 간단치 않다. 옛 공법, 옛 공구를 고증하면서 할지, 복원의 기준이나 대상은 어떻게 정해야 할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수리(修理), 수복(修復), 이건(移建) 등으로 세분화되는 개념들 또한 창조 또는 훼손이라는 모호한 경계 사이에 놓여 있어서, 건축 장인들은 예단을 경계하며 철학적·미학적 판단을 거듭해야 하는 딜레마를 겪기 십상이다. 전시 2부는 이런 맥락에서 학계에서 논의중인 건축유산 복원의 여러 개념들을 소개하고 수원 화성·행궁,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 수덕사, 숭례문 등의 복원 사례가 남긴 성과와 한계 등을 관련 부재와 패널 설명 등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복원된 건축문화유산들을 소재로 한 엽서, 사진, 안내서, 우표, 기념품 등을 전시한 3부도 건축유산이 관광자원으로 변질되거나 오독되는 사례들을 조명했다. 눈에 쏙쏙 잡히는 전시 구성은 아니지만, 권력과 얽힌 전통 건축 복원의 숨은 논란을 관객 앞에 끌어낸 이번 전시는 국내 고건축사와 대중을 소통시키는 소중한 계기를 만들어냈다. (02)2220-1394~6.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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