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임진왜란, 일본의 운명을 가름짓다

백삼/이한백 2014. 12. 16. 11:04

분로쿠노에키, 전국(戰國)시대의 종말과 에도(江戶)막부의 시작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 건설한 오사카성은 1615년 여름전투에서 함락되며 화재로 소실됐다. 에도바쿠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1620년 재건을 시작해 1629년 완공했다. 개화기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소실된 이후 오사카성공원으로 조성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1592~1598)은 우리나라 역사 뿐 아니라 민중 저변의 의식마저 변화시킨 일대 사건이었다하지만 이 전쟁의 영향을 우리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동맹군으로 참전한 명나라의 운명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마저 큰 물줄기를 돌리게 했다명나라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46년 뒤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며일본도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과 조선원정전쟁의 패배로 이후 15년 여 동안 격랑의 시기를 겪는다.

하지만 가깝고도 먼 나라답게 우리는 임란 후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며 관심도 두지 않는다일본은 임진왜란을 문록의 역(文禄.분로쿠노에키)’이라고 부른다그 패전 이후 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오늘날 일본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이번 호에는 1600년 벌어진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최후의 세키가하라전투(原戰鬪)와 1614년과 1615년 토요토미 가문의 멸망을 가져온 오사카성전투(大坂)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연재순서>

분로쿠노에키(文禄), 전국시대의 종말과 에도(江戶)막부의 시작

()의 쿄토(京都), 박력(迫力넘치는 일본근대사의 주무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유언

동군·서군으로 세키가하라에서 격돌

일본의 각 영지(.쿠니)를 지배하던 다이묘(大名)들이 군사력으로 다른 지역을 집어삼키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종지부를 찍고 전국통일(全國統一)을 달성한 자가 바로 토요토미히데요시였다그가 종전 후 전국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대외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었으며일본에서는 이를 분로쿠노에키라고 부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1597년 정유재란(慶長.게이쵸노에키)을 명령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듬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유력 가신 5명을 불러 5살 난 아들 히데요리(秀賴.1593~1615)를 보필해 달라고 유언했다이 가신에는 이시다미쯔나리(石田三成)뿐 아니라, “새 영지를 돌보기 위해 군사력을 뺄 수 없다는 핑계로 조선침략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도 있었다갖은 수모를 견디고 안으로 실력과 인맥을 쌓은 이에야스는 유력 문신파(文臣派이시다미쯔나리를 숙청하고 어린 히데요리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대권야심을 드러내게 된다

성입구에 있는 히데요시 신사와 그의 동상

 

이에 이시다미쯔나리는 이에야스가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며 친토요토미파를 규합한 서군(西軍)으로 도쿠가와파의 동군(東軍)에 맞서 세키가하라()평원 대회전을 벌인다이것이 토요토미파와 도쿠가와파가 서기 1600년 9월 15일 일본의 패권을 놓고 벌인 세키가하라전투(原戰鬪)로 전국시대 최후의 싸움이었다이날 오전에는 이사다의 서군(친토요토미파)이 약간 우세했지만 전세가 뒤집어져 결국 그날 오후 서군은 동군(도쿠가와파)에 패퇴하고서군의 장수들은 사로잡혀 참수된다.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마침내 통일 일본의 위업을 이루고 1603년 쇼군의 지위에 오른다. 1605년에는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쇼군을 물려주고 자신은 오고쇼(大御所)가 되지만히데요시의 적장자 히데요리가 있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는 여전히 되지 못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 커튼문양은 도쿠가와의 가문(家文.가문상징문양)이다
 

 

오사카의 뜨거운 겨울과 비정한 여름

평화그러나 복수의 씨앗은 그대로

이에야스는 1603년 자신의 손녀인 센히메(千姫.히데타다의 딸)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며 토요토미가()에 대한 적개심이 없다는 점을 만방에 알렸다히데타다의 부인 오에요(江與)가 히데요리의 어머니인 요도기미(淀君)와 자매였기 때문에 히데타다와 히데요시는 동서지간이었으며히데요리는 이에야스의 손녀사위였다하지만 권력욕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법.

1614년 21살이 된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를 칠 궁리만 하던 이에야스가 기회를 만들었다히데요시를 위해 호코지(方廣寺)에 만든 범종에 새겨진 국가안강군신풍락(國家安康君臣豐樂)”이라는 글자가 이에야스(家康)를 저주하고토요토미(豊臣)의 번영을 기원한다고 트집 잡은 것이다이에야스는 1614년 11월 20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히데요리가 유배된 오사카성에 대해 공격을 명령했다오사카성에는 병력이 없었지만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는 막대한 유산을 이용 전국에서 낭인 10만 명을 모집해 대항했다이른바 오사카성 겨울전투다전투가 길어지자 양측은 오사카성의 해자(垓字)를 흙으로 메우는 조건으로 휴전한다

오사카성의 해자와 성벽. 전국시대엔 더 깊고 성벽은 더 높았다

 

이듬해인 1615년 4월부터 도쿠가와군은 15만 명을 동원해서 다시 오사카성을 공략한다이것이 오사카성여름전투다고토모토츠쿠(俊藤基次), 사나다유키무라(真田幸村), 키무라시게나리(木村重成등 주군을 위해 목숨 바친 무사들 덕분에 고전은 했지만도쿠가와군은 마침내 57일 오사카성을 함락했다토요토미의 권세처럼 높고 웅장하던 오사카성은 불에 활활 타올랐으며히데요리와 요도기미에 대한 센히메의 구명(求命)요청은 묵살됐다최후의 연락이 없자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는 불타는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자결하고 말았다히데요리의 아들 쿠니마쓰(國松)는 붙잡혀 처형됐고딸 나아히메(奈阿姬)는 비구니가 돼 목숨은 건졌다이후 잔당에 대한 소탕이 10년 이상 지속되면서 토요토미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이에야스의 에도막부는 안정기에 들어간다

13~4살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초상

 

임진왜란 이후 두 차례의 큰 내전을 겪으며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피를 흘린 끝에 에도바쿠후(江戶幕府)를 출범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후 내치에 힘쓰며조선과의 국교회복에도 심혈을 기울인다그리고 그는 전공에 따라 다이묘들에게 영지를 배분했는데,가장 신뢰하고 공이 큰 다이묘는 에도와 쿄토 가까이에 두고 전공이 적은 다이묘들은 멀리 둬 변란에 대비했다하지만 에도바쿠후의 이런 결정은 260여년 뒤 휘몰아 칠 피바람의 또 다른 씨앗이 된다. ()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내려본 오사카 시가지의 모습


오사카성에서 가장 거대한 성벽바위. 무게만 108톤인 이 바위는 1624년 오카야마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