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고대사회의 유물유적으로 살펴 본 현대사적인 한민족의 세계화

백삼/이한백 2014. 11. 27. 09:49

유물유적으로 살펴 본 현대사적인 한민족의 세계화

환국문명의 신()르네상스 정신문명으로 세계화를 이룩하자

 

 

 

인류문명의 역사는 자고로 흔적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 흔적의 역사는 모든 인류가 만들어놓은 유물유적이라는 역사적인 흔적으로 그대로 남아 자신들의 모습을 현 세상에 들어낸다. 이렇게 유물유적의 흔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역사의 흔적은, 또한 인류가 지구라는 대자연의 강한 영향력을 받으며 만들어왔던 전 역사였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인류는 지구가 형성하는 지질학적인 영향과 그로 인한 기후변화에 따라 자신들의 고된 역사를 만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자연의 강한 환경변화에 맞서 지구촌의 역사를 일구어낸 한민족의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전 인류의 실질적인 역사는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현생인류를 통해서 시작한다.

 

 

 

 

대체로 전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는 4~5만 년 전부터 지구상에 널리 분포되어 후기석기문화를 이루며, 농경이나 목축이라는 생산수단을 발명하여 마침내 인류문명사에 꽃을 피운 오늘날의 현생인류와 같은 유의 인종이다. 이 호모사피엔스는 미토콘드리아 이브와 Y염색체의 아담을 조상으로 하여 15~20만년쯤 전부터 아프리카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은 대체로 7만년 전후라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유라시아대륙으로 진입하여 한반도지역에서 한민족의 장대한 역사를 장식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만 년 전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세계에는 구석기시대를 대체하는 신문명이라는 단어가 처음 인류사에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신문명의 중심이 바로 오늘날의 한반도라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의 신문명을 학문적으로 진단하고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자연적인 조건이나, 그들이 남긴 역사적인 유물유적이나, 아니면 그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사유의 자연사상을 면밀히 검토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과연 한반도는 세계대륙의 중심이며, 세계를 대표할 만한 유물유적과 실질적인 그들의 자연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들은 먼저 지질학적으로 왜 한반도가 세계중심이 되었는지, 그 역사성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 큰 규모의 지진과 활발한 화산활동은 대부분 판의 경계에서 발생하며, 특히 태평양판 주변에서는 가장 활발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또한 판의 이동은 바로 대륙이동설에 이어 발절된 맨틀대류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맨틀이 대류하면서 판이 함께 이동하는 것이다.

 

 

 

지질학적으로 지구상의 대륙은 우리가 느낄 수는 없지만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이는 뜨거운 마그마의 지구 내부가 천천히 이동하는 탓에 겉가죽에 해당되는 지구지표면의 대륙 역시 덩달아 천천히 움직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렇게 지구의 모든 대륙은 서로 만났다 헤어지길 계속해서 반복하는데, 대략 34억 년에 한 번씩 모든 대륙이 이렇게 서로 이어지며 초대륙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대륙의 모습은, 바로 약 3억 년 전에 새롭게 생성된 초대륙 판게아(Pangea)가 갈라지며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한반도 산맥들이 바로 이 초대륙 판게아의 중심 산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2억 년 전 이 중심산맥들이 화산 분출을 시작으로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하여, 지금과 같은 초대륙들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 갈라짐의 시작은 바로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여 형성된다. 또한 이러한 지질학적인 초대륙들의 자연변화는 많은 기후변화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이에 맞서 싸우며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두뇌를 진화적으로 급속하게 활성화시켰을 것이다. 바로 이처럼 백두산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형성했던 그 중심문화가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이해력을 가질 수 있었던 자연적인 초기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유전자 Y염색체로 본 인류의 이동 경로를 통해 대략 7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가 메소포타미아부근에서 이러한 추위에 적응한 후 다시 세 갈래로 나뉘어 진후, 그 중 약 35천 년 전에 이르러 바이칼 호수를 기점으로 하여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의 문화가 바로 한반도에서 형성된 후기 구석기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약 1만 년 전쯤으로 이어지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구석기시대는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서 새로운 간빙기의 신석기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이 신석기시대의 문명이 바로 우리민족의 위대한 환국문명의 시작인 것이며, 또한 그 이전의 문명이 구석기시대의 마고문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1만 년을 전후로 벌어지는 구석기와 신석기 문명의 교체시기에 호모사피엔스로 불리 우는 환족의 유목문화와, 그리고 이미 35천 년 전부터 먼저 한반도 지역에 들어와서 살던 웅족의 정착문화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바로 전 세계적인 초대륙 판게아의 중심 산맥인 백두산에서 이렇게 서로 역사적인 조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석기혁명시대의 환국문명을 이끌어 나간다. 바로 인류문명사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지혜문명의 환국문명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지혜문명은 삶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변모시키는 그 어떤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의 문명은 생활상에 필요한 발견과 발명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이처럼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혁명적인 변화는 바로 지적문명의 급격한 변화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이제 이 신석기혁명시대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부터 살펴보아야만 한다.

 

전 세계적인 농경문화의 최초발원지 한반도

 

고대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농경문화의 새로운 변화와 형성이다. 이들 농경문화의 형성은 마을 공동체가 빨리 정착되었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이 곡창지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농경문화의 핵심작물재배는 쌀농사이다. 그리고 쌀농사는 밀농사와는 달리 매우 까다롭다는 사실이다. 바로 쌀농사는 기후, 수량 등 천혜의 모든 조건들이 서로 잘 맞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만큼 인간이 살기에 좋고 농경조건에 적합해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살기 좋은 농경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인간의 숙련된 지적지식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자연의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위대한 지적지식의 힘인 것이다.

 

 

 

 

 

그런데 984월 이와 관련된 유물이, 한반도 중부지방의 구석기유적 발굴조사과정에서 수십 개의 볍씨로 발견된다. 바로 그 발견 장소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이다. 이 볍씨는 두께 3.2,가로 20, 세로 10의 토탄층에서 30개의 다른 식물씨앗들과 함께 발굴된다. 또한 이 볍씨들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측정한 결과, 이 소로리 볍씨의 연대가, 바로 15천년 전후라는 사실이 그대로 들어난다. 이는 지난 97년 중국황허(黃河)강변 장시(江西)성에서 발견된 선인동 볍씨(1500)보다 약 4500년 정도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류최초의 농경문화가 우리의 한반도에서 바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약 기원전 95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형성된 농경문화, 약 기원전 6000년경부터 형성된 인도의 농경문화, 약 기원전 5000년경부터 형성된 이집트의 농경문화보다도 매우 앞서는 것이다. 즉 전 세계적인 농경문화의 발원지가 바로 한반도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마을 인근 선사유적지에서 신석기 초기와 중기에 재배된 것으로 보이는 두 팥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 두 팥의 흔적의 크기는 각각 2.22.8. 현재의 팥(4~8)보다는 작은 크기의 팥이다. 이 팥의 흔적을 측정한 결과 그 재배시기가 대략 7314~7189년 전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 발견을 통해 선사시대 팥의 재배화 경향까지 바로 확인된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곡식에서는 조, 기장, 들깨의 눌린 흔적들도 여럿 확인됐다. 이는 신석기인들이 조, 기장 등의 잡곡에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이런 모든 발견들을 통해 인류의 농경문화가 바로 한반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세계최초의 신석기토기혁명을 이뤄낸 한반도

 8천 년 전에 제작된 빗살무늬토기 

 

문명의 힘을 지적지식을 사용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지적지식은 토기사용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세계최초의 토기사용이 한반도라는 것이다. 토기(earthenware, 土器)는 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인간이 흙···공기 등 여러 가지 원료를 섞어 만들어낸 인류역사상 최초의 합성물이다. 즉 이 토기제작은 인간이 흙···공기를 자유로이 다룰 수 있다는 인적지능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인 간돌(마제석기)이 여러 점 출토된다. 이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8500년 전255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바로 전남 장흥군 신북마을의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간돌 7점과 이를 만든 숫돌 2개 등 신석기 유물이 출토 된 것이다. 이 유적의 중심연대는 약 22천 년 전이다. 발굴된 마제석기는 도토리 등을 갈 때 쓰는 갈돌 1, 큰 동물을 자르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 쓴 간돌 자귀 2,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홈석기 5점 등이다. 홈석기는 돌의 위나 아랫부분 또는 테두리 부분이 홈처럼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뭔가를 빻고 곱게 가는 데 쓰인 도구로 추정된다

 

 


 
그간 한반도에서 간돌 유물로 가장 오래된 유적은 12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이었다. 따라서 이보다 1만년이나 앞선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마제기법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사용됐다는 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에 간석기를 만들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이에 대해 세계 고고학계는 1만 년 전 신석기혁명을 통하여 처음 신석기를 쓰게 됐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무려 2만 년 전의 신석기가 발견됨으로 해서 1만 년 전 신석기혁명 이론을 무색케 한다. 자고로 토기의 제작은 인간이 구석기시대에는 사용할 수 없었던 흙···공기를 복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적지식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석기토기혁명은 후기 빗살무늬토기 제작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바로 강원도 양양군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8천 년 전 것으로 이 역시 세계최초의 토기이다. 그리고 이 빗살무늬토기제작 역시 한국에서 시작해서 시베리아,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세계적인 생활사를 변화시킨다.

 

세계최초의 배 제작과 해상교역을 이뤄낸 한반도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우리민족이 이룩한 배 만들기(造船) 역시 세계 최고(最古) 최초라는 사실이다. 2005년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패총의 신석기 유적지에서 8천 년 전 배 2척이 발굴된다. 이는 이집트 쿠푸왕 시대의 배보다 3400년 앞서고, 일본의 이키리키(伊木力) 출토품보다 2000년 이상 앞서는 것이다. 즉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이다. 바로 조선(朝鮮)에서 세계최초의 조선(造船)배가 발견된 것이다. 이 배는 실물 기준으로 볼 때 최대 길이 310, 최대 폭 60, 깊이 약 20정도의 규모로 소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그리고 배의 제작은 불로 나무를 그슬린 뒤 날카로운 석기로 제작했으며, 또한 어로용, 이동용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는 과거 신석기인들의 어로 활동 등 생활상과, 목선을 만들 정도로 뛰어났던 당시 사람들의 기술력 등을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된다.

 

 

8,0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 사진 아랫쪽이 선미, 위쪽이 선수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20105월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일원 도시계획도로부지에 포함된 조기 신석기 유적 출토 유물을 정리하고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목재 유물 중에서 8천 년 전 신석기시대의 목제선박조각과 노()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고래잡이 역시 세계 최초로 우리 한민족이 시작했음이 8000년 전 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서 한국이 고래잡이 최초란 사실을 들어난다.

 

  

8000년 전 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세계최초의 고래잡이 

 

 

우리들은 고대사회의 수상교통문화를 살펴보는 데에 있어서 선박의 자료 또는 유물, 기록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이를 추적하기에 매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선박을 이용해 일찍부터 행상교류가 있었던 중국과 일본을 연관해 살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고조선은 중국과 인접해 초기부터 서로 수상교역을 했고, 일본과의 교류는 구석기시대인 기원전 1만 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고대사회의 수상교역은 신석기시대의 영향을 밭아 이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청동기시대 고조선 초기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바위에 그려진 암각화에는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하는 그림 등이 그려져 있으며, 배에 6명이 탔고 배꼬리와 뱃머리가 활처럼 구부러진 것을 보면 상당히 큰 구조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기원전 3000년경의 함경북도 서포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고래 뼈로 만든 노()가 발견된다. 이로써 우리들은 고대 시대 구조선과 노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우리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000년경 즉 고조선 초기부터 돛을 단 돛단배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조선 초기부터 고조선을 이루고 있던 거수국(제후국)들은 중국 상고시대의 나라들과 육상 및 해상교역을 활발히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순(기원 전 2209)에서부터 시작하여 하, , , 춘추, 전국, , 전한 나라들과 고조선은 교역을 중심으로 정치, 문화 교류도 하였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돛배가 처음 나타난 것은 상나라 때인 기원전 1600년경이었고,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1100년경에는 돛배를 항해용으로 본격 사용했다는 기록이 중국사기에 있다. 이로 미루어 돛배의 사용은 교역의 주체였던 고조선이 빨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이 중국보다 빨랐던 것은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들은 이처럼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유적을 통해서 해상교통의 최초 세계화를 알 수 있다.

 

세계최초의 고인돌 거석문화와 천문학을 발전시킨 한반도

 

한반도는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고인돌 및 천문세계도 세계최초라는 사실이다. 8000년 전 전남 화순군에 있는 고인돌을 비롯해 강화도 등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고대시대부터 환국의 배달문명이 존재했다는 요지부동의 증거이다. 고인돌은 거석을 이용한 대표적인 무덤양식이자 석조 구조물이다. 이 고인돌이란 명칭은 고 + (수동) + (과거) + 돌의 형태로 만들어진 순수 우리말이다. 故人돌 혹은 古人돌이 아니다. 고인돌은 당시 거석을 옮길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던 군장 집단의 등장을 알려주는 유물이며, 또한 신석기시대 이래 유행한 거석 숭배 문화와 연관성이 있으며, 거석을 활용하는 뛰어난 기술력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등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대체로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 사이에 나타나나,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의 고인돌은 기원전 4000 ~ 5000년의 건축물로서 존재한다.

 

 

 

 

고인돌이 대표적인 고대사회의 무덤양식인 것처럼 8천 년 전 무렵 신석기시대 초기에 만든 공동묘지가 부산 가덕도 신항 예정지에서 발굴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26구에 달하는 인골 등이 확인된다. 이 묘지는 현재까지 보고된 신석기시대 공동묘지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규모 또한 최대로, 고고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조사결과 신석기시대 문화층 중에서도 제5층으로 드러난 이 공동묘지는 당시 사람들의 집단 생활공간으로 보이는 집석(集石. 돌무더기)시설과는 공간 배치가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묘역과 생활공간을 분리해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무덤구덩이인 묘광(墓壙)이나 봉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토기를 비롯해 석기와 옥 등 부장품이 함께 발굴된다. 그리고 깬 토기를 시신 밑에 깐 인골도 보고된다. 이들 토기는 인골 하부에 깔거나 주변에 깐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인골 위에 덮은 사례도 발견된다. 나아가 편평한 깬돌을 머리에 받친 채 그 주변에 모양으로 다른 깬돌을 두른 시신도 드러난다. 어떤 인골의 좌측 팔 옆에서는 황화수은이 주성분인 주사(朱砂)나 산화철 계통으로 생각되는 붉은색 안료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고인돌은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고대 사회에서 한반도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8000년 전 형성된 한민족의 거석문화는 종교적인 신앙심과 권력의 상징으로 발전하여 전 세계적으로 피라미드와 같은 거석건축물들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거석건축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천문학도 따라 발전하게 된다. 한민족의 환국문명은 상고시대 이미 거석문화를 통해 세계최초의 제례문화와 천문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고대 천문학의 발전을 보여주는 용덕리 고인돌과 별자리 실측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11개의 별자리에 속하는 별들이 새겨져 있으며 별들의 운동을 감안한 연대는 기원전 2900년이다.

 

 

세계 최초의 군사무기인 활을 발명한 한반도

 

 

고대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군사무기는 당연 활일 것이다. 그런데 이 활도 구석기 말부터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민족의 구석기 유적에서 화살촉 등 많은 흑요석 타제석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l8630년 전으로 추정되는 최대의 후기구석기 유적으로서, 바로 흑요석을 포함하여 자루가 달린 화살촉·창촉 등 약 3만여 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한민족이 활을 최초로 발명하여 사용한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후기 구석기시대의 활 제작은 신석기시대를 거쳐 고조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고조선의 활 제작기술은 중국의 활 제작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서에는 중국도 은나라 시대부터 활을 사용했다고 하나 실제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중국 최초의 활은 전국시대의 것으로 길이가 우리의 활보다 약간 큰 1.4m에 이른다. 전국시대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로, 전국 칠웅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이다. 그러니 고조선 건국 이전부터 활을 써온 우리 민족에 비하면 최소 2000년 이상 늦은 셈이다. 이는 고조선이 기원전 24세기 건국하면서부터 활을 쏘며 만주 벌판을 누빌 때 활이 발달하지 못한 중국은 결코 고조선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칼과 창이었다. 특히 창에 주력하였다. 일반 단순궁의 경우 사거리가 길어야 50~80미터에 불과해 전장에서 무기로서 위력이 투창에 밀린다. 중국이 창을 선호했던 이유이다. 이렇게 사거리가 짧다보니 중국인들은 새를 잡을 때 주살을 썼다. 주살이란 화살 끝에 실을 매달아 쏜 후에 실을 잡아당겨 다시 회수하는 화살이다. 그만큼 중국은 화살이 귀했다.

 

 

고인돌 무덤에서 발견 된 비파형동검(좌), 세형동검(중), 중국식동검(우).

비파형동검은 요령식동검이라고도 불리며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의 형태는 검신 하부의 폭이 넓고 둥글게 비파형 형태를 보인다.

중앙보다 약간 위에 위치한 좌우 돌기가 현저하다.

 

 

그러나 우리민족인 동이족의 각궁(복합궁)은 사거리가 보통 150~180미터이고 곡사(曲射)일 경우 최대 유효사거리는 360~380미터에 이른다. 중국은 거의 2000년 가까이 고조선의 멀리 날아가는 창을 두려워하며 혹여나 쳐들어 올까봐 마음 졸이며 살았다. 이러한 무서운 무기를 가졌음에도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평화와 이웃을 사랑한 나라가 고조선이다. 공자 같은 중국의 현인이 동방의 고조선을 흠모하는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후기 구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의 환국문명을 이룩한 우리의 선조들은 이렇게 활이라는 군사력으로 세계화를 이룩한 것이다. 왜 환국문명이 12지국이라는 제국으로 발전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흑요석이라는 군사력의 세석기문화는 12천 년 전을 기점으로 대박을 터뜨리는 기술문화로 이어지고, 그리고 드디어는 전기 고조선이 모피 수출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후기 고대사회에서 이어지는 세계최초의 발명품생산국 한반도

 

우리민족의 선조들은 상고시대에 이어 줄기차게 세계최초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유물유적들을 개발해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세계최초 자연화약 및 화포도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개발했다는 사실에서 들어난다. 1376년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은 중국이 먼저 발명했지만, 최무선(崔茂宣)이 독자적으로 연구 끝에 자연화약을 자체개발하고 함선에 실어 발사하는 화포와 화통을 우리가 먼저 세계최초로 개발해 낸다. 이 무기는 1380년 두 번에 걸쳐 침입한 왜구 620척의 선단(船團)을 진포·관음포 싸움에서 격파해 대승케 하는데 기여한다.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의 함포공격

 

또한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는 1377년 직지심경(直旨心經)의 발명이다. 이 직지심경의 인쇄는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70년 앞선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금속인쇄문화가 얼마나 앞선 것인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이를 본 세계인들은 크게 놀라워했다고 한다. 아울러 세계최초 로켓과 신기전도 개발한다. 신기전은 1448년 당시 한 번에 일백 발씩 발사되는 최첨단 비밀병기였다. 당시 두만강, 압록강 국경을 침입한 여진족들을 물리치는데 사용된 다연장로켓(9MRL)의 원조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최초의 철갑선 개발이다. 이순신 장군은 7년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 당시 철갑선인 거북선으로 일본군과 싸워 2323승이라는 해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이 거북선은 태종실록(1413)에 최초로 나타난다. 우리민족은 이렇게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민족이 처한 삶은 과연 어떤가? 우리들은 이를 스스로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직지심경

 

 

지금으로부터 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로 아프리카를 출발하여 바이칼호수에서 추운빙하기의 삶을 극복하고,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북아시아의 만주대륙에서 1만년을 전후로 해서 신석기시대의 환국문명을 건설하였던 선조들은 정말로 대단한 민족이었다. 우리민족은 신석기시대의 환국문명에서 세계최초의 농경문화, 토기제작문화, 해상교역, 고인돌 거석문화, 군사무기인 활, 비파형 동검 등을 발명하여 동이문명을 일으킨 세계최고의 문명국이었다. 이들 세계최초의 발명품들은 말 그대로 환국문명의 세계성(世界性)을 잘 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최초의 농경문화 형성은 말 그대로 생활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안정성을 바탕으로 생활에 필요한 마제석기와 빗살무늬토기를 발명하고, 또한 그들의 죽어간 조상을 섬기는 무덤양식의 거석문화를 통해 세계화를 도모한 것이다. 환국의 고인돌 거석문화는 신을 섬기는 종교적인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가장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의 산물에서 나온 것이다. 환국문명의 거석문화는 7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중앙아시아로 진입하기 전까지 수없이 죽어나간 그들의 조상을 섬기고자 하는 참된 인본주의 문명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삶의 고난을 극복하고 이겨내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가 고인돌거석문화의 형태로 나온 것이며, 이를 통해 천문학의 천부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상을 역으로 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세계최초의 활과 비파형 동검 등을 사용하여 전 세계에 환국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들이 살펴본바와 같이 신석기시대의 환국문명에서 발명한 세계최초의 수많은 유물유적들은 말 그대로 구석기시대를 끝내는 혁명사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혁명사상의 정신은 바로 자신을 이겨내고자 하는 발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바로 구석기시대의 신을 매개로 하는 제사장문화를 탈피하고, 참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1만 년 전 참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류최초의 르네상스문화혁명이 한민족에 의해서 이처럼 일어난 것이다. 환국문명! 이는 바로 그 당시의 신()르네상스문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 시대의 우리민족은 한민족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제안된 틀에만 사로 잡혀 세계화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분명히 한민족과 한국인은 다르다. 한민족의 호모사피엔스라고 불리 우는 고대 선조들이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그 넓은 지역에서 하나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민족이름이지만, 한국인은 작금의 한반도라는 제안된 울타리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들은 삶을 긍정하는 위대한 한민족의 정신으로, 현대사회의 세계화를 다시 재현하는 참된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연재자료

 

1.일만 년의 세계사를 지배해온 한민족의 정신문명사

http://cafe.daum.net/kphpi21/GWs9/100

2. 지구 지각판의 형성구조로 살펴본 한민족의 세계사

http://cafe.daum.net/kphpi21/GWs9/101

3. Y 염색체 분포도로 살펴 본 한민족의 형성과 인류이동

http://cafe.daum.net/kphpi21/GWs9/102

4. 헬리코박터균의 세계분포도로 살펴 본 한민족의 형성과 인류이동

http://cafe.daum.net/kphpi21/GWs9/103

5.농사와 언어분포도로 살펴 본 인류문명사와 한민족사

http://cafe.daum.net/kphpi21/GWs9/104

6.전 세계인류문명사의 기원(起源)은 한민족의 천부사상

http://cafe.daum.net/kphpi21/GWs9/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