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 자는 이숙(頣叔), 호는 현재(玄齋)·묵선(墨禪). 아버지는 문인화가 정주(廷胄)이다. 증조부 지원(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인 익창(益昌)이 과거부정사건을 저지른 데 이어 왕세자(나중에 영조) 시해 음모에 연루되어 극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1748년(영조 24)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의 감동(監董)으로 추천되었으나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파출(罷出)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 자질을 지녀 스스로 물상을 그리고 현상을 만들 줄 알았으며, 20세 전후하여 정선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소론계(少論系)의 김광수(金光遂)·이광사(李匡師)·김광국(金光國)과 남인계(南人系)의 강세황(姜世晃) 등과 교유하며 남종화풍의 조선화(朝鮮化)에 크게 기여했다. 영모·화훼·초충(草蟲)·운룡(雲龍) 등 각 분야에 능숙했으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정선과 함께 겸현양재(謙玄兩齋)로 손꼽혔다. 초기에는 정선의 화풍에 토대를 두고 황공망(黃公望)과 심주(沈周)를 비롯한 원말사대가와 오파(吳派)의 남종화풍을 두루 섭렵하면서 이 화풍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 진수를 터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마를 통하여 요체를 체득한 다음 50대에 이르러 강하고 거친 묵법(墨法)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 중기의 절파(浙派) 화풍을 융합시켜 중국과는 구별되는 특유의 한국적 화풍을 이룩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진경산수를 다루면서 눈에 보이는 실제의 경관을 초월하여 내재된 자연의 본질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융합시켜 새롭게 이상화된 산수화를 묘출함으로써 우리 산천의 이념화를 구현했다. 이밖에 영모·초충 등에서도 명대(明代)의 화법을 토대로 자신의 화풍을 이룩했다. 정선과 함께 영조연간 최고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이러한 화풍은 최북(崔北)·김유성(金有聲)·이인문(李寅文)·이방운(李昉運)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1747)·〈파교심매도 奢芋荒巳踪μ(1766), 개인 소장의 〈경구팔경도 京口八景圖〉(176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