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거기재(居基齋)·성재(星齋)·삼기재(三奇齋)·기암(箕庵)·기옹(奇翁)·좌은(坐隱)·반월(半月)·호생관(毫生館). 아버지는 계사(計士) 상여(尙餘)이다. 1747년(영조 23)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가로 일본에 다녀왔다. 서울의 여항(閭巷) 출신으로 이익(李瀷)·이용휴(李用休)·신광수(申光洙)·신광하(申光河)·정범조(丁範祖)·이광사(李匡師)·강세황(姜世晃) 등 당시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소론계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문사지식의 표방에 따른 초세적(超世的) 친자연주의의 실천과 함께 사의적(寫意的)인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하는 등 시·서·화를 겸비한 조선 후기의 본격적인 직업화가로서 활약했다. 만년에는 박지원(朴趾源)·유련(柳漣)·남공철(南公轍) 등 북학적(北學的) 성향을 띤 지식인들 및 여항시인 이단전(李亶佃), 화원 김홍도(金弘道) 등과도 교유했다. 키가 몹시 작았던 그는 매섭고 괴팍한 성격과 오만하고 기이한 행동 때문에 광생(狂生)으로까지 지목을 받으며 많은 일화를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다. 〈서상기 西廂記〉·〈수호전 水滸傳〉 등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하며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경했다고 한다. 강세황과 더불어 심사정(沈師正)·정선(鄭歚) 다음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유작들은 산수·화조·초충(草蟲)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당시 사람들은 '최메추라기'라고 불렀다고도 하나 산수화에 가장 능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심사정과 강세황의 남종화풍을 토대로 보다 치졸한 듯하면서 소박하고 정감어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만년에는 거칠고 분방한 기질과 상통되는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개성을 이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미법산수도 米法山水圖〉와 〈사시팔경도화첩 四時八景圖畵帖〉, 개인 소장의 〈한강조어도 寒江釣魚圖〉와 〈공산무인도 空山無人圖〉·〈풍설야귀도 風雪夜歸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