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반발 육군.의병 전쟁준비 ‘소홀’
거북선 전쟁 전날 완성, ‘우연이 아니다’
“우물쭈물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나드 쇼(Bernard Shaw)의 묘비명이다. 자신의 어리석은 삶을 인정하는 노(老) 대가(大家)의 겸손과 후회가 담겨있다. 어제의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개인이나 국가 혹은 민족이 착각 혹은 오만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땅을 치며 후회를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무능한 리더는 후회 대신 책임전가
1587년(선조 20) 43세의 이순신은 함경도 북방의 조산보 만호와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했다.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는 여진족과 마주한 곳으로 오늘날의 최전방 GOP(General Outpost)와 같은 곳이다. 이순신은 함경 병사 이일(李鎰)에게 여진족의 기습을 대비해 병력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월, 이순신의 예상처럼 여진족은 녹둔도를 기습했다. 이순신은 다리에 화살을 맞은 채로 이운룡(李雲龍) 등과 함께 여진족에게 잡혀가던 백성과 군사들을 되찾아 왔다. 그러나 이일은 자신의 오판에 대한 책임 대신, 이순신에게 책임을 지워 패장으로 보고했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생애 첫 백의종군을 해야 했다.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리더 이일의 책임 전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은 각기 군사와 물자를 모았다. 관군 중에서도 육군은 육군대로, 수군은 수군대로 각자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전쟁 준비가 부족했던 육군과 의병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대비했던 이순신의 수군이 보유한 군사와 군량, 병기까지 마구 가져갔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는 수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어이없는 조선군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조정에 요청했다.
“전쟁이 일어난 뒤 수 년 동안 온갖 계획을 세워 운영하고, 한결 같이 원했던 것들이 모두 헛된 일이 될 형편입니다. 신(臣)처럼 못나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게다가 당장 나라가 다시 살아나야 할 이때에 과감히 추진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훗날 후회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臍, 서제). 자나 깨나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원통하고 민망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앞으로는 삼도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각 고을 괄장군(括壯軍)과 군량과 병기들을 (다른 부대가) 함부로 옮겨 가지 못하도록 수군에게 전속시켜주십시오.” <연해안의 군사ㆍ군량ㆍ병기를 수군에 전속시켜 주기를 청하는 계본(請沿海軍兵糧器全屬舟師狀), 1593년 윤11월 17일>
망한 뒤에 후회하는 어리석은 리더
이순신은 수군 소속의 군사와 군량, 무기를 육군과 의병이 계속 가져간다면 일본군의 바닷길을 끊고 있는 수군의 존립이 어려워져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호소한 것이다.
이순신이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뜻으로 특별히 쓴 보고서 원문의 ‘서제(臍)’는 본래 《춘추좌전(春秋左傳)》이 출처이다. 《춘추좌전》의 내용을 보면 이순신이 그 말을 쓴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말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문왕(文王)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 신(申)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초나라가 신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등(鄧)나라를 지나가야만 했다. 일본군이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고 한 것처럼 초나라는 등나라에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등나라에서는 대책 회의를 열었다. 등나라 왕 기후(祁侯)의 신하들 중 대부(大夫)인 추생, 담생, 양생이 기후에게 말했다.
“초나라 문왕은 등나라를 멸망시킬 자입니다. 우리나라를 지나가는 때를 이용해 문왕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께서는 훗날 반드시 자신의 배꼽을 물어뜯는 어리석은 사향노루처럼 후회(齊)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신하들의 간언에도 초 문왕이 자신의 조카이기에 조카를 죽인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것이라며 거부했다. 게다가 기후는 문왕에게 길을 빌려 주고 심지어 융숭한 대접까지 해서 보냈다. 기후의 기대와 달리 초 문왕은 기후의 신하 간언처럼 신나라를 정벌하고 되돌아가는 길에 기후의 등나라를 침략했고, 결국 멸망했다.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초 문왕처럼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어리석게도 길을 빌려 달라는 일본의 주장 그 자체가 조선 침략이라는 것은 고려치도 않은 채 명나라에 일본의 명나라 침략 계획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전쟁 대비책을 세우기는커녕 우왕좌왕하면서 시간만 보냈고, 예견된 전쟁이 일어나자 왕과 신하, 백성들은 모두 사냥꾼에게 붙잡힌 사향노루처럼 자신들의 배꼽을 수없이 물어뜯기만 했다.
이순신이 ‘서제((齊)’라는 표현을 썼던 것은 길을 빌려 주어 나라를 망하게 한 등나라 기후의 어리석음을 빗대며 조선도 또 다시 후회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간신히 바닷길을 막고 있는 수군 병력까지 다른 부대가 빼앗아 간다면 결국 수군이 붕괴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비판이다.《춘추좌전》에 서제가 쓰여진 뒤부터 후회할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때 문신 이규보도 자신의 시 <풍백시諷百詩>에서 활용했다.
“군자는 하늘을 두렵게 여겨 어두운 방에서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 그 복을 받지는 않을지라도 또한 위험은 당하지 않는다네. 소인은 하늘을 멀리 여겨 망령되이 허물을 숨기려 해, 하늘의 업보를 스스로 부르니 후회한들 무엇하는가(臍) (君子畏天壓, 暗室猶不欺, 脫未其福, 亦免蹈其危. 小人謂天遠, 妄欲隱其私, 天孽是自召, 臍焉可追).”
이규보는 사람이 늘 겸손하고 스스로 진실하게 살지 못하면 하늘의 업보를 피할 수 없으니 항상 삼가고 절제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서제 고사를 활용해 노래한 것이다. 이순신처럼 미리 대비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전쟁 발발 전날인 4월 12일에 기적적으로 완성했던 것처럼 스스로 정한 데드라인을 지키는 것이다. 이순신은 객관적인 상황을 파악하자 물리적인 시간을 고려해 스스로 마감을 정하고 철저하게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거북선이 전쟁 전날 그렇게 완성된 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이순신의 유비무환 정신과 자신이 정한 한계선 안에 일을 완성하려고 몰입한 태도가 만든 기적 아닌 기적이다. 우리의 삶이나, 소속한 조직이나, 나라도 이순신의 후회하지 않을 준비처럼 하지 않는다면 결국 눈물을 흘리며 땅을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향노루가 아무리 제 배꼽을 물어뜯어도 사냥꾼에게 잡힌 뒤의 그 운명은 정해져 있다. 잡히기 전에 사냥꾼이 쳐 놓은 올가미, 데드라인을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