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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공도정책은 ‘방치’가 아니라 ‘수토정책’이었다

백삼/이한백 2014. 9. 22. 13:52

▲ 512년 우산국을 정벌한 신라 장군 이사부 영정과 삼척 오분항에 있는 이사부 출항 기념비.photo 조선일보 DB

일본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일찍부터 독도를 발견하고 이용해 왔으므로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로 보아야 한다. 무주지 영토편입조치를 취한 것은 영유권을 분명히 해 두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조선 태종 때 시작된 ‘울릉도 공도정책’ 때문이다. 울릉도 공도정책이란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을 모두 육지로 쇄환하고 울릉도를 비워두는 정책을 말한다. 
   
   쇄환정책은 세종 때까지 수차의 쇄환을 거쳐 마무리된다. 이후 울릉도 공도정책은 1884년 울릉도 개척정책이 실시될 때까지 유지된다. 울릉도는 경상북도 울진 북변에서 130㎞ 떨어져 있다. 그리고 독도는 울릉도에서 90㎞ 더 떨어져 있다. 일본은 울릉도가 공도정책에 의하여 무인화되었다면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는 어떠했겠느냐고 반문한다. 즉 조선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거나 설사 알았더라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울릉도와 독도 모두 일본 어부들에 의해 이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1618년 다케시마 도해면허, 1660년 마쓰시마 도해면허, 1836년 하치에몽에 대한 판결문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조선이 울릉도 공도정책을 실시하고 있을 때,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울릉도 공도정책에 근거한 일본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과연 일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박해야 하는 것일까.
   
   
   1. 울릉도 공도정책은 울릉도를 방치한 것이 아니다. 조선은 수토(搜討)정책을 통해 울릉도를 계속 관리하였다.
   
   조선은 해금(海禁)정책을 통해 바다를 관리하였다. 당시 바다와 섬은 통제의 대상이었지 개발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면서 울릉도 또한 왜구의 수탈을 당하고 있었다. 조정으로서는 울릉도에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는 한 관리와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해야 하는데 바닷길이 험하여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이러한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섬을 비워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도정책이 울릉도를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역과 세금을 회피하기 위하여 또는 죄를 짓고 울릉도로 도망가는 백성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또 섬을 그냥 방치할 경우 오히려 왜구의 소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시찰하여 왜구들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고 만일 왜구가 있을 경우에는 이를 토벌하여 멸하였다. 이를 수토(搜討)정책이라고 한다.
   
   울릉도 태하항에 황토구미라는 지명이 있다. 조선은 3년마다 울릉도에 수토관을 파견하여 섬의 현황을 살피게 하였고 파견된 수토관이 울릉도에 다녀온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울릉도 특산물인 황토와 향나무를 증거물로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 황토를 파내던 언덕이 큰황토구미, 작은황토구미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수토관으로는 삼척의 영장과 월송의 만호가 번갈아 파견되었다.
   
   이때의 수토관들은 왜구 토벌보다는 세금과 부역을 피해 울릉도로 숨어 들어간 백성이 있는지 살펴 이들을 쇄환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였다. 3년마다 되풀이되는 수토정책도 시일이 흐르면서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많은 비용과 위험이 따른다는 점도 한몫하였다. 조선 중종 이후로는 수토관을 파견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울릉도로 숨어 들어가 사는 조선의 백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금과 부역이 없는 울릉도는 이들에게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울릉도는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울릉도를 거점으로 삼아 동해안을 공략하려는 일본 수군이 울릉도에 침입하여 거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퇴로가 막힌 일본 수군 병사들이 울릉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1693년 안용복의 1차 도일사건이 발생하고 1694년 장한상이 울릉도에 파견된다. 장한상은 수토정책의 재개를 건의하고 이후 3년마다 울릉도 수토가 이루어진다. 그러다가 1884년 고종에 의하여 울릉도 개척정책이 실시된다. 이처럼 울릉도 공도정책은 결코 울릉도를 방기하는 정책이 아니었다. 조선은 수토정책을 통해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감찰하고 관리하였다.
   
   
   2. 대마도주의 울릉도 이주 청원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바로 대마도주의 두 차례에 걸친 울릉도 이주 청원이다. 태종실록 권13 태종7년 1407년 3월조의 기록이다.
   
   ‘대마도 수호(對馬島 守護) 종정무(宗貞茂)가 평도전(平道全)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정무가 무릉도를 청하여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자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나더러 반인(叛人)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가 대답하기를 “왜인의 풍속은 반(叛)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상사로 여기므로 금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계책을 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경내에서는 상사로 여기지만 만일 월경해 오게 되면 저쪽에서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대마도주가 울릉도 이주를 청원하였으나 태종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청원은 1614년의 일이다. 광해군일기 권82 광해군6년 1614년 9월조 기록이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울릉도에 왜노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뜻으로 전일 예조의 서계 가운데 이미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다 하여 또 서계를 보내었으니 자못 놀랍습니다. 본도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가 명확히 있습니다. 이 일을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갖추어 기재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깊이 꾸짖어서 간사하고 교활한 꾀를 막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경상 감사와 부산의 변신에게 공문을 보내 이번에 온 배에 특별히 유시하고 이 글을 가지고 속히 돌아가 도주에게 보고하여 조정의 금약을 준수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다.’
   
   1614년 조선 조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와 울릉도에 왜인의 왕래를 금지하기로 하는 외교문서를 주고받은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마도주가 울릉도 이주를 청원한 것이다. 조선은 당연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마도주의 두 차례에 걸친 울릉도 이주 청원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로서 조선의 관리하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3. 해류와 바람을 이용한 조선의 항해술
   
   공도정책과 수토정책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에 이주하여 거주하는 조선의 백성이 있었다. 또 동해와 남해의 어부들은 해산물이 풍부한 울릉도와 독도에 물고기와 전복을 잡으러 다녔다. 안용복이 1693년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맞닥뜨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울릉도 인삼이 품질이 좋아 인삼을 채취하러 가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최근에는 거문도 어부들이 한반도의 동서를 오가며 장사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 활동 범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거문도 어부들은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서해와 동해를 오가며 장사하였는데, 울릉도와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집하였다고 한다.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 그 기름으로 호롱불을 밝히고 해풍을 맞고 자란 단단한 나무로 물건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옛 사람들이 어떻게 울릉도와 독도를 오갔는지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어떻게 우산국을 정벌할 수 있었는지, 수토관들과 거문도 어부들이 어떻게 울릉도와 독도에 갈 수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수토관을 파견하였다는 내용이 종종 등장하는데, 연구에 의하면 쿠로시오 난류의 지류인 동한 난류가 북한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는 북한 한류와 북위 37도에서 38도 사이 울진과 삼척 앞바다에서 충돌하여 울릉도 쪽으로 비스듬히 흘러가게 되는데, 편서풍이 불 때 이 흐름을 이용하여 울릉도로 쉽게 건너갈 수 있다고 한다. 5~6월 내지 10월이 최고의 적기라고 한다.
   
   고종 때 이규원과 우용정이 5월에 울릉도에 간 것도 이러한 해류를 이용한 것이었고, 505년 실직(삼척)군주가 된 이사부는 우산국 정벌을 위해 많은 연구를 했을 것이고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 울릉도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0㎞의 거리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울릉도 거주민들은 독도에 어떻게 갔을까. 1988년 7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뗏목 항해가 이루어졌다. 울릉도 삼나무로 만들어진 뗏목은 해류와 바람을 타고 72시간 만에 무사히 독도에 도착하였다. 울릉도에서 독도로의 뗏목 항해는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시도되었고 대부분 성공하였다. 이러한 뗏목 항해의 목적은 울릉도 거주민들이 독도를 상시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울릉도에서 독도로의 항해는 울릉도를 등지고 가기 때문에 방향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한다.
   
   
   4.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백성들에 의해 실효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울릉도가 조선 백성들에 의하여 이용되고 있었던 것에 관한 증거들을 살펴보자. 프랑스 라페루즈함대 1787년 5월 27일자 항해일지 내용이다.
   
   ‘나는 이 섬을 발견한 천문학자 르포트 다줄레의 이름을 따서 다줄레섬이라 명명했다.… 우리는 이 작은 만에서 중국 배와 똑같은 모양으로 건조되고 있는 배들을 보았다.… 다줄레섬에서 불과 110㎞밖에 떨어지지 않은 육지에서 조선인 목수들이 식량을 가지고 와 여름 동안 배를 건조한 뒤 육지로 가져가 파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은 1880년 일본 군함 아마기(天城)함의 보고서이다.
   
   ‘이 섬은 일본 오키섬으로부터 북서 4분의 3, 서 약 140리, 조선 강원도 해안으로부터 약 80리, 바다에 고립하여 전체 섬이 높고 험한 원추형의 구릉이 집합하여 수목이 덮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북위 37도 22분, 동경 130도 57분, 최고산은 높이 4000척, 섬의 둘레 18리, 그 형태는 거의 반원과 유사하며,… 죽서(竹嶼)는 이 섬의 근해에서는 최대로 섬의 동해안에 떨어져 있다.… 현재 섬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140명이다. 봄여름 기간 이 섬에 와서 새로 어선을 제조하여 낡은 어선과 바꾸어 돌아간다고 한다. 이 어선들은 철류를 쓰지 않고 목재만으로 만든다고 한다.’
   
   다음은 1899년 10월 3일 다카오서기생복명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일본 외무성에서 울릉도에 파견한 조사관 다카오 겐조가 작성한 보고서이다.
   
   ‘현재 토착민의 수는 2000여명으로 호수는 500호이며, 농부와 어부가 각각 절반으로 선박을 건조하는 목공이 있다.’
   
   다음은 울릉도 거주민들의 독도 이용과 관련된 일본의 기록이다. 1902년 10월 16일 일본 외무성 통상휘찬 제234호 제46면 한국울릉도사정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본도(本島)의 정동쪽 약 50해리에 작은 섬 세 개가 있다. 이를 리얀코섬이라 하며 일본인은 마쓰시마(松島)라 한다. 그곳에 다소의 전복을 산출하므로 본도에서 출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섬에 식수가 없으므로, 오랫동안 출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4~5일 후 본도에 귀항한다.’
   
   이 기록에서 본도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울릉도가 독도의 본도라는 표현으로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다음은 1905년 9월 3일 일본 외무성 통상휘찬 제50호에 울릉도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내용이다.
   
   ‘바다사자라고 칭하는 해수는 울릉도에서 동남 약 25리 위치에 있는 량코섬에 서식하며, 작년 무렵부터 울릉도민이 그것을 포획하기 시작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백성은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5. 조선은 독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이 독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관한 증거들을 살펴보자.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지리지 58권 울진현편에 수록된 내용이다.
   
   ‘울릉도가 있다. 현의 정동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했고, 무릉 또는 우릉이라고도 했다. 지방은 100리다.… 우산과 무릉은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다음은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내용이다.
   
   ‘우산과 무릉 두 섬은 현의 정동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이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고도 했는데 지방은 100리이다.’
   
   고려사지리지에 수록된 내용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내용은 언뜻 비슷하지만 매우 다른 내용이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우산과 무릉을 별개의 두 섬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수차례의 쇄환정책을 통해 울릉도(무릉)와 독도(우산)를 구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우산’은 독도가 아닌 울릉도 인근에 있는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죽도는 울릉도에서 불과 2㎞ 거리에 있다. 죽도는 짙은 안개가 끼지 않는 한 언제든지 육안으로 보이는 섬이다. 항상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고 특별히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94년 장한상의 울릉도사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동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섬 하나가 있는데, 그리 높지 않고 바다 대나무가 일면에 나 있다. 비가 그쳐 안개가 갠 날 산으로 들어가 중봉에 오르면 남북의 양봉이 올려보아야 할 정도로 높이 마주 보고 있는데 이것을 삼봉이라 한다.
   
   서쪽을 바라보면 대관령의 구불구불한 모습이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면 바닷속에 섬 하나가 보이는데, 그 크기는 울도의 3분의 1 미만이고 300여리에 불과하다.’
   
   조선의 1리는 400m이다. 5리는 2㎞이므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섬은 지금의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바다 대나무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죽도가 왜 죽도가 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동쪽 바다 300여리에 있는 섬 하나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300여리는 120㎞인데, 이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은 독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한상의 울릉도사적은 죽도와 독도를 구별하여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6. 조선은 동해 바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요도와 삼봉도 일화가 바로 그 증거이다.
   
   1425년 3차 쇄환 이후인 1430년, 함길도 함흥부에 사는 김남련이라는 사람이 요도(蓼島)에 다녀왔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세종은 함길도 감사에게 요도의 정확한 위치를 조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에도 양양 동쪽 바다 가운데 요도가 있다는 제보가 있었고, 1438년 무릉도순심경차관으로 4차 쇄환을 실시했던 남회가 삼척 동산현 정상에서 먼 바다에 있는 요도를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에 세종은 남회를 요도경차관으로 임명하여 요도를 찾으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세종은 동해 바다에 울릉도와 독도 이외에 제3의 섬, 요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25년 뒤 성종 시절에 이번에는 동해에 삼봉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성종 원년 1470년 영안도(함경남도)에서 삼봉도로 부역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자 성종은 1472년 3월 박종원을 삼봉도경차관으로 임명하고 일본어와 여진어 통역사를 붙여 조사하게 하였다. 박종원은 그해 5월 삼봉도 수색에 나섰지만 삼봉도를 찾을 수 없었다.
   
   성종은 1479년 2차 삼봉도 수색대를 파견하였다. 수색대는 3개월 뒤 삼봉도에 갔다 왔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영안도 관찰사 이극돈의 조사로 이것이 허위보고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관련자들은 모두 극형에 처해지고 만다.
   
   당시 요도와 삼봉도를 수색하기 위해 배를 마련하고 여비를 마련하는 것은 조정의 큰 부담이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극형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어쨌든 요도와 삼봉도 해프닝은 조선이 동해 2도설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즉 동해 바다에는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다는 지리적 인식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일본은 요도와 삼봉도 일화를 근거로 조선이 동해에 대해 무지하였고 독도에 대한 인식이 부재 내지 희박하였다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의 기록이다. 만기요람은 국왕의 국정운영참고서로 순조 8년 1808년에 서영보, 심상규 등이 편찬한 것이다.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이다.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다.’
   
   여지지는 1656년 유형원의 저서이다. ‘모두’라는 표현은 울릉도와 우산도를 구분하여 두 개의 섬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다’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독도를 송도(松島·마쓰시마)라고 불렀다. 1656년에 저술된 여지지는 우산도가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 즉 독도라는 사실을 명확히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