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평양성 함락 이후 일본군은 평양성 이북으로 북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종 목표는 명나라 점령이었다. 조선과 전쟁을 한 것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군대와 병참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이르러 조선 조정에 글을 보내어 “일본군 10만 명이 또 서해로 올 것이니 대왕의 행차는 여기서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평양성에서 나고야의 예비대가 남해와 서해를 통해 평양에 도착하고, 조선 전역에 파견된 일본군 각 부대가 담당 지역에서 징발한 군대와 병량이 모아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평양을 점령한 이후 1차 평양성전투에 함께 참여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이 담당 지역인 황해도로 철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둘째, 조선군 및 백성의 끊임없는 항전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만으로는 더 이상 진격할 힘이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안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를 평양 인근 지역에 보냈을 때 평안도에 있는 조선 관군과 의병에게 역습을 당해 살아 돌아온 자가 별로 없었다. 실제로 평안도에는 조선 관군과 의병이 상당한 기세를 떨쳤다.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강동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소모관으로 제수받은 조호익, 중화의 김진수와 임중량, 평양의 양덕록, 양의직, 이덕암 등이 의병을 일으켜 평양성 밖으로 진출을 노리던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또한 휴정이 묘향산에서 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수복을 도모하였다.
셋째, 이 무렵부터 이미 일본군은 병참보급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을 위시한 조선 수군이 일본의 뱃길을 막아 남해와 서해를 이용한 병력과 무기, 식량을 차단하였고, 육로를 통한 먼 보급로도 원활하지 못했다. 또한 임진왜란 발발 1개월 후부터 조직된 경상도 조선군과 의병이 부산에서 한양을 잇는 보급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평양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굶주림을 당하고, 탄약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한편, 의주에 피난해 있던 선조 임금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일단 요동 부총병 조승훈에게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응원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평양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 병력 18,700명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번대 일부 병력 5,000명이 있는데, 이 시기에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로 철수하였다. 이를 본 척후장 순안군수 황원은 적의 주력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보고했고, 7월 17일 승군 600명을 포함한 조선군 3,000명과 명군 3,000명 등 도합 6,000명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것이 제2차 평양성전투이다.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일본군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길 양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사유와 부장 천총, 장국총 등이 전사하였다. 조선군과 명군은 전열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크게 패했다. 총병 조승훈은 부상을 입은 뒤 수십 기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돌아갔다.
제2차 평양성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패전한 이후에는 평안도 의병이 나서서 일본군과 싸웠다. 중화군의 임중량, 윤봉, 차은진과 차은로 형제가 의병을 결성하여 일본군과 맞섰으나 일본군이 중화의병군을 선제 공격하여 의병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8월 1일, 제3차 평양성전투가 이어진다. 조방장 김응서*, 별장 박명현 등이 용강, 증사, 강서 등 바닷가 여러 고을에서 군사 1만여 명을 모아왔고, 별장 김억추*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입구를 점거하는 등 평안도를 위주로 조선 각지에서 군사들이 모였다.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의 세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판단한 조선 조정은 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려고 하였다. 순변사 이일이 5천 명의 병력으로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1만 명의 군사로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5천 명의 병사로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고,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사기가 오른 조선군은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고, 이때 성 안에 있던 일본군 수천 명이 나타나 공격하면서 조선군은 둘로 갈라지며 전열을 잃었고, 훈련 한 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조선 군사들이 흩어졌다.
평양성에서 주둔하면서 전투에서 계속 승리한 고니시 유키나가도 8월 초 한양성에서 개최된 일본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이후에 임진왜란 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한 조선 점령이 성공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에서 파견한 심유경*과 회담에 응했다. 9월 1일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 간의 회담이 평양성의 북편에 있는 강복산에서 열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에 대한 봉공과 대동강 이남의 조선 영역을 일본에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요구한 명나라에 대한 봉공이 명나라 황제의 허가를 얻기 위해 50일이 필요하다고 하여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정전협정은 50일 동안 평양성 서북쪽 10리 외곽에 금표를 세워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금표를 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양측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사되었다. 명나라 측에서는 명나라 군대 파병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고, 일본군 측에서는 지속적인 전투로 인한 병사의 보충(이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1만 8,700이던 병력 중 1만 명 이상이 사상한 상태임)과 후방 보급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정전협정을 반대한 조선 조정에게는 심유경이 명나라에서 70만 대군을 파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함으로써 동의를 구했다.
[출처] 일본군이 평양성 이북으로 북상하지 못한 이유|작성자 박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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