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양 날의 검입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이 서슬이 퍼런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거짓말'이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기만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혼란의 시대에 국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말>
▲ 울산보도연맹 | |
ⓒ 울산유족회 |
[거짓말] '좌익' 참여한 분들, 보도연맹 가입하면 봐드립니다
여러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야만 좋은 세상이 옵니다. 나라를 위해 가입해주세요. 해방 후 혼란통에 얼떨결에 멋모르고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 많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진짜 빨갱이가 아닙니다. 과일로 치면 토마토가 아니라 사과인 게지요. 그래서 겉은 불그스름했지만, 깎으면 하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겁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옛날엔 좌익에 참여했지만 이제는 진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비료도 배급해주고 보리쌀도 드립니다. 나라에서 이런 혜택을 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보도연맹에 가입해 똘똘 뭉쳐서 빨갱이들로부터 나라를 지킵시다. 그래서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봅시다!
[진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 20만 명 학살했다
대한민국은 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경기도 이천에선, 보도연맹원 100여 명이 아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후 충청남도에선 4개 지역·7개 지점에서 4000여 명, 충청북도는 6개 지역·14개 지점에서 2000여 명, 전라북도에선 500여 명, 전라남도에선 200여 명, 경상북도 9개 지역에서는 9000여 명, 경상남도 12개 지역에 2만여 명 등 전쟁 발발 직후부터 8월 말까지 불과 2개월 만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최소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대관절 '보도연맹'이란 단체의 정체는 무엇일까?
'보도연맹'은 오제도, 정희택, 선우종원 등 당시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이름을 날리던 이른바 '사상검사'들의 주도하에 창설됐다. 1949년 6월 5일 명동 시공관에서 창설식을 열고 지금의 중앙일보사 자리인 서소문 고개마루 턱에 사무실을 낸 보도연맹은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십만 장의 자수권고 삐라를 살포하고, 일간지와 라디오를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며 연맹원을 모집했다.
창설자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보도연맹의 창설 목적은 사상범을 전향시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보호·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보도연맹의 정식명칭이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좌익에 잠깐이나마 물들었던, '잘못된 길'로 빠졌던 국민을 보도(保導), 즉 '보호하여 지도'해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도연맹 창설의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보도연맹이 창설되던 1949년은 좌익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947년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불법화됐고, 여순사건을 계기로 1948년에는 국가보안법 제정이 완료됐다. 그리고 1948년 말에서 1949년 봄에 걸쳐서는 군대 내 좌익에 대한 이른바 숙군총살이 시행됐다. 김구 암살사건처럼, 민족주의자를 포함한 반이승만 세력에 대해서도 철저한 탄압이 이어졌다.
결국 이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보도연맹의 실질적인 결성목적은 좌익 전향자들을 정부가 관리하는 조직 속에 소속시켜 이들의 사상을 개조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전위대로 활용해 남아 있는 좌익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 즉 '좌익 뿌리 뽑기' 책략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향자들은 가입 당시 반드시 같이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기재한 양심서를 제출해야 했고 가입 후에도 1년 동안 계속해서 자백내용을 검열 받아야 했다.
그래서 보도연맹은 외견상으로는 민간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무, 법무, 국방의 3부 장관과 서울검찰청이 조직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정부기관이었다. 표면적으로 전향자들로 구성된 좌익 전향자 단체임을 표방했지만, 보도연맹의 상급 핵심간부들은 모두 정부의 관리들이었고, 간부 중 좌익 전향자 출신은 간사장과 명예간사장뿐이었다. 사실 보도연맹의 창설목적을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정부의 지원 아래 이뤄진 대대적인 포섭전향 활동에다,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남로당원이나 과거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즉각 체포, 엄중 처벌한다는 경고로 인해, 각 신문사에는 전 남로당원들의 탈당 성명서와 전향 성명서들이 줄을 이었다. 또 해방 직후 남로당,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농민조합 등의 단체에 가입했거나, 각종 문화단체에 가입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반강제로, 혹은 단체로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그 결과 창설 1년 만에 연맹원 33만 명을 헤아리는 거대단체로 성장했다.
"쌀 준다" 해서 도장 찍었는데, '살생부' 될 줄이야
▲ 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장면.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총책임자인 에버트 소령이 촬영했다. 이 사진은 50년간 비밀문서로 분류돼 묶여 있다가 지난 1999년 말 해제됐다. | |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그런데 꼭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만이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지역 연맹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에게 '모집 할당량'이 떨어졌고, 실적주의까지 가세해 애꿎은 사람들도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농촌의 문맹률은 70%였다. 내용도 모른 채 보도연맹 가입서에 지장을 찍은 촌민들도 많았던 셈이다. 충북 청원군 오창면 박임순씨는 남편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마을 구장과 반장이 품앗이도 하고 비료나 고무신을 타려면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해서 내용도 모르고 남편이 도장을 찍었는데 그게 보도연맹 가입 도장이었습니다." -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규명결정서> 인용
충북 청주시 내덕동에 살던 노학돌씨도 '내덕동 주민이 식량배급을 준다며 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수차례 강요해 어쩔 수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해 희생됐다. 비단 충청도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울산에서도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땅을 나눠주고, 버스비도 공짜이며, 비료도 공짜로 주고, 머슴살이를 안 해도 되고, 배급도 준다고 하여 가입한 경우가 있었다. 경남 김해군에서도 가입하면 양식배급도 주고 매일 경찰서로 나가 교육도 받는 등 특별대우를 해준다고 하여 주민이 가입 도장을 찍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은 김원일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불의 제전>에서도 잘 묘사된 바 있다.
지서 순경이 과거 전력이 있는 자의 명단을 작성해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회원, 자주통일청년단 회원, 서북청년단원을 가입 권유자로 앞장세워 리마다 일정한 할당을 주었다. 해방 초기 좌우익이 뭔지도 모른 채 민족해방에 들떠 권유하는 대로 아무 단체나 가입해 겅중댄 농민들도, 당신 전력에 문제가 있다며 윽박지르면 지레 겁부터 먹고 가입명부에 손도장을 찍었다. 해방 직후, 조국건설에 따른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주최 교양강좌모임에 몇 차례만 참석했거나, 해방 이듬해 가을 인민위원회 중앙지도부의 사주 아래 남한 전역을 휩쓴 '추수 봉기' 행진에 줄을 섰어도, 당신이 과거 그런 일했잖냐는 넘겨짚기에 놀라,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 김원일, <불의 제전 1> 17쪽
한편,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통행이나 상업 등에 제한이 가해지거나 배급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업운영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경우도 있었다. 경북 포항시 장기면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이영택씨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읍내에 드나들거나 거래를 할 때마다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포항 대보면 강사리 김학출씨는 선박 기관장이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해서 훈련을 완수해야만 배 열쇠를 돌려준다고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경찰 관계자였던 사람들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경북 고령경찰서 순경이었던 전아무개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킬 때는 좋은 세상이 오고 나라를 위해 가입을 해야 된다고 꼬드겨서 가입을 시킨 경우가 많았다"며 "당시 보도연맹원 10명 중 2명 정도가 실제 좌익 활동과 관계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도장 찍으라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라고 진술했다.
또 1950년에 충북경찰국 경무과에 근무했던 오아무개씨도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대부분 비료를 준다는 말에 가입한, 좌우가 뭔지 분별하지도 못하는 무식자들이었다"며 "누가 좋다고 도장을 찍으라고 하면 무조건 찍던 사람들이었다"고 진술했다. 포항경찰서 경찰이었던 정아무개씨도 "책임자급을 제외하면 특별히 사상적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배급 주고 뭐하고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도장 찍고 이름 써줬다가 명단에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진술했다.
예컨대,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3만 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는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5분의 1도 안 되었다. 그들은 도장을 찍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갈렸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도연맹원으로 이름을 올린 문서가 나중에 '살생부'가 됐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국민들을 보호해준다는 '나라'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위기의식에 찬 정권의 '예방학살'... 명령은 누가 했나
▲ 충북 청원 분터골 보도연맹사건 학살지에서 발굴된 유해. 주변에 총탄이 보인다. | |
ⓒ 진실위 조사관 백서 준비모임 |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전쟁이 터졌다. 가뜩이나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이승만은 27일 오전 2시에 도망치듯 서울을 떠날 정도로 위기의식에 가득 차 있었다. 상황을 보자면, 위기의식을 느낄 만했다.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 황급히 정부가 빠져나간 자리에선 우익인사들에 대한 검거와 숙청, 인민위원회 건설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게다가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정부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전쟁이 터지는 그 순간부터 이승만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사실, 보도연맹원들을 '진정한 우리 편'이라고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익에 한번 물들었던 이들이었으니, 바로 적으로 돌변해 자신들을 위협할 '잠재적인 내부의 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 잠재적인 적들이 무려 33만 명이었다! 그들이 뭉쳐서 바로 봉기라도 일으켜 인민군에 합세한다면? 이승만으로서는 온몸의 뼈가 후들거리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예방학살'이 펼쳐졌다. 경찰의 무선통신문은 정부가 조직적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에 관여했음을 알려준다. 정부가 요시찰인을 모두 체포하고 형무소를 엄중 경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전쟁이 터진 그날 오후였다. 6월 30일에는 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구금하라는 명령을 전 경찰서에 발송한다. 치안국장명으로 발송된 이 명령서에 나타난 명령의 장본인은 당시의 치안국장 장석윤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과연 치안국장의 권한으로만 이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
보도연맹을 수속하고 처형하는 과정은 일사분란했다. 한강 이남지역에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예비검속은 주로 경찰 등이 명부를 근거로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됐으며, 소집 혹은 연행의 형식을 띠었다. 군 단위 경찰서 등에 구금하거나 주동자급은 형무소로 이송해 구금하는 등 사실상 거의 동일한 방식과 형태로 이뤄졌다. 이처럼 특정 지역만이 아닌 전국적 범위의 학살이었다는 점은 중앙정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조직적인 지휘명령계통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공식 명령계통을 살펴보면 계엄군의 지휘권은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경찰의 지휘권은 내무장관인 조병옥에게, 형무소 수감자들에 대한 권한은 법무장관 이우익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권한의 최고 결정권자는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결국 그는 보도연맹 조직 결성 및 이후 학살에 이르는 전 과정의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역사적 책임은 물론 실질적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 포항에서 예비 검속자의 총살과 수장 작업을 지휘했던 전 해군제독 남상휘의 증언도 있다. "당시 군의 '처형' 명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발령해 육참총장과 해참총장을 거쳐 예하부대로, 경찰의 처형 명령은 조병옥 내무장관이 발령해 치안국장과 각 도경국장을 거쳐 예하 경찰서로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군경은 피검자들의 좌익 활동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거나 재판을 열 겨를이 없었다"고도 증언했다.
일단 죽여놓고 빨갱이였다고 하면 그만이었던 시대였다. 국가가 만든 조직에 가입하라고 해놓고, 가입하면 보호해준다고 했던 국가가, 덮어놓고 국민을 살해하는 '국가에 의한 희대의 살인극'이 펼쳐진 것이다. '계엄하 군사재판'이라는 최소한의 절차도 없었다. 즉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 사건
▲ 충북 청원군 만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위치한 보도연맹사건 학살지 | |
ⓒ 진실위 조사관 백서준비 모임 |
서울이나 강화 등 경기 북부 지방의 경우 워낙 갑작스럽게 인민군이 남하했기 때문에 미처 보도연맹원을 구금하거나, 수감된 보도연맹원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평택 이남 지역에서는 달랐다. 충청북도에서만 7월 한 달 동안 약 3천 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했다. 경남 하동·사천·진주 지역은 인민군 치하로 들어가게 되자, 군과 경찰은 후퇴하기 전에 연맹원 100여 명을 고성군 장구섬과 삼천포시 서금동 노산공원에서 집단학살했다.
산청에서는 후퇴하던 경찰이 80여 명을 총살했으며 남해군에서는 연맹원 시체 수십 구가 2, 3명씩 줄에 묶여 바다에 떠내려왔다고 전해진다. 거제도에서는 연맹원을 배에 태워 바다에 빠뜨린 다음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향해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창녕군에서는 200명의 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논바닥에서 50명의 연맹원이 학살당한 사건이 생존자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양산에서는 경남 지역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는 형편이다.
8월 초순부터 부산과 울산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양산으로 끌려와 집단총살을 당했는데, 당시의 현장인 사배골짜기와 동면 서락리 남락골짜기를 두고 사람들은 '피의 골짜기'라고 불렀다고 하니 말 다했다. 김해시 5개 지역에서도 750명의 연맹원이 집단총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전쟁 피난지인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사하구 구평동 골짜기에서 3일간에 걸쳐 수백 명의 연맹원들이 처형당했고, 해운대구 송정동에서도 상당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도 예비 검속자 200여 명이 구금되었다가 성산포경찰서에서 군에 인계된 후 실종되었다. 이처럼 전국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보도연맹 관련 혹은 좌익 혐의로 예비구금되어 실종·학살당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보도연맹사건은 전쟁 전후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때 대부분의 보도연맹원들은 군경의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이 같은 조치에 별다른 의심 없이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그들 자신이 특별한 죄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가를 믿었던 이들은 이내 죽임을 당했다.
전쟁 발발 후 안심한 채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희생당한 보도연맹 관련자들이나, 국군이 다시 들어왔을 때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다가 희생된 피학살자의 대부분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었다. 만약 자신이 즉결처형을 당할 정도의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면 이들은 충분히 피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전향을 한 자신이 대한민국에 의해 처벌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모두 체포되었으며 처형당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적극적인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이미 모두 피신하였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만 남았다.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보도연맹원은 부역·반역을 하기보다는 대부분 한국 정부에 충성을 다했다. 경상남도의 사례를 보면 자원입대와 혈서 지원자가 속출했고 궐기대회와 성금모금 등이 이어졌다.
1949년 근로인민당 재건을 위해 북한에서 파견되었다 전향해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을 맡은 정백(1899∼1950) 역시 개전 직후 한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다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총살당하기도 했다. 이는 정희택 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6·25 전에 나는 정보검사로 서울의 보도연맹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6·25 1년 전쯤부터 전국적으로 조직돼 모두가 33만 명이나 됐고, 서울서만 1만6800여 명이었다. (6·25가 터지자) 일부 시민이 피난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갔지만 1만6800명의 보도연맹원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을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국군과 서울시민의 사기앙양을 위해 잔류를 권유하는 주한 미대사 무초(John J. Muccio)를 뿌리치고 국회 행정부에도 알리지 않은 채 6월 27일 새벽 제일 먼저 기차로 피난길에 오른 이승만과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다.
'학살' 유가족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한 박정희 정권
▲ 울산보도연맹추모제 | |
ⓒ 김성수 |
단지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들의 운명은 그 자신의 비극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8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하여 감시하였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하여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족들은 국가의 감시와 차별 속에서 사회적 소외감, 정치적 박탈감, 피해의식, 경제적 빈곤을 떠안고 숨죽인 채 살아야 했다.
이는 전쟁 후 남한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하는 친미극우 정권체제로 형성된 이유가 크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친미적 가치관은 극도의 궁핍과 혼란을 겪고 있던 1950년대 남한 사회에서 전통적 질서를 대신하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되었고, 이 같은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일상적 억압은 학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족들은 학살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도 할 수 없었다. 잠깐이나마 1960년 4·19혁명 이후 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되고 진상규명운동이 재개되었으나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전의 조사내용 및 자료를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가족 대표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학살피해 유가족들은 시신조차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한을 삭혀야 했다. 정부의 입장은 이러했다.
"불순분자나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일부 전후세력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야기하여 국정을 어렵게 할 요소가 될 수 있다. 또한 총력안보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 국군의 신뢰도를 해칠 우려가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희생자와 전 국민이 애석한 일이나 평화가 정착된 후 조치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한다"
결국 '회상이 금지된' 과거였기에, 학살은 은폐되었다. 살육의 기억은 부인되거나 망각되면서 국가의 기억에서 배제되었다. 당사자들이 이주하거나 자연사하면서 이제는 역사의 어둠 속으로 묻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네 조상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공동체의식'은 슬프게도 와해되어버렸다.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무방비 상태였던 사람들은 다시는 그 같은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 자신과 가족만이라도 지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옆의 사람을 볼 여유 따윈 없었다. 대신 군림하는 국가와 국가에 충직한 '국민'이라는 종적 관계가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말이 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 명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엄청난 일들이 묻혀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수십만 명의 죽음을 50년간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광범한 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이 땅에서 피해자도, 가해자도, 유가족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전체 구성원은 모두 사람일 수 없었다. 학살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우리가 다시는 이 땅에 학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국민보도연맹 관련 증언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규명결정서>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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