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조선시대 120여년전 양주를 마셨다

백삼/이한백 2013. 10. 16. 13:51

유사길(惟斯吉·위스키), 발란덕(撥蘭德·브랜디), 상백윤(上伯允·샴페인), 두송자주(杜松子酒·진), 당주(糖酒·럼)…. 1876년 개항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서양 술의 한자 표기명이다. 청일전쟁 중이던 1894년 겨울, 조선을 샅샅이 누빈 영국 여성 비숍은 "프랑스풍 시계, 독일식 거울과 함께 양주(洋酒)에 대한 기호가 젊은 양반 자제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청년 양반층이 외국산 박래품(舶來品)으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 [조선일보]갓 쓰고 위스키?… 조선왕조 말엽 한 시골 양반이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양주병이 이채롭다.

식민지를 거쳐 광복과 함께 모두가 '양반'인 시민사회가 되었지만 사회적 상향 이동을 재는 척도는 여전히 겉꾸밈이었다. 지위 지향 사닥다리의 꼭대기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담아 위스키를 들이켰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대중가요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는 입에 풀칠조차 어렵던 1950~60년대 미군 매점(PX)에서 흘러나온 진품(眞品) 위스키를 마실 형편이 안 되는 대중의 과시욕을 달래 준 대체품이었다. 소주 주정(酒精)에 색소와 위스키 향을 첨가해 만들어 위스키 원액(原液)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 술은 위스키라는 이름만으로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이 그 사람이 일군 성공의 크기와 등치(等値)되던 압축성장의 1970년대를 맞아 위스키는 출세 길을 좇는 이들에게 바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은 듯 위안을 주는 마취제 역할을 했다. 이런 갈망에 비례해 위스키는 원액 함량 20%(1977년), 30%(1978년), 그리고 100%(1984년)로 진화하며 고급화로 치달았다. 2002년 한국은 인구와 소득이 두 배 이상인 일본을 제치고 위스키 수입액에서 세계 4위의 반열에 올랐으며, 2011년에는 17년산 이상 고급 위스키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하는 '위스키 공화국'에 등극했다. 마시는 양주의 주령(酒齡)을 자신을 드러내는 척도로 삼는 천박함이 낳은 서글픈 현실이다. 옛 선비들의 마음가짐인 수분지족(守分知足·분수를 지키고 만족을 안다)의 미덕이 그리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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