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미래사회의 역사학이론으로 발전되는 뉴톤(Newton)물리학

백삼/이한백 2014. 6. 2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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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사회의 역사학이론으로 발전되는 뉴톤(Newton)물리

참된 물리역사관으로 현대사회의 왜곡된 역사관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사회를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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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살아나가는 대자연의 변천사(變遷史)에 주어지는 모든 삶의 원칙은 항상 흐름의 역사로 존재한다. 이처럼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이 흐름의 모든 변천사에서 우리들이 흔히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후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계절의 변화일 것이다. 또한 이 계절의 변화는 항상 예외 없이 모두 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걷는다. 한 인간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대자연의 모든 만물, 또한 생성· 성장· 쇠태·해체라는 단계적인 삶의 과정을 겪어나가며 존속한다. 계절의 변화에 있어서 봄에는 모든 만물이 아름답게 생성하여, 여름에는 그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하도록 성장한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그 기운이 다해 쇠태의 길로 접어들면서, 결국 겨울이 되면 해체라는 죽음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이와 같이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흥망성쇠의 모든 길은 바로 대자연의 모든 삶의 법칙이며,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대자연의 모든 삶의 법칙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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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유(自由)란 이와 같은 대자연의 움직임을 제대로 깨닫고, 바로 그 대자연과 함께 살아나가는 것일 것이다. 바로 자유란 대자연의 법칙을 어떠한 인류구속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자연과 함께하는 한없는 편안함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대자연의 편안함을 표현하는, 그 대자연의 흐름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생명의 자유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이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진정한 생명의 자유란 대자연의 흐름을 표현하는 물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전 우주의 근원적인 생명현상에 유일한 해답을 주는 물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물의 흐름은 대자연의 기후변천사가 사계절을 만들어내는, 그 환경 속에 그대로 내재되어 있다. 모름지기 계절의 변화는 태양의 빛과, 그리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현상에 따라 지구 내에 있는 물의 온도차에 의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이 계절 변화를 만들어내는 온도차는 결국 물과 빛의 접촉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물질의 접촉력이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법칙을 제대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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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바라보는 모든 물의 흐름은 접촉력(接觸力, contact force)과 비접촉력(非接觸力, noncontact force)의 성품을 갖고 있다. 강물은 흘러 바다에 이르는 동안 강물과 접촉하는 모든 다른 물질들과의 접촉력을 가지고 흐른다. 그런데 비접촉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접촉이란 물리학적으로 어떤 물체들이 상호접촉상태에서 서로에 대해 힘을 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다른 물체의 저항을 이겨내는 상호작용의 힘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접촉력은 어떤 물체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서로에 대해 힘을 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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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접촉력은 우리들이 어떤 공을 스스로 던지거나 받을 때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감촉의 접촉을 말한다고 볼 수 있지만, 비접촉력은 스카이다이버가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낙하할 때 지구 중력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감촉과도 같은 것일 것이다. 이때 지구중력은 직접 접촉한다는 느낌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과학을 통해 이미 다 잘 알고 있다. 즉 접촉력은 어떤 대상에 대한 저항력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비접촉력은 그 저항력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접촉력과 비접촉력은 상대성에 대한 힘의 역학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접촉력은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이지만, 비접촉력은 스스로 행사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접촉력은 우리들의 신체적인 여섯가지 감각기관에 의해서 통제될 수 있지만, 비접촉력은 이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접촉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몸의 접촉과 마음의 비접촉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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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지금까지 누가 뭐래도 이 물리학적인 접촉과 비접촉력이 만들어내는 문명 속에서 살아왔다. 접촉과 비접촉력은 인류문명을 이루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관계성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인류문명의 발달사에 있어서 접촉과 비접촉문명이 가장 크게 일어나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물의 흐름을 가장 잘 대변하는 큰 강물과 바닷물이 상호 접하는 장소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고대 문명에 일어났던 나일 강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허 강의 황허 문명 등의 4대 문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문명에 있어서 한반도의 한강, 독일의 라인강, 프랑스의 세느강, 런던의 템즈강, 북아메리카의 미시시피강, 남아메리카의 아마존강 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들 강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발달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촉과 비접촉성이 주는 사회과학적인 탐론(探論)을 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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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4대문명의 발상지

 

 

우리들은 접촉과 비접촉의 사회관계성을 어떻게 이해하여야만 할까? 우리들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톤(Issac Newton, 1642~1727)의 운동법칙과 중력의 법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이론물리학을 통해 바른 삶의 역사학을 정립하기 위해서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접촉문화의 사회관계성을 풀어내기 위해 종교적인 신학, 정치학, 인문학과 기타 다른 모든 학문들을 발전시켜 왔지만, 결국 이 모든 학문들은 오히려 인류문명을 타락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인류문명을 가장 타락시킨 것은 바로 정종유착의 정치종교학이었으며,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적 개념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지금 현대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이미 그 종말을 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인간 탐욕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극대화시켜 모든 인류사회를 타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자본은 탐욕이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도 탐욕의 산물이라는 사실에서 모두 다 들어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미래사회의 인류사회제도로서 이제는 척결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불상하게도 현재 모든 인류는, 이 민주주의라는 타락의 노예로 단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두 미쳐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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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1643. 1. 4 ~ 1727. 3. 31)

 

 

인류는 이 탐욕으로 빚어지는 사회관계성의 타락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정확한 데이터의 정보화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정확한 사회정보화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론 물리학이다. 우리들은 이 이론물리학을 단지 물성학(物性學)으로 취급하여 가볍게 보지만, 이 물성학(物性學)이야말로 우리사회의 인성학(人性學)을 풀어내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간구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제 한없이 썩어가는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점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이 물성학의 세계를 분명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모든 물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성이 인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물성학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뉴톤역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뉴톤역학(Newton mechanics, 力學)은 물체 간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의 관계를 논하는 학문이다. 즉 물체 간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의 관계성이란 것은, 바로 인류가 사회관계성을 이루며 생활하는 접촉문화라는 것이다. 뉴톤은 물성의 상호관계성의 법칙을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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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톤의 제1법칙

어떤 힘(F)에 의해 주어진 상태가 강제로 변하지 않는다면, 그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 상태에 있거나 등속의 직선운동을 하려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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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톤의 제2법칙

어떤 힘(F)이 질량(m)인 물체에 작용할 때, 이때 발생하는 가속도(a)는 그 힘에 비례하고 그 크기는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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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톤의 제3법칙

한 물체가 어떤 다른 물체에 힘을 가할 때 마다, 그 다른 물체도 같은 크기이나 방향이 반대인 힘을 원래 물체에 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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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뉴톤의 법칙은 상대적인 접촉력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뉴톤의 제1법칙은 외부의 어떤 힘이 강제로 작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평소상태를 지속한다는 것이고, 뉴톤의 제2법칙은 어떤 외부의 힘이 작용할 때, 이때 이에 따라 일어나는 움직임은 그 힘에 비례하고 질량에 반비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뉴톤의 제3법칙은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가 힘을 가할 때마다, 다른 물체도 이에 상응하는 반대의 힘을 반드시 가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 뉴톤의 법칙들은 사회상대성을 논하는데 있어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반응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단지 물체자신의 감성문화에만 반응을 나타내는 상대성이라는 것이다. 이 뉴톤의 법칙은 인류문명에 있어서 접촉문명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건들지 마라, 건들면 그에 상응하는 반발력의 힘을 반드시 보여줄 것이라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이룬 모든 역사적인 성격은 이러한 뉴톤역학의 상태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뉴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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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톤의 만유인력(Law of universal gravitation)의 법칙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두 물체 사이에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점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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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질량을 가진 두 물체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을 받는다.

 

 

우리들은 뉴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나타나는 질량(mass, 質量)과 인력(attractive force, 引力)의 상호관계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때 질량은 어떤 물체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의 양()을 나타내며, 인력은 어떤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말한다, 물론 인력의 반대 개념은 척력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뉴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어떤 두 질량을 가진 물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 물체 사이에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또한 두 물체의 질점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일반 법칙과 다른 점은 물체와 물체사이에서 나타나는 상호관계성이다. 바로 일반법칙은 물체와 물체사이에서 발생하는 개인적인 각각의 문제점이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은 상대를 인정하는 상호통섭의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뉴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물체와 물체사이에서 상대를 인정하는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물체 사이에 질량의 곱에 비례하는 확장성과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확장성의 인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장성의 인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뉴턴상수(중력상수, 만유인력상수)라는 값을 가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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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 뉴턴상수(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이 뉴턴상수는 바로 대자연의 상수이며 중력상수이다. 그리고 마음의 상수이다. 중력상수는 스카이다이버가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낙하할 때 지구중력이 존재하여 작용함을 나타내는 상수이다. 이 중력상수는 뉴톤의 일반법칙에서 나타나지 않는 상수로서 반드시 대자연의 운행에 순응하라는 상수이다. 우리들이 대자연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란 바로 뉴톤의 중력상수를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뉴톤의 중력상수는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상호간의 확장성을 잘 나타낸다. 그래서 일반법칙과 달리 질량의 곱과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제곱의 확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확장성은 사회관계성의 공동체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잘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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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스카이 다이빙

 

바로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나타나는 질량의 곱과 거리의 제곱이 서로 함께하는 통섭의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섭문화를 통해 반드시 중력상수라는 대자연의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고대사회로부터 우리민족은 뚜렷한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아름다운 산수명상이라는 참된 수행을 하며 살아온 민족이다. 그리고 그 산야에서 흘러내리는 커다란 강줄기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한민족의 역사를 일구며 살아온 민족이다. 적어도 우리민족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표면적으로 눈에는 들어나지 않지만 분명히 마음속에 존재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대자연의 법칙임을 잘 알고 살아온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아시아의 역사를 넘어 유럽의 훈제국과 아메리카의 아스텍문명의 역사를 쓰며 살아온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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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들은 뉴톤역학의 모든 법칙 속에서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배워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종교적인 사랑도 아니며, 철학적인 사랑도 아니다. 이 사랑은 바로 대자연을 잘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며, 인류모두가 공동체사회를 이루며 더불어 잘 살아나가는 진정한 삶의 공동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의 물리학적인 역학이 미래역사의 주된 주제로 쓰여 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잘 알아야만 한다. 이론물리학의 역사관은 과학적인 수학이론을 바탕으로, 그 객관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역사관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온 모든 역사관은 모두 다 주관적인 역사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이러한 못된 주관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인류는 항상 거짓의 왜곡된 역사관을 만들어왔으며, 그리고 그 그릇된 역사관에 따라, 인류는 참혹한 전쟁이라는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대자연의 물리법칙이, 우리들에 있어서 과연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잘 깨닫고, 그리고 우리사회를 밝은 미래사회로 잘 이끌어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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