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성리학·가톨릭과 충돌하며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다 [1638년 일본 : 옛 세계가 멸망하고 ‘신질서’가 수립되다]|

백삼/이한백 2014. 6. 5. 13:33

▲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의 문집인 ‘모하당실기(慕夏堂實記)’에 수록된 한국어 가사. 중화 문명을 사모하여 투항했다고 술회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세기에 100년간 이어진 전국시대가 끝나고 안정이 찾아오기까지, 일본열도에서는 일본인은 물론 국적을 달리하는 수많은 사람의 피가 흘렀다.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1592~1598), 일본이 둘로 갈라져 싸운 세키가하라전투(關ヶ原の戰い·1600),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최종적으로 멸망한 오사카전투(大坂冬·夏の陣·1614~1615), 그리고 16세기에 유라시아 동해안에 소개된 가톨릭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불온분자’들과 일본 지배층 간의 최후의 결전인 시마바라(島原) 봉기(1638년)를 거치며 도쿠가와 막부(川幕府)는 최종적으로 일본 열도의 ‘신질서(新秩序)’를 만들어냈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려 한 일본인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원나라 승려들과 조선인 포로들이 소개한 성리학이었고, 또 하나는 유럽 선교사들이 소개한 가톨릭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각종 불교 종파가 어지러이 경쟁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마치 교황령을 다스린 중세 이탈리아의 교황과 같이 자신들의 종교 자치령을 구축하여 속세의 유력 장군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이미 유학이 오래전에 들어와 있었으나 고대 중국의 훈고학(訓學)적 흐름을 이은 당시의 유학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안정을 만들고자 하는 일본인에게 영감을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선종(禪宗) 승려 가운데 일부가 중국 송나라 때 탄생한 유학의 새로운 일파인 성리학을 접하고 정신적 방랑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라는 승려였다. 사찰 쇼쿠지에서 성리학의 가르침을 접한 그는, 이 새로운 지식을 본토에서 배우기 위해 명나라로 건너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되돌아와 실의에 빠져 있던 차에,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영광에서 포로로 끌려와 일본에 머물던 성리학자 강항(姜沆)을 만나게 된다. 세이카로서는 하늘이 강항을 보낸 것이라 느껴졌을 터이다.
   
   세이카와 비슷한 사례로,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군에 소속되어 조선에 건너왔다가 조선군에 투항한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 집필한 ‘모하당술회’라는 한국어 가사(歌辭)에서 “중화의 좋은 문물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라며 전쟁이라는 형태로서이긴 하지만 조선에 건너오게 되었음을 기뻐한다. 이 가사의 어디까지가 투항 이전의 본심이고 어디부터가 투항 이후에 조선 사회에 적응코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앎’이 전국시대의 혼란으로부터 탈출을 꾀하던 일본인들에게 어필하였음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비록 성리학은 아니지만,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에서 그 지식의 본고장으로 가고자 목숨을 건 사람은 조선에도 있었다. 한양대학교의 정민 교수는 한시(漢詩)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한시의 본고장 중국으로 건너가려다 죽은 송희갑(宋希甲)이라는 사람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스승인 권필(權)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사람이 천하를 널리 보지 못하면, 시가 또한 국한되는 바가 된다.…(중략)…압록강 북쪽은 관문의 방비가 매우 엄하니, 반드시 모름지기 어두운 길에 숨어 엎드려 있다가 물 있는 곳을 만나거든 수영을 하여 몰래 건넌 뒤에라야 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중국말을 배우고 또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미쳐야 미친다’ 156~176쪽)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송희갑은 강화도 앞바다에서 수영 연습을 하다가 짠물 기운에 몸이 상하여 요절했다고 한다. 새로운 ‘앎’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각오였을 터이다.
   
   한편 이 시기에 유라시아 동부에는 가톨릭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앎’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전 연재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명나라의 부흥을 꾀하던 남명(南明) 정권의 일부가 가톨릭교도였고 대만으로 후퇴하여 명나라 부흥 전쟁을 벌인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 역시 가톨릭교도였다. 일본에는 가톨릭 예수회 창설자의 하나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가 1549년에 일본 규슈에 상륙하면서 가톨릭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일본인들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그 후 100년간의 탄압 끝에 일본 열도에서 가톨릭의 흔적은 거의 지워지다시피 했지만, 현재 이름이 전해지는 순교자 수만도 3792명에 이를 정도로 한때 그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박양자 ‘일본 기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234쪽)
   

▲ 일본에 도착한 최초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를 기념하여 규슈 히라도에 세워진 교회. 전통 가옥과 서양 교회 건물의 조화는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 풍경이다. 이승연 촬영


   이처럼 당시 일본 열도에서는 기존의 불교 특히 선종과 새로운 ‘앎’의 형태인 성리학·가톨릭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비록 그 후의 혹심한 탄압으로 인해 그 흔적이 지워지기는 했지만, 가톨릭이라는 존재는 전국시대의 옛 질서가 에도시대라는 신질서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에서는 가톨릭의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문명의 충돌이라 할 만한 격심한 갈등 속에 수 많은 가톨릭교도들이 순교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한반도에 도래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진왜란의 경우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에 선봉장으로 내세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각각 가톨릭교도와 불교도였으며 각 종교를 믿는 장군들을 이들 두 사람에게 종교별로 지휘하도록 했다. 국가가 금하는 종교를 언급할 위험을 저자들이 감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17세기 전기의 가톨릭 탄압 이후에 일본에서 집필된 문헌을 통해서는 알기가 어려우며, 일본 열도에서 가톨릭이라는 ‘앎’의 형태가 망각되어가는 과정은 예수회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세적 질서의 막내라 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신질서의 장자라 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교도에 대한 반감을 공유했다. 이는 서양 문명을 등에 업고 16세기 중기 이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던 가톨릭 세력을 견제하고, 특히 단단한 결속력을 보이는 가톨릭교도 장군들을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데에서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견해는 일견 가혹해 보이지만 이들의 공포에는 그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최초로 임진왜란 7년 통사(通史)를 담은 ‘다이코기(太閤記)’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 오제 호안(小瀨甫庵)은 서양 세력이 가톨릭을 앞세워 필리핀 루손, 스페인, 멕시코, 인도 고아, 포르투갈 등을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포도주, 술 못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카스테라·캐러멜·별사탕 등을 주며 이들을 가톨릭교도로 만든다며 비난한다. 그러므로 가톨릭을 금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은 국가를 위한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현 정권에 아부하는 것이 당시 실업 상태였던 오제 호안의 의도였기는 하지만 오제 호안이 거론한 사례는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특히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인들의 착취와 이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원주민 사회가 절멸될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일본 최초의 가톨릭 영주였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나가사키(長崎)를 교회에 바치고, 또 다른 가톨릭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등과 함께 자기 영지의 절을 파괴하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계 각지가 유럽 세력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사실을 알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서부 일본에서 극성을 부리는 가톨릭 세력을 방치했다가는 일본 역시 유럽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미 1587년에 가톨릭 포교 금지령을 내린 히데요시를 경악케 한 사건이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에 일어났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마닐라를 출발해서 멕시코로 향하던 산펠리페(San Felipe)호가 일본 근해에서 침몰했는데, 그 배에 실려 있던 하물을 그 지역을 관할하던 장군이 압수하자 선원들이 “스페인이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릴 것이다”라며 협박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정확한 상황은 알기 어려우나 이미 가톨릭 포교를 금지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산펠리페호 안에 여러 명의 가톨릭 수도회 신부들이 타고 있었던 것 등이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린 듯하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일본 국내에서 가톨릭교도 체포령을 내렸고 그 가운데 26명을 1597년 2월에 나가사키에서 처형하였다. 일본 최고 지도자의 명령에 의한 첫 가톨릭 순교였다.
   

▲ 옆마을로 시집가는 다케(たけ)라는 여성이 대대로 자기 절에 속한 신도이며 가톨릭교도가 아님을 선종(禪宗) 사찰 조겐지 절(長源寺)이 증명하는 문서. 사진 윗부분의 붉은 선에 ‘선종’, 아랫부분의 붉은 선에 ’가톨릭(기리시탄·切支丹)’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김시덕 소장


   당시 일본에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납치해온 포로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가톨릭교도가 되어 있었다. 가톨릭 장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아고스티노가 한반도로 데려온 종군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는 경상남도 진해의 웅천왜성에 머물며 조선인 포로들을 개종시킨 것 같다. 또한 세스페데스는 고니시의 사위가 지배하던 쓰시마에 잡혀 와 있던 조선인 소년 포로들을 해방시켰다.(박철 ‘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 85~89쪽) 그가 쓰시마에서 풀어준 소년은 훗날 빈센트 권(Vincent Kaun)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조선에 가톨릭을 포교하기 위해 명나라 북경에 파견되었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되돌아와 1626년에 순교하였다.(박양자 같은 책 194~196쪽) 당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은 줄리아 오타아(ジュリアおたあ)와 같은 여성도 이러한 방식으로 포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당시 전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던 노예 무역의 희생양이 될 뻔한 조선인을 다수 구출하였으며 조선인 포로들의 종교적 열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때문인지 일본에 머물던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에는 훗날 순교자가 되는 열성적인 신자가 많았다. 당시 5만명의 주민 중 거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였던 ‘작은 로마’ 나가사키에는 13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조선인 포로들이 세운 ‘성로렌조(Lorenzo)성당’도 있었다.(박양자 같은 책 88쪽)
   
   일본어와 한국어로 양국인에게 설교한 조선인 소년포로 가이오(Caius)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신념을 공유함으로써 개인과 개인이 국가와 정치를 초월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저명한 가톨릭 영주는 주스토 다카야마 우콘(Justo 高山右近)이었는데, 신앙을 위해 권력과 재산을 포기하고 추방된 그를 헌신적으로 돌본 것이 조선인 포로 출신의 가이오였다. 1614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린 고위급 가톨릭교도들의 해외 추방령에 따라 다카야마가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와 종교적 우정을 맺은 바 있는 가이오는 그를 따라 함께 필리핀 마닐라로 갔다. 그리고 다카야마가 마닐라에서 죽자 다시 일본으로 잠입하여 포교하다가 1624년에 순교하였다. 이때 가난한 일본인 야고보가 가이오와 함께 순교하였는데, 이 광경을 본 지람(R.Giram) 신부는 “하느님의 종, 한 사람은 이교도들로부터 매우 경멸되어 온 조선인이고, 또 한 사람은 사회에서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가난한 백성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앙이 얼마나 큰 영광을 주시는가를 보고 기쁨을 억누를 길 없었다”(박양자 같은 책 192쪽)라고 감탄하였다.
   
   이처럼 16~17세기의 전환기에 일본에서는 가난하고 약한 개인들이 연대하여 거대한 국가 권력에 맞서는 드라마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귀머거리 조선인 포로였던 순교자 마뉴엘(Manuel), 한때 로마에 무역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던 센다이(仙台)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正宗)의 변심에 따라 함께 순교한 일본인 무사와 농민 등등, 당시 가톨릭은 마치 불교가 천 년 전에 유라시아 동부에서 그러했듯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의 탈출구로서 기능하였으며, 계급 질서를 뛰어넘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이 지역 주민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인간으로서 존엄할 수 있다면 죽음은 하찮은 것일 수 있다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 지역에서 잊혀져 가던 정신을 이들은 보여주었다. 이러한 광경은 18~19세기 조선에서 다시 확인된다. 그리고 19세기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일본의 권력자들도 이러한 가톨릭교도들의 모습에 공포와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
   
   지난 회에 임진왜란의 여파로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일본인과 함께 활동하게 된 조선인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앞서 다카야마 우콘과 함께 마닐라로 추방된 가이오에 대해 소개하였는데, 그밖에도 포로로 끌려간 일본에서 얻게 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자 또다시 이국으로 떠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조선인들이 적지 않다. 다카야마와 마찬가지로 마닐라에서 사망한 마리나 박 수녀, 역시 일본에서 추방되어 캄보디아에 머물다가 예수회 수도사들을 따라 다시 일본에 잠입하여 순교한 토마스, 노예가 되어 마카오에 끌려갔다가 일본에서 순교한 가스파르 바스 등.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비극으로 인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일부는 종교를 통해 일본인과 화해하고, 존엄한 개인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처럼 국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가톨릭교도들에 대해 새로운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막부는 온갖 종류의 고문으로 대응하였다. 처형한 가톨릭교도들의 시체를 바닷속에 넣어버려 성물(聖物)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을 저지하는 등의 방법도 취해졌다. 이는 미국 특수부대가 2012년에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을 살해한 뒤에 비밀리에 먼바다에서 수장해 버림으로써 반미(反美) 저항의 상징이 되는 것을 방지한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톨릭교도에 대한 탄압에는 ‘신교’ 프로테스탄트 국가 네덜란드도 한몫 거들었다. 스페인·포르투갈 등 가톨릭 국가들과 유라시아 동해안의 무역 이권을 두고 경쟁하던 네덜란드로서는, 유럽에서 종교전쟁의 적대자들이었던 ‘구교’ 신자들을 보호할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였을 터이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입장은 일본 규슈의 가톨릭교도들에 의한 최대 규모이자 최후의 저항이었던 1637~1638년의 시마바라의 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가톨릭 포교 초기의 열성적 신자였던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가 다스리던 시마바라 지역에는 가톨릭교도가 많이 살고 있었다. 1616년에 새로이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된 마쓰쿠라(松倉) 일족은 이들을 극심하게 착취하고 종교를 탄압하였다. 학정(虐政)을 견디다 못한 이 지역의 가톨릭교도들은 고니시 유키나가 아고스티노의 부하 마스다 요시쓰구(益田好次)의 아들인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라는 소년을 리더 삼아 성모 마리아 깃발을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참고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1600년의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패한 뒤 가톨릭교도로서 할복이라는 자살의 형태를 취할 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부하고, 일본의 무사로서는 치욕적 형태인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을 들은 예수회 총장은 일본 포교에 기여한 그를 위해 모든 관구에서 미사를 올리게 했다고 한다.(박양자 같은 책 47쪽)
   
   막부군은 가톨릭 반란군이 농성한 하라조성(原城)을 포위하였으나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막부 측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네덜란드 측은 대포를 막부군에 제공하고 자신들의 전함에서 성으로 대포를 쏘는 식으로 막부의 요청에 호응하였다. 실제로는 네덜란드의 함포 공격이 큰 효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고, 일본인들 간의 전쟁에 외국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으로 인해 네덜란드의 개입은 이내 중지되었다. 그러나 이때 네덜란드 측이 보여준 행동은 막부 측의 신뢰를 얻어 그 후 유럽 세력 가운데 네덜란드만이 일본과 정식 무역 관계를 맺게 되었다.
   
   시마바라 봉기 이후 막부는 모든 국민이 반드시 어딘가의 사찰에 소속된 불교도여야 한다는 슈몬 아라타메(宗門改め) 제도를 수립했다. 불교가 속세 세력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을 지니고 있던 중세에서, 사찰이 막부의 동사무소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된 근세로의 변화를 상징하는 광경이다. 조선시대의 승려들이 성리학을 정신적 기반으로 삼은 국가의 요구로 각종 노역에 종사하거나 서적을 인쇄하는 등의 임무를 졌다고 한다면, 근세 일본의 승려들은 일종의 주민센터 직원이자 장례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1638년을 경계로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통제는 완성되었다. 혼란과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던 전국시대가 비로소 끝났다. 다음 회에는 신질서가 안착한 이후 일본 열도가 어떠한 방식으로 유라시아 동부 각지의 세력 및 유럽 국가들과 교섭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이번 회를 집필하기 위한 자료를 입수하는 데 도움을 주신 이승연 선생님과 가톨릭출판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