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누르하치 “명과 조선은 하나” 조선과 선 긋고 몽골 회유

백삼/이한백 2014. 6. 2. 14:24

‘대청황제공덕비’의 만주어·몽골어 비문(위 사진)과 중국어 비문(아래 사진).
1619년 사르후전투에서 1636년 병자호란까지 : 유라시아 동부 패권 둘러싼 싸움과 한반도 문제의 종결

여진인은 12~13세기에 처음으로 강대한 국가를 만들며 역사에 등장했다. 여진인의 금(金)나라는 한인(韓人)의 고려, 거란인의 요(遼)나라, 한인(漢人)의 송(宋)나라, 탕구트인의 서하(西夏)와 함께 시베리아 이남(以南)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지배하였으나, 이들 세력은 모두 칭기즈칸의 몽골에 멸망당했다. 몽골 세계제국의 분열과 원(元)의 멸망 이후에도 여진인은 명·조선·몽골 등 외부세력의 간섭과 13개 내부 세력의 분열로 인해 지리멸렬했다.

그러던 중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나타나고, 일본 열도의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명과 충돌하면서 생긴 공백으로 인해 이러한 분열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할 의지를 실천에 옮기자, 몽골의 영향을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의 여허(Yehe·葉赫) 부족은 명과 몽골 세력 등을 끌어들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이들 외부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누르하치는, 1618년에 명나라에 대해 일곱 가지 한(恨)이 있다고 주장하며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이때까지 누르하치는 만주 지역에서의 패권 획득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만든 나라가 한인의 명나라를 멸망시키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 터이다.

누르하치가 전면전을 선언하자 명과 몽골은 여허 부족과 연합군을 형성하였으며,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김응서·김응하의 조선군도 명군과 함께 행동하였다. 이는 일본 열도의 분열을 끝내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가 거병하자, 당시까지 분열되어 있던 일본 내의 모든 세력이 반(反)오다 노부나가 연합군을 결성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 누르하치는 거대한 적에 맞서야 했다. 이 전투에는 양호·유정·이여백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활동한 명의 장군들과,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 투항한 일본 병사들을 다룬 경험이 있는 김응서가 참전하였다. ‘항왜(降倭)’라 불리는 조선군 속의 일본 병사들 역시 사르후전투에서 반(反)누르하치 연합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과 여진이라는 두 세력이 국내 통일과 대외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기존 패권 세력인 조선·명·몽골이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를 저지한 것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정세였다.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누르하치 세력과 반누르하치 연합군이 충돌한 1619년의 사르후전투에서는 누르하치군이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후금과 명이라는 양대 세력의 충돌에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한 조선의 군주 광해군은 강홍립 등의 조선군에 소극적인 대응을 명하였다. 전투 중에 포로가 된 강홍립은, 조선군이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할 수 없이 온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범투르크주의(Pan-Turkism) 위키피디아

누르하치의 일대기인 ‘만주실록’에는 당시 강홍립의 말이 실려 있다. “우리 병사는 이 전쟁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니다. 왜자국(倭子國·odzi gurun·일본)이 우리 조선을 공격하여 토지와 성곽을 약탈하는 환란(患亂)의 때에 대명(大明·daiming) 군사가 우리를 도와 왜자를 물리쳤다. 그 보답을 하라며 우리를 데리고 왔다. 당신들이 살려준다면 우리는 투항하겠다. 우리 병사들 가운데 대명의 군대에 합류하여 간 자들은 당신들이 모두 죽였다. 우리의 이 군영(軍營)에는 조선인, 그리고 대명의 유격(遊擊) 장군 한 명과 그를 따라온 병사들뿐이다. 그들을 잡아 당신들에게 보내겠다.”(권5) 누르하치는 명이나 몽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돌할 요소가 많지 않은 조선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르후전투 후에 조선 측에 보낸 편지에서, “하늘이 나를 옳다 하고 한(漢·nikan)을 그르다고 판단하셨다. 조선(solho), 너희들의 군대가 한을 도와 우리에게 왔기에 나는 ‘조선군은 자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한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일본(倭子·odz)의 침공을 막아준 은혜를 갚기 위해 온 것이리라’라고 생각했다”라며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처럼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동부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림자는 이 지역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

자신에게 적대한 모든 세력과의 충돌에서 대승을 거둔 누르하치는 요동반도로 세력을 확장코자 하였다. 사르후전투 후에 조선 측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몽골 세력에 대해서도 친근한 언사로 접근하였다. 그는 당시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차하르 몽골의 릭단 칸(Ligdan Khan)에게 1620년에 보낸 편지에서 “대명(daiming)과 조선(solho) 두 나라는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아서 같은 나라처럼 삽니다. 만주와 몽골 우리 두 나라도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습니다”(‘만주실록’ 권6)라고 몽골 측을 회유한다. 명과 조선이 언어는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하나인 것처럼, 만주와 몽골 역시 언어는 달라도 문화적으로 동일하니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 밖의 여러 기록에서도 누르하치 등 만주족 집권층은 자신들의 인종적·문화적 동질성을 몽골인에게서 추구하였으며, 조선은 여진인과는 무관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나라는 일종의 전근대판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결과물이라 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같은 문헌을 작성하여, 유라시아 동부의 비(非)한족 지역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한국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프로파간다적인 문헌에 적힌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몽골인이나 여진인과 ‘한국인’이 인종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몽골인이나 여진인의 역사적 경험은 ‘남의 역사’가 아니라 곧 한국인의 역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언급에서 보듯이 여진인 측에서는 한반도 주민들에 대해 동질감을 표하지 않았다. <지도>(50·51쪽)에서 보듯이 오늘날에도 터키나 몽골의 일각에서 ‘범투르크주의(Pan-Turkism)’나 ‘범몽골주의(Pan-Mongolism)’ 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반도와 ‘한국인’은 이들의 포섭 대상이 되지 않는다. 유라시아 대륙의 주변부에 붙어 있는 반도의 주민 일부가 대륙을 향해 품은 짝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조선과 몽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며 만주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한 누르하치는, 1622년에 요동 지역의 거점인 요양(遼陽)을 점령하고 수도를 두었다. 그러나 한인에 대한 지배에 실패하여 반란 움직임이 있자 1625년에는 심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만주어로 ‘흥하다’는 뜻을 지닌 묵던(mukden· 盛京)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로 1657년에는 이 지역에 봉천부(奉天府)가 설치되었으니, 이들 지명은 20세기의 만주국(滿洲國·Manchukuo) 시기에 인구에 회자되었다. 한편 이 사이에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새 국왕이 됐다. 광해군의 조선 조정이 명과 후금의 충돌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하여는 ‘균형외교’(한명기)라는 긍정적 평가와 ‘기회주의’(오항녕)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역사의 해석에서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양측의 주장 모두 경청할 바가 있으나, 필자로서는 전자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요동 지역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하고자 한 누르하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산해관(山海關) 바깥의 영원성(寧遠城)을 1626년에 공격하였다. 만리장성 바깥쪽을 포기하자는 명나라 조정의 입장에 반대한 탁월한 군사 지도자 원숭환(袁崇煥)은, 병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에서 유래되어 임진왜란 때에도 맹활약한 홍이포(紅夷)를 활용, 여진의 기마(騎馬) 전술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누르하치도 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결국 사망하게 되는데, ‘만주실록’에는 그의 죽음이 영원성전투 때문이라는 사실이 미묘하게 처리되어 있다. 정복자 누르하치의 일생에서 이 패배가 그만큼 치욕적인 사건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만주실록’에서는 그가 죽음에 임하여 자손에게 남긴 유언이 길게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눈을 끄는 대목이 있다. “‘충경(忠經·jung ging)’의 글에서 말하기를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만류하면 가장 좋고, 일이 끝난 후에 만류하면 가장 나쁘다. 알고도 만류하지 않으면 바른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권8) 지배자 된 사람은 간언(諫言)하는 충신을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뜻일 터이다.

이 ‘충경’이라는 책은 중세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으로, ‘효경’에 호응하여 주군에 대한 충성을 논하고 있다. 이 책은 역대로 중국과 일본에서 널리 읽혔으며, 그림에 수록한 1882년판 ‘충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인기는 근대 이후에도 식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충경’을 유언 중에 인용하였다고 ‘만주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만주인 역시 ‘충경’을 중시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와 현대 한국의 주민 가운데 ‘충경’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근대사회에서 주군, 곧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가문에 대한 효성이 충돌할 때 충성을 효성보다 앞세우는 모습이 한국의 역사에서는 별로 확인되지 않는다. 모친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위기상황에 처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이순신이나, 가족을 포기하고 멀리 타향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한국 역사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유라시아 동부의 여러 지역 가운데 한반도는 ‘충경’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효경’만이 득세한 특수한 곳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범몽골주의(Pan-Mongolism) 위키피디아
사르후전투 이후 요동 지역으로 진출한 누르하치는, 압록강 넘어 조선으로 도망간 요동 지역의 한인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내용의 서한을 조선 측에 보낸다. 여진인의 가장 오래된 편찬 역사서인 ‘만문노당(滿文老)’ 1621년(천명6) 3월조에는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 i han)이 조선 한(solho han)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은 올바른 나라이니 도리를 모를 리 없을 것이므로” 요동의 지배자가 된 자신에게 요동의 한인들을 돌려보내라고 요청했다고 되어 있다. 누르하치와 조선 왕이 동등한 한(han·khan)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만문노당’의 다른 곳에는 명나라의 “만력 한(wan lii han·萬曆帝)이 조선의 한(solho i han)에게” 말했다는 구절이 보이는 등, 만주인의 초기 세계관에서 조선·여진·명은 평등한 한(han)의 나라로 간주되었다. ‘만문노당’은 근대 일본의 ‘동양학자’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등이 그 사료적 가치에 주목하였으며 패전 후에 일본의 동양문고에서 전체 7권으로 출판된 바 있다. 이 동양문고본 ‘만문노당’에서는 위의 ‘조선 한(solho han)’이라는 구절이 ‘조선 왕(朝鮮王)’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일본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사료를 왜곡한 것일까. 아마도 이들은 조선에 대한 만주인의 인식 변화를 무의식중에 번역에 반영한 것 같다. 이제까지 여러 차례 인용한 ‘만주실록’은 여진인이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편찬된 문헌인데, 여기에는 “만주국의 태조 겅기연 한(manju gurun i taidzu genggiyen han)이 조선국의 왕(solho gurun i wang)에게 글을 보낸다”(권7)라는 대목이 보인다. ‘만문노당’의 단계에서는 만주의 한과 조선의 한이 서로 동등했지만, 조선보다 위에 자리했던 명나라가 여진인에 정복당한 뒤인 ‘만주실록’의 단계에서는 만주의 한이 조선의 왕(王)보다 상위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양문고본 ‘만문노당’의 편찬자들 역시 만주인들의 이러한 조선관을 투영하여 원문을 왜곡하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여진인 지배자들이 조선을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가 아닌 자신들의 하위에 있는 존재로서 보게 된 계기는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었다. 누르하치가 1626년의 영원성전투에서 전사한 뒤 즉위한 홍타이지(hong taiji·皇太極)는, 일찍이 아버지 누르하치가 협조를 얻고자 했던 차하르 몽골을 정복하고 칭기즈칸으로부터 전해져 온다고 하는 옥새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몽골 세계 제국의 정통성을 획득한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11일에 만주인과 몽골인, 요동 지역의 한인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만문노당’에는 따르면, 이때 조선에서는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사신으로 와 있었지만 이들은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목숨을 걸고 강경 태도를 취하였다고 한다. 홍타이지로서는 만주·몽골·한·조선 등 4개 세력의 황제로서 즉위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었으니, 조선에 대해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겠다.

홍타이지는 즉위식 이전에도 1627년 조선을 공격한 바 있으니,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목표는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島·皮島)에 주둔하던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 세력을 척결하는 것, 그리고 정복 전쟁과 명나라의 금수 조치로 인해 부족해진 물자를 조선에서 입수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후금 세력은 조선을 완전 정복하는 대신에 양국 간에 형제 관계를 맺고 경제적 착취 구조를 구축하는 데 그쳤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17세기 전기의 변화된 국제관계를 인정하여 자신을 명의 황제와 대등하게 대해주기를 바랐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이미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은 “왜 조선은 그때 명나라를 버리고 후금을 편들지 않았는가”라고 쉽게 말하지만, 당시 명나라는 건재한 상태였다. 더욱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명을 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여 명을 배신했다는 소문이 명나라에서 돌았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대응이 곤란하였다. 우방이라도 믿지 않는 국제 정세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당시 유라시아 동부의 급변하는 정세에서 ‘독립 변수’는 명과 후금뿐이었으며, 조선은 이들 독립 변수 간의 길항관계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112쪽)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교묘한 외교를 전개하는 한편으로 힘껏 군사력을 확보했다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수의 조총과 100년간의 실전 경험을 전수받은 20여만명의 일본군의 침공을 받은 조선에, 그러한 역량은 남아있지 않았다. 참고로 정묘·병자호란 당시 일본의 쓰시마 측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원조하겠다며 국교(國交)를 재개하자고 접근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누르하치가 조선을 도와주겠다고 한 것과 아울러 생각하면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 격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황제로 즉위한 1636년의 12월, 홍타이지는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걸림돌이 되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였다. 전쟁 발발이 기정사실이 된 시점에 현실주의적 정치가였던 최명길은, 만약 정말로 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면 인조가 직접 압록강가로 나아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야 전쟁에 지더라도 피해 범위가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한명기, 같은 책 414쪽) 그러나 조선 조정은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만을 믿고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사태가 급박해지자 국왕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항복했으며, 믿었던 강화도는 쉽사리 함락되었다. 청군의 기동력을 무시하고 그들의 해전(海戰) 수행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알지 못한 결과였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 청나라는 조선으로 하여금 홍타이지를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현재 서울 잠실 석촌호숫가에 서 있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일명 삼전도비(三田渡碑)가 그것이다. 청나라의 공식적인 3개 언어인 만주어·몽골어·중국어로 적힌 이 비석은 청 측의 요구로 세워지고 비문의 세세한 부분까지 청 측에서 지정하였다. 그러나 비석의 내용을 읽어 보면, 조선의 신하들이 국왕 인조의 어리석음을 사죄하고, 홍타이지가 패전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음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세운 것처럼 되어 있다. 비문의 첫머리에서는 “인자하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신성한 한(han)께서 ‘화친을 깨뜨린 것이 우리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며’ 병자호란을 일으키셨다”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작은 나라가 윗나라에 죄를 얻음이 오래되었다”라고 하여 1619년 사르후전투, 정묘호란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하기에 “신성한 한(han) 홍타이지는 여전히 관대하게 즉시 군대를 보내 오지 않고, 분명한 칙령을 내려 거듭거듭 조선 조정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마치 귀를 잡고 가르치는 것보다 또한 더하였다”라고 적는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으니 병자호란의 원인은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조선에 있다는 것이다.

비문에서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항복하기로 결심했다고 적는다. “내가 정묘호란 이래 큰 나라와 화친하여 10년이다. 내가 무능하고 우매하여 하늘이 정복함을 서둘렀고 만민 백성이 재난을 만났으니 이 죄는 나의 단 하나의 몸에 있다. 그러나 신성한 한(han)은 차마 조선의 민관을 죽이지 못하여 이처럼 깨닫게 하시니,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조상들의 도(道)를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칙령을 받지 않겠는가?” 실제로는 인조가 어떻게든 홍타이지의 앞에 절하는 항복 의례만은 피하고자 노력했으나 좌절한 것이었으나, 비석에서는 그러한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조선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의하여 황제의 공덕을 찬미하는 비석을 세우기로 했다고 주장된다. “이런 큰 천복을 내린 바, 작은 나라의 주군과 신하들과 포로된 자식들과 부인들이 모두 예전처럼 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이 되고 마른 가뭄이 바뀌어 계절의 비가 내린 것 같았다. 작은 나라가 망한 것을 다시 있게 했다.” 전후에 수십만 명의 포로가 끌려갔음을 생각하면 뻔뻔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청 측은 도리어 청이 조선을 다시 일으켰다고 하여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다고 주장한다. ‘재조지은’이란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주장한 개념인데, 이 개념을 홍타이지의 청나라가 차용한 것이다. 1716년에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실권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조선빙사후의(朝鮮聘使後議)’라는 책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멸망시켜서 조선의 원수를 갚아주고 일본의 재침 위협에서 조선을 구해준 것이니 ‘재조지은’이 있는 것인데 조선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괘씸하다고 주장한다. 조선 주변의 국가들이 모두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을 주장하는 격이니, 참으로 동네북과 같은 처지의 한반도였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어디까지나 하늘의 뜻에 맞는 정당한 전쟁을 수행한 것이며,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적대하는 죄를 지은 조선은 정벌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인이 자국의 죄를 자아비판하는 내용을 비석으로 남기게 했다. 임진왜란 때 활동이 부진했던 시마즈(島津) 가문은 임진왜란 후에 일본의 영산(靈山)인 고야산(高野山)에 ‘고려진 적·아군 전사자 공양비(高麗陣敵味方 死者供養碑)’를 세운 바 있다. 전쟁 중에 자신들이 죽인 명군의 수가 많았으며, 전쟁이었기 때문에 죽이기는 했지만 적군과 아군의 명복을 평등하게 빈다는 것이 비문의 내용이다. 시마즈 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에 비해 임진왜란 당시 자기 가문의 훈공이 일본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양비라는 형식으로 스스로를 찬미했다. 근대 이후에 일본 적십자사는 이 비석이 일본인의 박애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비문의 내용을 영어로 번역한 바 있다. 필자가 상상컨대, 만약 임진왜란 때 일본이 한반도 정복에 성공했다면 이 ‘고려진 적·아군 전사자 공양비’는 청의 ‘대청황제공덕비’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세워져서 조선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로서 기능했을 터이다.

이리하여 청나라에 있어서 눈엣가시였던 조선이 굴복하고 한반도 문제가 종결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통일 전쟁에서 시작된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변동은 임진왜란과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을 거쳐 청나라의 조선 정복에 이르렀다. 다음 호에서는 명나라가 내부 반란과 배신으로 인해 여진·몽골·한인의 연합 정권인 청나라에 무너지고, 중국 남부와 타이완 등 유라시아 동남 지역의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에 일본 세력이 개입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