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역사, 소식

금곡리(金谷里) 마을 유래비

백삼/이한백 2014. 5. 14. 08:19

영동의마을 유래/유래비/자랑비

금곡리(金谷里) 마을 유래비

위치마을 입구(入口) 느티나무 밑 금곡리(金谷里) 마을 유래비 사진

금곡리는 소백산맥의 지맥인 관모봉과 장군령 산하에 위치한 마을로 서실은 앞산에 금송아지가 묻혔다 하여 쇠실이라 전해지고, 사기막골은 뒤골안에서 사기를 구었다 해서 사기막골이라 하며, 장자발은 장자(長者)가 발(發)한다는 좋은 터라해서 장자발이라 했다 한다. 원래 영동군 북이면에서 1914년 일제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개 자연마을을 병합하였으며 골짝마다 금과 석회석이 많이 난다하여 용산면 금곡리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서북은 옥천군, 동은 한곡리와 천작리, 남은 가곡리와 인접한 마을로 쇠실, 사기막골, 장자발로 구성되었으며 마을 전방에 경부고속도로와 용심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또한 마을입구 소로길을 1955년 용심도로로 확장 개설되었다가 1993년 노선변경으로 현재는 면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형성은 이조 세조대왕때 쇠실은 충주인 박유진씨와 전주이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고 그후 경주김씨, 개성김씨, 영산김씨, 진위이씨가 입주하였으며, 최근에 해주오씨, 진주강씨, 제주고씨, 광산김씨, 연일정씨가 입주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사기막골, 장자발은 이조 세조대왕때 개성인 김수언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분가 상하동을 이루면서 그후 나주임씨, 광산김씨, 한양조씨, 금령김씨등이 현재까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담배, 고추농사를 하면서 성실과 근면으로 옛 선조의 예와 덕을 지키면서 금곡리 마을이 더욱 번영되고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조말엽 고종때 일제거사(一齊居士) 김철수씨가 심은 중심마을 느티나무 아래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