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의마을 유래/유래비/자랑비
부상리(扶桑里) 마을 자랑비
우리 마을 부상리는 대평(大平) 부상(扶桑) 도천(道川) 삼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면적 3.9㎦에 157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매봉(鷹峰)산 자락에 터를 잡아 1759년에는 충청도 영동현 북이면 와촌(瓦村)리로 이름하였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해돋이마을)로 개칭되었다. 우리 마을은 약 350년전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여흥민(驪興閔)씨 경주김(慶州金)氏 선산곽(善山郭)씨 개성김(開成金)씨 경주최(慶州崔)씨 밀양박(密陽朴)씨 양주조(陽州趙)씨 동래정(東萊鄭)씨 나주오(羅州吳)씨 제주고(濟州高)씨 전주이(全州李)씨 감해김(金海金)씨 영일정(迎日鄭)씨 합천이(陜川李)씨 등이 살고 있다.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고종4(1867)년 명성황후의 당질(5寸)인 민영주(閔泳柱)가 부상리 448-2번지 일대에다 99간의 기와집을 세우고 거처하다 상경하였다. 1940년경에 마지막으로 헐려졌다한다. 고종29(1892)년에는 민대혁(閔大赫)에게 나라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 직함을 추서하여 정려(孝子)문을 건립케 명하시어 현재 준문화재로서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한문유(韓文裕) 처사(處士) 원봉(圓峰) 선생은 선비로서 최초로 서당을 개설하여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으며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대평동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한다. 앞에 서 있는 수호신석(雌雄石)은 1710년경부터 남석(男石)만 서 있었는데 가뭄이 극심했던 1940년경 어느 날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여석(女石:여자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이 울고 있는 장소를 알려주어 길골 7동의 장정들이 여석을 운반하여 마주보게 하니 그 후부터 마을에 안녕과 풍년이 들었다하여 지금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에는 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서쪽에 있는 부상 형석(螢石)광산은 조선 말경부터 있었으나 한일합방 후에는 사업이 번창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한산 인부가 300∼400명이 넘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 전국에서도 명성 있는 광산이었다 한다. 한편 1946년에 부상국민학교가 인가되어 한때 학생이 600여명이 넘었을 때도 있었으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인하여 1995년에 폐교되어 45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최근에는 사라져 가는 민속 길골 목도요를 재현하여 kbs 제1tv "일요산책 전국은 지금"에 방영된 바 있으며 전 주민이 합심하여 제24회(1991년) 난계예술제 식전 행사에 참여 목도요 디딜방아타령 쌍맹이질 등을 출연하였고 1994년에는 kbs 제1tv "맛따라 길따라"에도 전 주민이 참여하여 방영된 바 있다. 교통편으로는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영동터널)가 본동을 관통하고 있으며 1993년에는 용산과 심천을 잇는 용심도로가 확포장 되어 마을 앞을 관통하고 있다. 1983년에는 부상보건진료소가 국가 지원으로 개설되어 자체 운영되고 있으며 지역 보건사업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 훌륭하신 조상님들의 품성과 높으신 덕을 날로 새겨 자손만대 후손들에게 가르침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온 마을 주민과 출향민 모두가 뜻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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