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임진왜란이 누르하치를 키웠다

백삼/이한백 2014. 4. 7. 11:01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16세기 한반도와 만주

100년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세력이 되고자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꺾이게 된다. 1592년 7월에 조승훈 등이 이끄는 명의 군대가 조선군과 연합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점거 아래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 비록 조선·명 연합군 측이 지기는 했지만, 명나라군이 조선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본군은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의 파죽지세에 편승하여 같은 시기에 세계 정복 계획을 몽상하고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던 일본의 장병들은 이 전쟁이 히데요시의 생각처럼 쉽게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은 각 지역의 거점만을 점령하며 급히 북쪽으로 진격하는 양상을 보였다. 거점이 되는 제한된 지역 바깥에 대해서는 지배가 불가능했기에 그 공백 지역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관군과 연합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말하자면 1592년 시점에서 일본군은 점령지를 면적(面的)이 아니라 선적(線的)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의 육군과 함께 침략전쟁의 한 축이었던 일본의 수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명나라 군대까지 참전하였음이 확인되자 일본군은 당혹스러워하였다. 
   
   또한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일본군은 개전(開戰) 당시에 경험하지 못한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이 연재의 제1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 이전에 한반도 국가들의 존망을 위협하는 세력은 언제나 해양이 아닌 대륙 쪽에서 왔다. 따라서 조선을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들은 국가의 북쪽에 주력 부대를 배치하고 남쪽에는 소규모의 왜구 세력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병력만을 배치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무력하게 무너진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1592년 말이 되면 한반도의 북방에서 여진인들에 맞서 국경 지역을 지키던 조선의 정예병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여기에다 날씨도 조선군을 도왔으니, 따뜻한 기후의 일본열도 서부 출신이 주축을 이룬 일본군 장병들은 한반도 북부의 혹독한 겨울에 견디지 못한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미군이 가장 힘들어한 것 역시 이 지역의 혹독한 겨울 추위였다. 아무튼 이러한 요인이 겹친 끝에, 전쟁 경험이 풍부한 이여송의 명나라군이 조선군과 함께 1593년 1월에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히데요시의 야망은 꺾이게 되었다. 그 뒤로도 벽제관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진주성 전투 등 조선·명군과 일본군은 승패를 주고받았지만 전쟁의 주요한 국면은 강화협상으로 전환된다.
   
   이 시기가 되어 전황이 바뀌었음을 파악한 조선 측은 또 다른 문제가 북방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구만주 지역, 즉 오늘날의 중국 동북삼성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인은 조선과 명의 견제로 인해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일본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과 명이 관심을 한반도로 돌린 사이에 아이신 기오로 누르하치(Aisin Gioro Nurhaci·愛新覺羅努爾哈赤)라는 인물이 여진 세력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을 전개 중이었던 것이다. 12~13세기에 금나라를 세웠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당한 뒤로, 이 지역의 여진인은 몽골·조선·명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16세기 당시 여진인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部),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州女眞) 5부,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등 1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상호 간에 큰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대립하는 상태였으며, 몽골·조선·명 등의 주변 세력이 이러한 대립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만주 지역은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처럼 내부 세력들이 상호 적대하고 프랑스·에스파냐 등의 강력한 외부 세력이 이러한 적대를 조장하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도 비슷한 상황에서 통일 전쟁을 수행하였지만, 유럽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예수회의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게 만주 지역에 개입한 몽골·조선·명 등의 외부 세력과도 맞서야 했던 누르하치는 오다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여진인들의 전국시대는 몽골·조선·명 등이 이 지역에 대한 개입을 유지하는 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빠른 속도로 여진 집단을 합병해 나갔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의 관심이 유라시아의 해양 세력인 일본으로 가 있는 사이에 그 과정을 거의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시대를 끝낸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를 공격했고, 그 파장으로 만주 지역의 전국시대가 끝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신중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에 조선을 도와줄 의향이 있다고 타진하는 등(‘선조실록’ 1592년 9월 14일) 조선과 명에 대해 저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595년에 경기·황해·평안·함경 도체찰사가 된 류성룡은 여진 세력이 누르하치의 영도하에 급속히 통일되고 있음을 우려하며, 이를 방치하면 장차 화근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류성룡은 유사시에 겨울의 압록강에 얼음 성을 쌓아 여진 세력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다고 건의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임진왜란 당시부터 누르하치 세력이 장차 한반도의 안정에 위협이 되리라는 사실이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르하치가 1626년에 만리장성 북쪽 영원성(寧遠城) 근처를 공격했을 때에 명나라군이 얼어붙은 보하이만의 얼음으로 성을 쌓아 대응한 것과 같이, 군사학적 소양이 깊었던 류성룡은 한반도 북부의 특성을 활용한 병법을 고안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처럼 온갖 방법을 구상해야 했을 정도로 누르하치의 여진 세력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가까운 미래의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1595~1596년 사이에 누르하치를 방문하고 돌아와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기록을 남긴 신충일(申忠一) 역시 “예전에는 출입하는 자가 반드시 무기를 휴대해야만 안전했는데 누르하치가 단속한 후부터는 무장하지 않고 다녀도 안전하다”는 여진인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선조실록’ 1596년 1월 30일)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보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는 표현 그대로 상호 적대적이었던 여진인들이 누르하치의 영도하에 급속히 결속되어감을 우려한 것이다. 
   

▲ 식민지 시대에 압록강을 테마로 간행된 사진집 ‘국경의 겨울- 압록강의 정경’. 개인 소장.

당시 여진 세력과 조선 사이에서는 백두산 자락의 인삼 채취를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이 이어졌다. 인삼을 채취하기 위해 경계를 넘어온 여진인을 조선 측이 죽인다고 누르하치 측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신충일은 여진인들이 “조선 측은 여진인의 영역으로 건너와서 활동하면서 왜 우리들이 조선의 영역으로 넘어가 인삼 캐는 것은 막느냐”며 조선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류성룡도 이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조정에 건의한다. 만주어로 ‘길고 하얀 산(Golmin Šanggiyan Alin·長白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백두산은, 비단 한민족뿐 아니라 이 산을 둘러싸고 발생한 많은 민족들의 공통된 성지였다. 한민족뿐 아니라 여진인들 역시 백두산 자락에서 나오는 인삼을 귀중하게 여겨 명나라와의 주된 교역 상품으로 거래했다. 애초에 여진인들은 생인삼을 물에 적셔서 명나라 상인들에게 팔았는데 이를 노린 명나라 상인들이 교역할 때 일부러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인삼이 썩을 것을 우려한 여진인들은 헐값에 인삼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이에 누르하치가 인삼을 햇볕에 말리는 방법을 개발해서 장기 보관이 가능하게 하였고, 여진인들의 수익이 증대되었다는 기록이 누르하치에 대한 청나라의 공식 기록인 ‘만주실록’ 권3에 실릴 정도로 백두산 인삼은 여진인의 사활이 걸린 상품이었다.
   
   또한 같은 ‘만주실록’ 권3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에 누르하치가 금과 은을 채굴하고 철의 제련을 시작함과 동시에, 몽골 문자를 변형하여 만주 문자를 제정함으로써 여진인의 언어생활에 혁신을 가져오고 여진인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였다고 칭송한다. 당시 여진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몽골의 문자를 이용하였다. 이는 여진어를 몽골어로 번역하여 몽골 문자로 표기하는 방식이었는데, 상호 대립하던 여진 부족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려면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할 문자를 제정할 필요가 있음을 누르하치는 절감한 것이다. ‘만주실록’에서는 옛 법대로 몽골 문자를 이용하자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맞서 “중국인이나 몽골인은 자신들의 언어를 자신들의 문자로 표기하는데 우리는 남의 문자를 빌려 쓰기 때문에 백성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끝내 새로운 문자를 제정하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마치 조선의 4대 국왕 세종과 같이 그려진다. 실제로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를 비교하면 한자와 한글 간에 나타나는 근본적 차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훗날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여진인은 누르하치가 문자를 제정하여 ‘만주인’이라는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홍삼 제법과 광산을 개발함으로써 여진 세계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하였음을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알 수 있다.
   

▲ 사진첩 ‘국경의 겨울-압록강의 정경’ 가운데 한 장. 강물이 얼어붙어 성벽처럼 솟구쳐 있다. 다리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키와 비교하면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과 명나라에서 누르하치 군을 막기 위해 얼음성을 쌓으려 한 것은 만주지역의 겨울에는 실현 가능한 방안이었다.


   1599년 이전까지 몽골 문자를 빌려서 여진어를 표기하였다는 ‘만주실록’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진인들은 몽골의 정치·경제·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을 건국하면서 몽골인들은 14세기 후반에 몽골고원으로 되돌아가 북원(北元)을 건국한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의 저서인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책의 제목이 말하듯이, 몽골인이 수립한 연합 제국은 유라시아 전체를 포괄하였으며, 결코 ‘중국사’라는 범위에 포섭되고 말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북원의 건국 역시 몽골인이 자신들의 제국 가운데 한족의 영역을 포기하고 원래의 출발지로 돌아간 것일 뿐이었으며 명나라는 이후로도 몽골과의 항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 유라시아 동부에서 몽골인들의 정치적 독립이 소멸되고 오늘날과 같이 ‘중국’의 일부로서 자리하게 된 것은 여진인들이 수립한 청나라에 의해서였다. 이전 왕조의 역사서를 만들어서 새로운 왕조의 수립을 기정사실화하는 한족의 전통에 따라 명나라 측에서는 서둘러 ‘원사(元史)’를 만들었으나, 몽골 세력에 대한 적대감에서 만들어진 이 역사서는 후대에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1580년대에 여진 통일 전쟁을 시작한 누르하치에게 임진왜란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러나 상호 적대적이던 다른 여진 그룹들은 누르하치에게 정복되기보다는 몽골이나 명나라와 같은 외부의 힘을 빌려 누르하치를 꺾고자 하였다. 한반도에서 조선·명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1593년에 몽골과의 연계가 강한 해서여진 세력들은 코르친(Khorchin) 등의 몽골 세력과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일본열도를 통일하고자 한 오다 노부나가의 기세를 꺾기 위해, 상호 적대하던 세력이 연합하여 노부나가 포위망을 펼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누르하치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건주여진에 이어 여허(Yehe·葉赫) 집단을 제외한 모든 해서여진도 합병한 뒤에 1603년에 허투 알라(Hetu Ala·興京老城)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제까지 여진을 낮게 평가하던 몽골인 가운데 일부 세력이 이때부터 누르하치와의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1593년의 전쟁에서 누르하치에 진 바 있는 코르친을 포함한 칼카(Kalka) 몽골 세력이 1606년에 그에게 ‘공경스러운 한(쿤둘런 한·Kundulen Han)’이라는 존호를 바쳤다. 금나라 멸망 이래로 이 지역에 존재한 몽골과 여진의 관계가 처음으로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 192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압록강 타령’ 일명 ‘혜산진 타령’의 가사집 표지.

이 무렵 일본열도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에 사망한 뒤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1614~1615년의 오사카 전투를 거치며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히데요시가 무너뜨린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고자 간청과 협박을 섞어서 조선 측을 설득하였는데, 협박 가운데에는 다시 조선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만주의 상황을 우려하였지만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한편 명나라도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이 현실화되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따라 해서여진의 잔존 세력인 여허를 지원하여 누르하치를 견제하였다. 누르하치는 시종 명에 저자세를 취해 왔으나 이제 명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1616년에 여허를 제외한 모든 여진 세력의 유력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금국(後金國·Amaga Aisin Gurun) 건국을 선포하고 ‘여러 나라를 기르실 밝은 한(geren gurun be ujire genggiyen han)’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이어 누르하치는 1618년 1월 16일 명나라에 전면전을 선포한다. ‘만주실록’ 권4에서는 이날 아침에 황색과 청색 선이 기우는 달을 꿰뚫는 징조가 나타났다고 하여 이 전쟁을 성화(聖化)한다. 또한 같은 해 4월에 여진군이 명나라를 향해 출발할 때 누르하치는 자신이 명나라에 대해 “일곱 가지 큰 한(恨)(nadan amba koro·七大恨)”을 풀어야 하겠다고 선언하여, 이 전쟁이 외국에 대한 침략 전쟁이 아니라 ‘정당한’ 복수전이라는 명분을 만들어낸다. 일곱 가지 한이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명나라 측이 죽였다든지 명나라가 여허를 도와 자신과 적대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명분을 숫자 7에 맞춘 것이다. 누르하치는 하늘이 자신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자신이 (여허를 제외한) 여진을 통일할 수 있었으며, 이처럼 천명을 받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여허를 명나라가 도와주는 것은 천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만주실록’에 실려 있는 누르하치의 이러한 ‘복수’ 운운 발언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립된 청나라의 만주인 지배세력이 한족의 전통적인 정치 관념을 이용하여 후세에 정교하게 구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피터 퍼듀 교수가 ‘중국의 서진’에서 지적하듯이, 통일 전쟁으로 인해 여진인 사회가 급속하게 중앙집권화되면서 경제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누르하치는 요동반도와 조선을 약탈하여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명나라라는 외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였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고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될 조선과 명을 비난한 바 있다.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를 자신이 소멸시켰으니 감사를 표하는 사절을 보내야 할 것인데 그러지 않았으니 명나라가 잘못된 것이고, 이 문제를 중재해 달라고 조선에 요구했는데 무시했으니 조선이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였다. ‘징비록’에는 쓰시마의 승려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와 회담하던 이덕형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자, 고려가 몽골과 함께 일본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이라고 겐소가 응수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지구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모든 세력은 외부 세력에 대해 자국이 전개하는 전쟁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 누구도 자신들이 탐욕스러워서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열도의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라시아 동부의 정복을 꿈꾸며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촉발된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전쟁은, 이제 명나라와 후금국의 정면 충돌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음 회에서는 유라시아 동북부에서 시작된 이러한 연쇄작용에 다시금 한반도가 휘말려들게 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인용한 ‘만주실록’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의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읽은 텍스트였다. 이 자리를 빌려 센터의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