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에도시대 일본의 숨겨진 기독교인들 - 가쿠레 기리시탄 ( 隠れキリシタン)|

백삼/이한백 2014. 3. 28. 16:30

오늘날 한국에서는 아시아에서 기독교(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교세가 한국만큼 크게 퍼진곳이 거의 없다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자랑스러워 하거나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500년전 동아시아에서 제일 강력한 그리스도교 세력을 자랑하던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임진왜란때 왜장중 한명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기독교 신자였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일본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까지 알현하고 개종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支倉六右/Francisco Felipe Faxicura)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12만명이나 되는 군세를 써서 진압한 시마바라의 난 역시 그리스도교 탄압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엇다. 이와 같은 왕성한 활동은 당시 일본의 그리스도교 세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File:HasekuraPrayer.jpg


하세쿠라 쓰네나가, 로마에서 개종한 이후 (위키피디아)



대부분의 역사책은 일본천통과 함께 그리스도교는 박해받아 사라졌다.. 이런식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 박해로 일본에서 그리스도교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는 외진 시골로 도망가 비밀리에 자신들의 신앙을 수백년간 지켜나갔으며, 이들은 오늘날의 학계에서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즉 숨겨진 키리시탄(16~17세기 일본의 카톨릭 교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라 불린다. 이들은 16세기 서양 선교사들에게 배운 카톨릭 신앙의 요소를 일본 문화와 접목시켜가며 수백년간 자신들만의 매우 독특한 신앙을 발전시켜나갔다.



교황청에 따르면,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숫자는 한때 15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지만, 이와 같은 수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막부에 들키면 십자형이었으니 모든것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며, 이는 이들이 지역적으로 매우 고립되어 다른 지방의 교우들에게 연락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이와 같은 비밀을 요구하는 상황 때문에, 그리고 정통 서방 교회와의 고립 때문에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신앙생활은 매우 특이한 형태를 띄었다.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의 상은 처음에는 일부러 막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부처상이나 미륵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나중에는 본래 모습은 잊혀지고 불교화된 성상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와같은 변화와 동시에 카톨릭 신앙에서 흔히 볼수있는 성인숭배 역시 변질되었는데,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다른 동양인들과 같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 조상들을 천주교의 성인들과 동일시 하였다





미륵화된 성모상 (위키피디아)



십자가의 부처화된 예수 (위키피디아)




무슨 물증 하나라도 잡히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성경조차도 글로 써서 이용할수가 없었다. 성경의 내용은 기리스탄 공동체중에 성직자 역활을 하는 몇몇 사람이 외워서 구전전승였으며, 이들이 죽으면 이들의 아들이 대를 이어 성직자 노릇을 하였다.


이들의 기도는 놀랍게도 라틴어나 스페인어 원형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을 외우는 것과 같은 소리로 변질되었으며, 기리스탄 사제들조차 자신들이 외우는 기도문의 뜻을 몰랐다.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이런식으로 외우면 내용이 변질될수밖에 없는법, 가쿠레 기리스탄들이 전승해온 성경의 내용에는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성경에는 어린 예수가 유대교 사원에서 랍비들과 논쟁하며 이들을 감탄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가쿠레 기리스탄들은 어린 예수는 유대교 사원의 랍비들과 논쟁한게 아니라 불교 승려들과 논쟁하였다고 알고 있었다.


빵이 없으니 카톨릭 신앙의 중심인 성체성사를 모실수도 없었다. 대신 이들은 두명의 성직자들의 서로의 손바닥안에 밥 한숱가락을 놓는 것으로 성체를 대신하였다. 미사에서 성직자가 마시는 포도주는 사케로 대신되었다.





자신들만의 성체의식을 거행하는 가쿠레 기리스탄 성직자들 (카톨릭 교육센터)



19세기, 시마바라의 난으로 그리스도교가 참혹한 피해를 입은지 근 300년이 다되가는 시점에 일본은 다시 개화를 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종교의 자유도 인정되었다. 이번에는 스페인인들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일본에 카톨릭 신앙을 가지고 왔고, 이와 함께 대부분의 가쿠레 기리스탄들도 자신들 신앙의 모체인 로마 카톨릭 교회에 흡수되게 되었다. 이렇게 가쿠레 기리스탄들의 독특한 신앙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수백년의 박해가 해내지 못했던 가쿠레 기리스탄들의 전멸을 기독교의 합법화와 외래 문물이 해낸 것이었다. 















...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1991년에 인류학 학자 크리스탈 웰란이 10년동안의 끈질긴 추적끝에 아직도 가쿠레 기리스탄 교인들을 나가사키 현의 고토섬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수백년동안이나 박해를 피하며 음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 세상이 바뀐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조심스럽게, 남들의 이목을 피하며 자신들만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토섬의 위치 (카톨릭 교육센터)



 


크리스탈 웰란씨 (카톨릭 교육센터)



웰란은 한때 카톨릭 교도였지만 이들을 찾아간 당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불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일본인들처럼 석가모니의 제자를 지향하는 파란눈의 서양인이, 이번에는 포교가 아니라 학문적인 연구를 위해 이들을 찾아갔을 무렵, 이 외딴 섬에서도 가쿠레 기리스탄들의 종교는 멸망 직전에 있었다. 웰란은 가쿠레 기리스탄 성직자 두명을 만났는데, 둘 다 90세 이상의 고령이었고 서로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명의 성직자가 더 있었으나 그는 이미 10년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그 이후로 가쿠레 기리스탄들의 신앙생활도 사실상 정지된 상태였다.



웰란은 이 외딴 섬에서 1년이나 지내며 이들의 신앙생활을 기록하였다. 웰란의 고토섬 체류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들의 오타이야 제사였는데, 이는 바로 가쿠레 기리스탄들의 크리스마스였다. 두명의 사제중 한명은 보수파로써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의식의 단 하나도 바꾸기를 거부하였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마을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크리스마스, 아니 오타이야 제사를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인 의식에 따라 세 잔의 사케와 세그릇의 밥을 내놓았다.



그와 반해 다른 사제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새로 생긴 신도 3명을 위해 옆 마을로 가서 오타이야 제사를 지냈다. 불경의 구절처럼 변형된 라틴어 기도를 제대로 따라하지도 못해 우물거리는 신도들을 차분하게 보면서 그는 좀더 외롭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지내었다.



웰란은 일년동안 모은 연구자료를 가지고 1995년 'Otaiya'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물론 가쿠레 기리스탄에 대한 내용이었다. 일본의 전통종교라 불려도 좋은 가쿠레 기리스탄들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상의 박해와 무관심속에서도 인간의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끈질길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Image:Buddhist statue with hidden cross on back.jpg


부처상 뒤에 숨겨진 십자가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신 http://en.wikipedia.org/wiki/Kakure_Kirishitan

카톨릭 교육센터 http://www.catholiceducation.org/articles/religion/re04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