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10.26 의 사람들

백삼/이한백 2014. 2. 13. 14:18

 

 

 

 

유신의 종말을 고한 총성이 울린 궁정동 안가 나동 건물.

 

유리창으로 전면을 장식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구조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이 외부인에게 최초로 공개된 것은 총격 다음날인 27일 새벽 5시경.

현장 검증을 위해 육군 과학연구소 감시팀이 투입되었다.

 

 

내부 구조도 특이했다.

 

현관을 들어서면

절반 가량을 양어장으로 꾸며놓은 거실이나

 

양어장 위로 설치된 나선형 계단은

2층 김재규 부장의 집무실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거실을 지나

연회실침실로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쭉 들어가서,

아마 여기는 대통령이 연회하고 휴식하는 곳이었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발자국을 보니까

신발자국이 아니고 피를 밟고 왔다갔다 했는데

그 발자국이 스타킹 발자국이었어요.

그래서 아, 여기는 여자가 있었겠구나 하는 추정..."

                                                          - 지장현, 전 육군 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관

 

연회실 옷걸이에는 대통령의 상의가 걸려 있었다.

주머니에는 지갑과 도장, 구두 주걱이 달린 열쇠 고리 등이 있었다.

현관 입구에는 이날 대통령이 신고 온 구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연회장은 총격 직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상 위에는

먹다 남은 양주병, TV 앞에는 기타가,

  

그리고 그 옆에는 유신의 파수꾼을 자처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날 차지철은 김재규가 쏜 첫발에 손목을 맞았고

잠시후 세 번째 총탄에 복부를 관통 당했다.

 

"자기 얼굴에 총을 대니까 당연히 피하려고 그럴 거 아니예요. 사람이 순간적으로...

이렇게 피하면서 자기 얼굴은 안 맞고 여기 손목에 맞았다 이 말이죠.

그리고 (차지철이) 화장실에 도망갔을 때 대통령을 쏜 건데..."

                                                     - 지장현, 전 육군 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관

 

 

두 번째 총탄은 대통령의 가슴을 관통했다.

최고 권력자가 안전가옥에서 가장 믿었던 심복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이다.

 

문제는 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았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연회에 참가했던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증언했다.

 

"김재규가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 불쾌했지...

가령, 대통령이 정보부에서 사전에 막아야지 했을 때 김재규가 "예 이러면,

차지철이 가만히 있어야 되는데 "그렇습니다." 이러거든...

그러니까 김재규가 점점 코너에 몰리지. 그야말로..."

                                                                           -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은 여성들이 연회에 합류한 뒤에도 계속 김재규를 자극했고

이른바 김재규의 욱 하는 성질이 폭발해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이나 국가를 위해 충성할 이런 사람이었어요.

그 순간에 뭐가 좀 돌았을 거예요."

                                                                   -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합수부도 처음엔 무능을 질책 당한 김재규가 저지른 사건으로 몰아갔다.

당시 심수봉은 합수부 조사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투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이는 강요된 진술이었다고 폭로했다.

 

 

"대기실에서 굉장히 분위기가 좋았어요.

거기 조그맣게지만 TV도 틀어놓고.

그때 그게 AFKN이었을 거예요. 

기다리는 동안에 무슨 소리가 크게 났다면 저희한테 들리고 

경호원들이 긴장을 안 하겠어요?

그런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 심수봉, 가수, 10.26 연회 참석

 

심수봉과 신재순이 합류한 것은 연회가 시작된 지 40분후.

연회장 분위기에 대한 진술도 김계원과는 달랐다.

 

"분위기는 좋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봤을 때 대통령도 몇 번 뵈었고, 저를 아주 반가워했고요.

또 차지철씨도 심수봉씨 노래 잘 듣고 있다는 둥 약간 농담도 하면서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노래 좀 듣자고 하셔서 TV를 끄고 제가 먼저 노래를 한 거죠."

                                                                                 - 심수봉, 가수, 10.26 연회 참석

 

심수봉은 이전에도 김재규를 연회에서 만난 적 있었다.

그런데 이날 김재규는 처음부터 여느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김재규 부장과) 초면이 아니기 때문에 반가워서 눈인사를 들어가면서 하잖아요.

그런데 전혀 인사를 받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굉장히 무섭게 입을 꽉 다물고 표정이 없이 있는데 정말 이상했어요. 제가...

(김재규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겠나 제 생각에는..."

                                                                                                           - 심수봉, 가수, 10.26 연회 참석

 

그런 상태로 두어 차례 들락날락 했을 뿐

총을 쏘기 전까지 연회장 분위기는 평온했다는 것이다.

 

"'끄르륵 끄르륵' 하는 소리가 나서

"각하 괜찮으세요?" 신재순이는 앉아있는 채로 괜찮으냐고 번갈아 가면서 물었었는데

(대통령이) 아주 단호하게 괜찮다고 그랬어요."

                                                                           - 심수봉, 가수, 10.26 연회 참석

 

두 발을 쏜 후 김재규의 권총이 고장났다.

김재규는 거실로 나와 궁정동 의전과장 박선호의 권총을 받아들었다.

 

그런 후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 차지철을 향해 한 발을 발사했고

뒤이어 대통령의 후두부에 다시 한 발을 발사했다.

 

대통령은 피격 직후 비서실장 김계원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D.O.A 된 상태로 도착했습니다.

D.O.A라는 게 'death on arrival(도착시 이미 사망)'입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면서

"이 친구들아 D.O.A면 나한테 왜 연락을 해?

수도 병원이나 어디 영안실에 연락해가지고 준비를 해주지.""

                                              - 김병수, 전 국군 서울지구병원장

 

3년간 대통령을 모셨던 김병수는

아래배의 흰 반점을 보고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정적인 사인은 가슴을 관통한 제 1발.

제 2발은 확인 사살 정도의 의미였다.

 

"(총알이) 귀보다 조금 위로 들어가서

이쪽으로 통과해서 왼쪽 상악동(위턱뼈 가운데 공동) 끝에 박혀 있어요.

그게 엑스레이에서 확인이 됐죠."

                                                                            - 김병수, 전 국군 서울지구병원장

 

 

절대 권력 박정희의 사망!

김재규가 쏜 두 발의 총탄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놓았다!

 

 

 

 

"지난 24일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25주기였습니다.

 

당시 김계원 비서실장,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김재규의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김재규는 이날 행동이 민주 회복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계획적인 거사였다는 겁니다.

 

이날 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의전과장 박선호는 갬재규의 대준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였고

수행 비서 박흥준은 육사단장 시절 부관이었습니다.

이외 경비원  이기주, 운전 기사 유성욱 등이 거사에 가담했습니다.

 

 

 

욱 하는 성질에 방아쇠를 당겼다고 보기에는

동원된 인원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 김환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책임프로듀서

 

 

26년 전 현대사를 뒤흔들었던 총성이 울려퍼졌던 궁정동.

 

1993년 문민 정부는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궁정동 안가를 헐어내고 공원을 조성했다.

 

대통령 박정희 등 여섯 명이 사살되었던 나동 건물터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바뀌었다. 

 

사건 당일, 유석문씨는 김재규와 수행비서 박흥주을 태우고 바로 이곳 안가에 도착했었다.

 

 

 

"옆쪽은 전과 좀 다른데,

건물은 예전 그대로야 담까지."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 담당 사무관 

 

 

그런데 궁정동 안가 중 김재규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떠세요? 26년만에 와보시니까?")

글쎄요. 나도 오랜만에 와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그리고 이 건물이 지금까지 있다는 게 신기해.

 

(왜 한 번도 안 오셨어요?)

오고 싶지가 않더라구. 여러 가지가..."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 담당 사무관 

 

궁정동 안가는 청와대로부터 약 5분 거리.

김재규는 매일 오후 이곳 본관 건물 2층에서 사무를 보며 대통령의 호출에 대비했다. 

 

 

 

사건 당일 대통령의 연회가 있다는

통보를 받은 김재규가 본관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20분경.

 

                                 왼쪽 끝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그는 곧장 2층 집무실로 올라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호출함으로써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대통령의 연회를 통보 받은 상태에서

육군참모총장을 불렀던 것이었다.                                                                         

 

 

 

"그날은 제가 혁명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혁명 초부터 육군총장과 접촉해둘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문제는

과연 거사를 염두에 두고

육군참모총장을 불렸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재규는 그해 4월에도 거사를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연회를 통보 받은 상태에서 3군 총장을 불렀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거사를 미뤘다는 것이다.

 

 

 

"그때도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정보부장이 초청한 것을 기분이 나빴다고 해서 돌아갈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 고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육군참모총장을 호출한 후

김재규는 권총을 준비했다.

 

이 사실 또한 계획적인 거사였다는 유력한 증거였다.

 

 

 

본관에서 연회가 열렸던 나동까지는 약 50미터.

김재규는 연회 도중 본관에 준비해둔 권총을 가져가 대통령을 겨냥했다.

 

만약 충동적인 범행이었다면 좀더 가까운 곳의 권총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나동 연회실 2층 김재규의 집무실에도 권총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회장) 2층이 집무실이고 거기 캐비닛에서 총을 발견했어요.

거기 가니까 총이 있었어요."

                                                     - 지장현, 전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관

 

 

 

외견상 유신 독재를 보위하고 있었던 김재규.

그런데 가슴 속에는 남 모르게 민주 회복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김재규는 79년 들어

'자유민주주의' '대의를 위하여' 등 파격적인 내용의 글을 남겼다.

 

"이 나라에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 시켜 놓자,

대통령 각하하고 나하고 있어서의 의리도 소의에 속하는 건 한꺼번에 다 끊어바친다.

대의를 위해서 내 목숨 하나 버려버린다."

                                                                                            - 김재규

 

 

 

김재규가 거사를 준비하는 사이

궁정동 요원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궁정동 운전 기사 김용남은 고양시 능곡 양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양조장은 70년대 초반부터 대통령 전용 막걸리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날(10.26 사건이 있었던 날)은 아마 청와대에서 직접 온 걸로 알고 있어요. 

그냥 정기적으로 가져가니까 신경 안 썼죠.

보통 때하고 똑같이 가져 간 거죠."

                                                            - 박관원, 당시 능곡양조장 사장

 

 

 

또 다른 운전 기사 유성옥은 방석상, 이광철과 함께 동대문 시장을 돌며 장을 봤다.

이들은 전복, 장어, 갈비, 송어 등 당시 돈 6만원어치 가량의 재료를 구입했다.

 

 

 

"잘 드시는 것 없어요. 대개 콩나물 밥 같은 거 잘 드시고 

(술안주로는) 멸치 대가리 떼고 참기름에 볶아 드시는 걸 제일 좋아하셨어요."

                                                             - 김일선, 전 궁정동 안가 요리사

 

 

 

김재규는 측근 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의전과장에게조차 거사를 귀뜸하지 않았다.

 

 

 

궁정동 의전과장 박선호는

이 시각 궁정동 연회에 대통령 시중을 들 여인들을 만났다.

 

그는 이날 여대생 신재순 가수 심수봉을 섭외했다.

프라자호텔에서 신재순을, 뉴내자 호텔에서 심수봉을 만났다.

 

 

 

같은 시각 모처럼 시간이 난 박흥주

구두를 사러 광화문 세종로 에스콰이어 매장에 갔다.

중앙정보부 본청 소속이었기 때문에 연회와 관련 특별한 임무가 없었다.

 

 

 

"박대령이나 나나 항상 365일 눈 감고 잘 때도 마음에 출동 준비하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런 거(신발) 사러 갈 시간이 없어요. 일요일도 없는데.

그러니까 그때 궁정동에서 광화문이 가까우니까 에스콰이어 매장이..."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 담당 사무관

 

 

 

직급이 낮은 부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운전기사 유성옥은 이날 본인의 결혼 청첩장을 들고 출근했다.

아들까지 뒀지만 여건이 안 되어 벼르고 별러 온 결혼식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청첩장 가지고 들어간 날 그런 반란이 일어난 거란 말이예요.

그 사람드이 뭐...김재규가 박대통령 죽인다고 미리 선포하고 갑니까?"

                                                                            - 유성복, 유성옥 둘째 형

 

 

 

7시경, 김재규는 나동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석 중정제2차관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부관을 거쳐 본관에 도착한 김재규는 

이들을 만나 좀더 기다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 후 준비해뒀던 권총을 휴대했다.

 

 

 

이어 측근인 수행비서 박흥주와 박선호 의전과장을 불러 모은 후

거사 계획을 폭로했다.

 

 

 

김재규 :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나라가 잘못되면 다 죽는다. 각오는 돼 있겠지?"

 

 

 

박선호 : "예. 각오가 돼 있습니다."

박흥주 : "...."

 

 

 

박흥주가 주저하자

김재규는 권총을 보여주며 격려했다.

 

 

 

김재규 : "총장과 제2차장보도 와 있다. 오늘 결행한다."

박선호 :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 "그래"

 

 

 

뜻밖에 당황한 박선호는 거사를 연기시키려고 했다.

 

 

 

박선호 : "오늘은 경호원이 너무 많습니다. 다음에 하시죠."

김재규 : " 안 돼. 보안이 샌다. 똑똑한 놈으로 두세 명만 준비시켜."

박선호 : "그럼 30분만 주십시요."

 

 

 

"시간 여유를 안 준 이유, 사실은 걔들도 못 믿은 거예요.

못 믿는다기보다도 오랫동안 정보부장을 해오면서 우리나라에 비밀이란 없다, 누설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단독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 강신옥 변호사, 김재규 박선호 변호

 

 

 

김재규가 준 시간은 단 30분.

그러나 거사 준비는 빈틈없이 완료되었다.

 

박흥주는 유성옥, 이기주와 함께

나동 식당 앞에 재미닌 승용차 안에서 대기했다.

 

김재규의 첫 총성을 신호로

이들은 식당으로 달려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탁탁 총 쏘는 소리가 나니까

이놈들이 정보부 직원이든 경호관이든 요리사든 전혀 상관없이

그냥 밖에서 안으로 대고 마구 쏘아 댄 거죠."

                                                               - 당시 대통령 접객담당 사무관

 

같은 시각 박선호는 나동 대기실에서

청와대 경호관 정인형(경호처장), 안재송(경호부처장)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정인형과 해병대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던 박선호는

다 같이 살자고 호소했으나 안재송이 저항하러 들자 친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단 30분만에 급조된 조직으로 대통령 경호관들을 제압한 궁정동 안가 요원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군사 법정궁정동 안가의 비밀이 언급되는 것을 극력 차단했다.

 

 

"그와 같은 건물은 대여섯 개가 있는데

이것은 각하만이 전용으로 사용하시는 건물로서

그래서 이것을 제가 발표하게 되면 서울 시민이 깜짝 놀라게 될 것이고

여기에는 여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이 다 관련돼 있습니다.

 

그리고 평균 한 달에 각하가 열 번씩 오는데

(피고인 범행 사실에 관해서만...)"

                                                   -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지금까지 언론에 공개된 궁정동 요원은 박선호를 비롯해

당시 법정에 섰던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유석술 등  다섯 명. 

 

이들 중 생존자는

권총을 파묻는 단역을 맡았던 경비원 유석술이 유일했다.

 

 

 

26년이 흘렸지만 유씨는 아직도 10.26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절친한 동료들이 사형을 선고 받는 모습을 지척에서 목격했다.

 

"너무 가슴이 아프지요. 정말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어떻게 보면 기주씨한테는 못된 위치에 있는 거 같기도 하고..."

                                       - 유석술, 당시 궁정동 나동 연회장 정문 경비 

 

아직도 건물 경비를 서고 있는 유씨.

그러나 10.26 이전까지 그는 대통령의 비밀스런 연회장을 경비하던 특별한 신분이었다.

 

"대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실장님이나 (중정)부장님이나 경호실장님이나 같이 오실 때

 

그 외에는 대통령 혼자 오실 때(소연회)가 더 많죠."

                                                                     - 유석술, 당시 궁정동 나동 연회장 정문 경비 

 

베일에 가려졌던 궁정동  안가가 일부나마 언론에 공개된 것은 1993년.

사건 현장인 궁정동 나 건물은 이미 1980년에 철거된 상태였다.

 

 

 

당시 공개된 건물은 다동으로 불리던 한옥.

 

완공된 지 두어 달만에 10.26이 터지는 바람에

박정희가 한 번도 이용해보지 못한 시설이었다.

 

"우리 중앙정보부에서도 어디에 뭐가 있다는 건 알지만

위치나 그런 거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죠.

 

왜냐하면 각하에 대한 보안 유지가 있기 때문에

청와대 수행경호원도 그곳(안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 노수길, 당시 궁정동 경비원

 

 

궁정동 안전가옥은 모두 다섯 채.

가옥마다 별도로 관리자를 두어 이동을 제한했다.

 

서로간에 철저히 보안이 유지되는 가운데

이 모든 시설을 박선호 의전과장 단 한사람이 총괄 관리했다.

 

"궁정동이라고 하더라도

궁정동 근무지가 다 같지는 않습니다.

 

본관 근무자는 부장님 모시는 걸로 끝나고

신관이나 세검동은 대통령 모시는 걸로 끝납니다.

완전히 다르죠."

                                                                        - 노수길, 당시 궁정동 경비원

 

그런데 근무지는 달라도 대통령의 연회 횟수에 대한 진술은 비슷했다.

 

 

 

연회 통보가 오면 모든 건물에 비상이 걸리고

비번 근무자들까지 호출되었기 때문이다.

 

궁정동 안가의 최대 목적은

대통령의 사생활을 은밀히 보장하는 것이었다.

 

"1월부터 10월까지 다 합쳐봐야 대행사는 3~4번인가 그래요.

(소행사 포함) 9년 전체 행사수는 약 64회 정도 될거예요."

                                                                                 - 노수길, 당시 궁정동 경비원

 

("혼자 오셨을 때 소행사)는 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혼자 오실 때는

경호실장이 따로 밖에 계시고

 

(대통령은) 안에서 술 드시고

시중드는 아가씨들 있고..."

                                               - 유석술, 당시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정문 경비

 

궁정동 안가에는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의 출입도 극도로 제한되었다.

대통령을 수행해 온 몇몇 경호원들조차 일단 궁정동에 들어서면

외곽 경호를 궁정동 요원들에게 맡기고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통령) 경호를 전부 다 궁정동에서 경비를 해주니까

(경호관들이) 오면 옆 방에서 자기네끼리 잡담하면서 놀죠.

전부 한 집안 식구들이나 다름 없으니까..."

                                                                       - 김일선, 전 궁정동 안가 요리사

 

"극비의 장소죠.

김계원씨도 들어가면 경호원 없이 누가 안내하면 따라가지,

그만큼 대통령의 경호원들에게도 철저한 비밀로.

결국은 그 왕은 박선호지."

                                                               - 강신옥 변호사, 김재규. 박선호 변호

 

궁정동 안가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경호가 무력화 되는 유일한 장소였다.

 

더구나 청와대 경호원을 대신해

대통령을 경호한 사람들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심복들이었다.

 

궁정동 안가야말로

유신 독재의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서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김재규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것이다.

 

"궁정동 요원들의 임무는

청와대 경호원들을 대신해 대통령을 경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엄격한 신원 조회를 통해 선발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은 김재규의 명령 한 마디에 대통령을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더구나 이날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박선호는 예비역 해군 대령,

박흥주은 육사 출신의 현역 육군 대령이었습니다.

 

충성심에 관한 한 의심의 여지가 없을 법한 사람들이

단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거사에 가담한 것입니다."

                                          - 김환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책임프로듀서

 

박흥주은 사건 관련자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

상관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느냐, 국가 원수를 보호해야 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박흥주은 딸에게 보낸 유서에서

인생을 살면서 숱하게 마주칠 선택의 순간에

슬기로운 선택을 할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박흥주이 절대절명의 선택의 기로에 서기까지 김재규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육사18기 선두 주자였던 박흥주은

1978년 대령 진급과 함께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로 임명되었다.

 

"아직 대령 계급장은 달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비서로 갔기 때문에

사복을 맞추면서 자기 부인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요.

 

대령 계급장을 붙이고 군복을 입고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 허 전 목사, 박흥주 육사 동기 

 

 

박흥주는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라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힘입는 자리였지만

그가 살던 곳은 짚차도 들어가지 않는 행담동 달동네 꼭대기였다.

 

이웃 주민들은 그를 소탈하게 인정 있는 이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화시장 다닌다고 했어요.

놀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 분이 거기서 그런 커다란 거사를 해가지고 총을 들고 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죠.

그분은 제가 보기로는 아주 평범한 분인데 그런 분이 어떻게 거사에 가담해가지고..."

                                                                                                - 김종권, 이웃 주민

 

박흥주는 가난한 집안의 희망이기도 했다.

79년 당시에도 부모는 빈민가에, 형은 탄광 경비로 일하는 형편이었다.

 

박흥주는 중위 시절, 6사단장 김재규의 전속 부관으로 차출되었다.

부관을 그만둔 이후에도 부부 동반으로 김재규를 찾아가는 등 인연을 유지했다.

 

                                     뒤편 왼쪽에서 두 번째 박흥주 대령

 

"저도 뽑혔더라면 박흥주 대령이 갔던 길을 갔을지 모르죠.

군에서 직속상관에게 충성하는 길이 곧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다, 이렇게 배웠기 때문에

 

적어도 한 번 섬긴 게 아니고 두 번, 세 번 섬겼다고 한다면

그분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길이 군인의 길이 아니겠는가?"

                                                                        - 허 전, 목사, 박흥주 육사 동기

 

단순한 상관이 아니라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할 것을 밝히며 가세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박흥주는 선뜻 따라 나선 박선호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자네들 각오는 돼 있겠지? 이렇게 한 사실이 있죠?")

"네" 

 

("그때 피고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각오가 돼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피고인 박흥주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대답이 없었습니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죠?")

"네. 침통한 얼굴로 그랬습니다."

                                                 -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명령에 복종하든 거부하든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박흥주는 평소 피지 않던 담배를 잇따라 피우며 고민했다.

 

육군총장이 참여한 거사.

부장에 대한 신뢰.

 

"밖깥에 쳐다보니까 박대령의 얼굴이 딱 나타나더라구.

나하고 시선이 마주쳤는데 나보고 나오라는 거야.

가니까, 나갈 준비를 해라 해서

아, 회식이 벌써 끝났을까 했죠."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박흥주가 명령을 수행한 배경에는

김재규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박흥주는 최근 공개된 옥중 수행록에서

김재규를 대통령의 일급 참모이자 참다운 일꾼이었다고 단정지었다.

 

중정부장 김재규는 유신 체제의 버팀목이었고

헌신적으로 대통령을 보좌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행을 하셨지만

평소에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저 개인적으로는 의심을 안 합니다.

지극히 대통령을 잘 모시겠다는 평소의 언행으로 봐서."

                                                 - 김학호,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그런데 79년 접어들면서 유신 독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미국과는 주한 미군 철수, 핵개발 등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18년 장기 집권에 대한 저항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부산에 내려가 봤더니

학생 일부가 소동을 피운 게 아니고

전체 학생들이 민중과 더불어 소위 민란을 일으킨 상황입디다.

그게 끔찍한 이야기거든."

                                                                                               - 고 이재전, 전 경호실 차장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

김영삼과 야당 신민당의 사주를 받은

소수 사회 불만 세력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했다.

 

"부마사태가 급박했는데

매시간 보고서가 올라와 읽어봤는데

 

주로 부마사태가 어떻게 왜곡되어 청와대에 왔느냐 하면

부산시위는 깡패, 부랑아, 그리고 그때 한참 등장하는 거 있었죠 목욕탕 때밀이, 구두닦이,

뭐 이런 사람들이, 일부 사회 저 하위 불만 계층의 폭동이라는 것이었죠." 

                                                                                               - 임응환, 당시 청와대 경호관

 

반면 김재규와 박흥준은 부마사태가 터진 직후

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민심 이반이 심각하며

부산시위가 5대 도시로 확대될거라고

청와대 안보 소회의에서 보고했다.

 

"부산 가서 직접 돌아다녀보니까

시민들이 물도 떠다주고 같이 합세를 하는데, 이것은 심각하다.

 

이것이 자칫 잘못되면 다 죽을 수도 있는데 하시며

상당히 겁을 먹고 하는 소릴 들었어요."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사건이 일어난 10월 26일 연회 초반의 화제도 부마사태였다.

 

이날 대통령과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김재규는 온건한 대응을 주장했다.

 

"부산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김영삼이가 선동해서 그렇게 된거다,

대통령은 그냥 철두철미하게 머리에 그렇게 생각이 박혀 있었어요.

 

그걸 이제 차지철이는 그렇다고 하고,

김재규는 안 그렇다고 하고,

그게 그날의 근본적인 문제죠."

                                                            -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 말은 밖에 안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각하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하겠다" 하니까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라고 하는 것도 희생을 시켰는데

우리 대한민국은 100만, 200만 명 희생한다고 문제될 거 있느냐"고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들으면 소름이 끼칠 그런 이야기입니다."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수행해 부산을 돌아본 박흥주

궁정동 사무실에서 수시로 보고서를 접했던 박선호

김재규의 시국 인식에 공감했다.

 

"김재규 부장님께서 모든 것을 민주 회복을 위해서

직접 건의를 하셔도 안 되고

 

또한 부산과 같은 그런 상황이

서울에서 긴박하게 일어나게 돼 있던 그런 직전에서

 

이것이 막아지지 못했을 때는

옛날에 4.19는 어린 아이 장난에 불과하다고 하셨으므로로..."

                                                                                - 박선호, 전 중정 의전과장

 

 

이 같은 내적인 공감대 위에

궁정동 경비원의 강한 규율이 있었기 때문에 김재규의 거사가 가능했다.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목숨 바쳐 수행한다는 것이

궁정동 요원들의 철칙이었다.

 

"내가 그 순간 거기 있었으면 나도 그렇게 됐겠죠.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고,

그 자리에 있었으면 (명령을 따랐기에) 다 죽었을 거예요."

                                                                                         - 당시 궁정동 신관 경비원         

 

"저 한테도 똑같이 지시를 내렸다고 그러면 거절할 수가 없었을 것 같애요."

                                                                                     - 노수길, 당시 궁정동 경비원    

 

"절대 복종이지, 못한다고 그러면 그만 둬야죠."

                                                                          - 유석술, 당시 궁정동 나동 정문 경비

 

 

 

"신군부는 10.26을 '계획적인 범죄'였다고 발표했습니다.

 

김재규의 주장과 다른 점은

민주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향하던 중

 

이곳 3.1고가도에서 육군본부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른바 '운명의 U턴'이었습니다.

 

자신의 본거지를 버리고

호랑이굴이나 다름없는 육군본부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계획없는 우발적 범행의 증거로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 욕심에 눈이 먼 바보같은 짓으로 해석했습니다.

 

이곳에서 박흥주 대령은 두 번째 선택을 하게 됩니다.

                                                                 - 김환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책임프로듀서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는 맨발로 본관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식당에서 대기 중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찾았다.

 

"내 팔을 붙잡으면서 큰일났다고,

빨리 같이 가자고 현관으로 내 손을 붙잡고 나가니까 나도 따라 나갔죠.

부마사태나 다른 큰 사태가 서울이나 이 부근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 고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차에 오른 김재규는 남산행을 외친 후

차안에서 정승화에게 대통령 사망 소식을 알렸다.

 

 

 

"차안에서 김재규에게 무슨 일이냐고 자꾸 추긍을 하니까

김재규가 엄지를 위로 세우면서 "이분이 돌아가셨다"

 

어떻게 돌아가셨냐고 하니까

"저격 당해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아주 당황을 하면서..."

                                                            - 고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원래 가려던 목적지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였다.

 

 

 

 

그러나 3.1고가도로를 지나

중앙정보부로 우회전 하려는 찰나

김재규가 동승했던 박흥주에게 운명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3.1고가도로에서 남산쪽으로 올라가는 도로상이었습니다.

그 고가도로 상에서 "박비서관 어디로 가지? 부? 육본?"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참모총장께서 그때 말을 가로채서 육본으로 가자고 말하는 것 같아서

저도 "육본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 박흥주, 전 중정부장 수행비서

 

 

김재규가 박흥주에게 "부? 육본?"을 물어봤을 때는

이미 차가 남산으로 접어든 시점.  

 

김재규는 차를 돌리라고 지시했고

 

차는 유턴하여

육군본부에 도착했다.

 

당시 김재규는 신발도 신지 않은 상태.

거사 실패가 예견되는 순간이었다.

 

"박흥주 대령에게 신발 달라고 해서 그 신발을 신고 들어갔어요.

박흥주는 나 보고 신발을 달라고 그러더라구.

그런데 내 신발을 벗어줬는데 박흥주 대령이 나보다 발이 커요.

나는 좀 발이 적거든.

그래서 내 신발을 꺽어 신고 따라간거요."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김재규의 유턴은 우발적인 범행이란 증거로 곧잘 활용되었다.

욱 하는 성질에 사건을 저지른 후

당황한 나머지 그만 호랑이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김재규에게 우리 어디로 가냐고 하니까 남산으로 간다고 하여

남산으로 가서 어떡하냐 육본으로 가자 했죠.

 

김재규는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지 계획적으로 한 게 아니란 것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인정할 수 있거든."

                                                                       - 고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자기가 남산으로 갔으면

주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걸 육군 대위만 되어도 알 수 있는 건데,

그걸 저버리고 육군본부로 따라갔다는 거,

 

이런 부분을 봤을 때

그분은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생각되죠."

                                                                                - 임응환, 전 청와대 경호관

 

재판에서 박흥주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사전에 논의가 된 줄로 알고

별 생각없이 답변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진술은 김재규의 거사가 정권 찬탈 기도로 몰릴 것을 우려한

박흥주 대령의 위증이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육군참모총장이 그런 이야길 하니까

박흥주 대령이 "군을 움직이는 것은 육본이 나으니까 그리 가시죠." 이렇게 하니까,

"그래, 그럼 그리 돌려라." 이렇게 답변이 떨어진거야.

 

("군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군을 움직이는 게 아니고

군 동향을 알기 위해서는 육본으로 가는 게 낫다는 것이었지."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문제는 군부에 대한 김재규의 오판이었다.

 

김재규는 대통령이 제거된 상태에서

정승화를 움직여 군부를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육군 총장으로 하여금 계엄을 선포하고 나면

육군 총장께서 3권을 다 장악하게 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육군 총장으로 하여금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바꾸는

이것이 제 혁명의 기본 구상입니다.

 

("그럼 만약에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나는 틀림없이....

 

("그건 피고인의 기대에 불과한데,

예를 들면 육참총장이 불응할 경우는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불응은 아니하리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과신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추천으로 인사에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승화는 남산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이미 김재규와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있었다.

 

"대통령이 저격 당한 막중한 순간에

김재규 부장이 주는 걸 확인도 하지않고 먹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

                                                                                  - 정승화 회고록 45쪽

 

"(김재규 부장이) 아마 갈증이 좀 났던 모양이에요.

육본에 가는 길에, 사탕을 하나 잡수시면서

정승화 총장한테 "하나 드시오" 하고 주더라고요.

 

다음날 내가 차 안을 정돈하려고 보니까

정장군님께서 앉으셨던 자리 앞에 그걸 그대로 펴보지도 않고

속지가 싸여 있는 것을 그대로 앞에 다 버렸더라고요."

                                           -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정승화는 당시 독살 당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군부와 연결이 없는 상태에서

남산이나 육본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데

남산으로 들어갔다고 그래서 뭐가 되겠어요.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군을 움직여야 하는데

남산을 다 장악한다고 될 리가..."

                                                                 - 유석문

 

"왜, 어떻게 조직적으로 했겠어요.

자기 혼자 하는 수 밖에 없고, 누구와 상의할 수도 없죠.

대통령 목숨을 빼앗은 그것이 혁명의 목적이자 핵심으로 끝난 거예요."

                                                       - 강신옥 변호사, 김재규. 박선호 변호

 

부하들은 육참총장이 함께 있다는 김재규의 말을 끝까지 믿었다.

 

 

 

김재규에게 사후 지침을 받지 못했던 박선호는

부하들에게 청와대 병력이 몰려올 경우 응사할 것과 

김재규가 사용했던 권총을 파묻을 것을 지시했다.

 

("총, 슬리퍼를 이기주씨가 줄 때, 총소리하고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예. 그거를 생각은 했죠.

이 총을 가지고 누구를 쏘았는지까지는 모르는데 사용을 했겠다는 생각은 했죠.

나중에 보니까 부장님이 각하를 쏜 그 총인 같더라고요."

                                                         - 유석술, 궁정동 경비원, 종기 은닉 혐의로 3년형

 

 

 

박선호는 재판 과정 내내 김재규의 거사를 옹호했다.

그러나 섭섭함 또한 숨기지 않았다.

 

"박선호는 섭섭해 했어요.

그 후에 할 일을 나한테 알려줬으면 내가 깨끗이 잘 할 수 있었는데,

 

나한테 박정희 대통령 시신을 옮기지 말라든지

사후 조치를 해줬어야 하는데

그걸 안해줘서 박선호와 박흥주는 내 방황하다가 만 거죠..."

                                                                                                - 강신옥 변호사

 

8시 40분.

김재규가 육본 각료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밖에서 대기 중이던 박흥주는 부하들에게 군병력 이동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던 중 중정부장 경호원들이 무장해제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상황이 잘못 되었음을 직감했다.

 

육군본부를 벗어나

한남동 중정부장 본관 앞에서

김재규의 호출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일체 말이 없는 거야. 불안하고 어떤 공포에 싸인,

뭐 흔히들 하는 말로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이었어요."  

                                                                               -  유석문

 

마지막임을 직감한 박흥주는 행담동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불안한 마음에 집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문앞에서 부인과 작별했다.

 

집안에서 돌아와서는 운전 기사에게 자신은 총알을 다 소비했다며

유씨의 총을 달라고 했다.

 

"(박흥주 대령한테)

무엇인지 몰라도 내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는 데까지 가봐라,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봤는데)

그 때까지 답변을 안 해요.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나보고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걱정이 없잖소? 총을 쏜 죄도 없고 아무 죄도 없잖소" 하면서

굉장히 고뇌하고, 굉장히 후회를 했어요."

                                                                                                            - 유석문

 

한강변에서 은신하던 박흥주는 27일 새벽5시경 라디오 방송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대통령이 유고라는 뉴스를 듣고 

이후 자진 출두했다.

 

 

 

1980년 3월 6일.

박흥주 대령은 현역 군인이었으므로 단심으로 사형 집행.

 

"이런 일이 있다면 난 다시 한다. 또 하겠다.

그 사람이 마지막에 죽을 때 "대한민국 만세! 육군 만세! 꽝꽝"

                                                                                              - 당시 육군형무소 교도관

 

절대 권력자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국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그림자는 길고도 어두웠다.

 

그는 쓰러졌지만

그가 양성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김재규와 부하들을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은인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반인륜적인 무리로 몰아세웠다.

 

김재규는

'지금은 역적이 되지만

늦어도 내년 봄이면 다 풀린다'는 유언을 남겼다.

 

 

 

광주 학살이 진행되던 80년 5월 24일.

김재규 등 다섯 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80. 9. 1.

 

"대통령 각하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민주화를 짓밟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김재규가 기대했던 내년 봄은 영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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