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미나미 지로(조선의 히틀러라고 불림)

백삼/이한백 2014. 1. 23. 11:09

미나미 지로(조선의 히틀러라고 불림)

[ 南次郞(남차랑) ]

요약
일본의 군인, 제7대 조선총독(재임 1936~1941). 조선총독으로 재임한 6년 동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여 일본어 상용·창씨개명(創氏改名)·지원병제도 실시 등으로 한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 출생-사망

    1874 ~ 1955

  • 국적

    일본

  • 활동분야

    군사, 정치

  • 출생지

    일본 오이타현(大分縣)

오이타현[大分縣]에서 출생하였다. 1903년 육군대학 졸업 후, 육군대학 교관·기병연대장·육군성 과장·중국주둔군 사령관·육군사관학교장·제16사단장·조선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30년 육군대장, 1931년 육군대신, 1934년 관동군 사령관, 1936년 예편과 함께 조선총독이 되었고, 그 후 추밀원 고문·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중국 침략전쟁의 공동모의 및 실시 책임으로 종신금고형을 받았으나 가출소 후 사망하였다. 조선총독으로 재임한 6년 동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여 일본어 상용·창씨개명(創氏改名)·지원병제도 실시 등으로 한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역참조항목

일본육군사관학교, 내선일체,

 


 

-인물로 본 일제 조선지배 40년<정일성 저>[7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읽고-

조선의 히틀러 --미나미 지로<1936.08.05~1942.05.28>까지

역대총독 중 가장 악명 높은 총독이다. 5년 9개월 동안 조선민족의 정신과 육체를 송두리째 앗아간 포악한 총독이다. 그가 한 가장 악독한 짓으로는 0 고유의 성씨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였고, 0 조선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조선의 젊은이들과 여성들을 지원병과 정신대로 전쟁터에 내몰았고, 0 전국 곳곳에 신사를 지어 참배하게 하고, 0 황국신민서사를 만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맹세하게 하였는가 하면, 0 조선, 동아일보를 폐간하여 입을 막았으며, 0 청와대에 총독관저를 지은 것도 미나미이었다. 그는 결국 종전 뒤 열린 극동군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미나미는 우가키의 뒤를 이어 받아서 육군 대신이 되었고, 또 조선총독이 되는 등 보스 우가키의 뒤를 이어 받은 사람이다. 그는 일본 육군의 구테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뮤러난 7명의 육군대장 중의 하나이었지만, 워낙 탄탄한 우가키군벌의 후계자로 오히려 자기의 마음대로 자리를 옮겨 앉은 형국이 되었다. 우가키가 일본 수상이 되어서 들어가면서 미나미에게 조산을 맡긴 셈이 된 것이다.

미나미는 1874년생으로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러일전쟁에 참여, 지나주둔군사령관인 우가키의 추천으로 육군참모차장, 육군대신으로 우가키는 미나미에게 자리를 물려주곤 하였던 것이다. 1936년 8월 10일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소식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으면서 [일정기 말소]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미나미는 총독으로 부임을 하였다. 결국 8명의 임원이 퇴사와 함께 언론활동 금지 조치를 받으면서 동아, 조선중앙일보 등이 정간 폐간이 돼기도 하였다. 부임하자마자 하늘도 노했는지, 사상 유례없는 폭우가 쏟아져, 2000명에 가까운 사망, 실종자를 내는 등 수해를 입었다.

1937년 6월6일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안창호를 비롯한 181명을 체포하여 지식인 길들이기와 언론 입막기 작전을 벌였다. 기독청년면려회가기독교 청년들이 할 일을 담은 인쇄물을 돌린 것을 핑계삼았다. 기나긴 감옥생활 도안 고문과 설득으로 많은 회원들이 강압에 못이겨 전향을 한 뒤 일제에 협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광수, 주요한, 홍난파,정인과, 이용설 등이 대표적인인물들이다.

이것은 만주국을 세워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고 만주국을 손아귀에 쥔 다음 중국 본토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루거우차오라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에서 일본병사가 사라졌다고 트집을 잡아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베이징,텐진, 상하이까지 손에 넣자 2,3개월이면 중국을 완전 점령한다고 큰소릴 쳤으나, 장기전으로 바뀌고 말았다.

각면에 신사를 만들고, 참배하게 하고, 학교에서도 신배와 노력봉사를 하게 하였도, 일장기를 국기로 내걸게 하고, 군대 위문품 수집운동, 전쟁에 필ㅇ한 청제를 구하기 위해 철재 수집운동, 금속수집운동으로 가정의 솥,냄비, 수저젓가락은 물론 제기까지 빼앗아갔다.

육군지원병제, 조선어 폐지,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욱군징병제 등으로 우리 국민드를 괴롭히고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내걸고 우리 국민들에게 전쟁물자 생산과 전쟁 소모품으로 내몰았던 가장 악독한 총독이었다.

우리 국민을 일본 청천의 국민인 [황국신민]이라고 강제하면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람으로서 할 일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약속을 [황국신민서사]라는 맹세문을 만들어서 외우고 실천하게 만든 것은 우리 민족인 김대우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공으로 전북 지사가 되고 하고, 나중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접촉을 하여 행정권이양문제를 협의하기도 하는 등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다.

미나미는 만주와 중국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사람으로, 중일전쟁이 터지자 우리나라에서 물자를 대고 전쟁을 수행할 젊은이들을 징병으로 몰아가기도 하였다.

처음 조선의 젊은이를 일본군으로 징집을 꺼리기도 하였지만, 일본군과 같은 부대에 배치하므로 해서 따로 부대를 만들어 두었다가 반란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배치를 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이렇게 우리 젊은이를 끌어다가 전쟁으로 내몰면서 [서양제국주의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떠들기도 하였다.

또한 창씨개명은 [종래의 중국식 이름에 대한 반성이자, 조선 본래의 존통을 이어 받는 일이다.]라는 궤변을 늘어 놓기도 하였다.


 

 


 

일본어상용제는 학교 수업부터, 일반 생활에서 관공서에서는 일본어로 말하지 않으면 서류 접수를 못하게 하고, 학교 입학도 못시킨다는 등 협박을 일삼았고, 학생들은 일본어사용 시범 학생, 일본의 상용가정 등의 이름을 부어서 일본말을 쓰도록 만들어 깄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일본어 사용카드를 만들어 주고 서로 조선어를 쓰면 지적하고 빼앗기 게임을 시켜서 늘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학교생활을 할 수가 없게 만들기도 하였다. 가정에도 ‘국어사용모범가정’ ‘국어교육 모범가정’ 등의 표시를 해서 일본어 사용이 자랑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 각면내에 있는 학교를 이용하여 ‘일본어강습소‘를 설치하여 야학으로 일본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더구나 이런 일은 조선인 관리들에게 맡겨 더 악랄하게 들볶기도 하였다. 이원보->전라북도지사, 현영섭->신도를 통해 조선어를 전폐하지 않으면 안된다-> 황도학회 이사, 김두정->황민으로서 소질과 실력을 배양하자, 김문집->우리의 완정독립은 일장춘몽이다-> 3,100게 초등학교에 <국어강습소>를 설치 강습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1939년 10월 1일 <국민징용령>, 1939년 11월10일<창씨개명:조선민사령>이 잇달아 공포되었다.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일본 본토에서도 반대의 소리가 높았었지만 미나미는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은 이런 조선통치의 공로로 수상이 되려는 꿈은 도리어 조선총독의 자리에서도 쫓겨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일본 성씨는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조상의 묘가 있는 곳, 태어난 곳, 고향, 등 지명과 무사,옥호<집아ㅣ름>,직업명, 영주의 이름 등으로 자유스럽고 개명 또한 자유스러워서 성씨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도 통계가 잡히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성씨를 본래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저선의 성씨를 대신하라고 하니 잘 따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는 가장 큰 결심을 말 할 때에 “성을 바꾸겠다.”고 할 정도가 아닌가?

그리하여 창씨를 반대하여서 진안 설진청씨는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곡성 유건영씨는 자결, 동래 석두씨는 ‘개새끼’랑는 성씨를 만들기도 하였고, 미나미 지로는 미나미가의 둘째 아들이란 이름이므로 미나미 다로<미나미의 큰 아들:조선총독의 형>이라 이름을 지어서 반대를 한 사람도 있을 정도이었다.

     2013.10.22.22:12’<18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