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프란체스코

백삼/이한백 2021. 3. 1. 18:57

프란체스코

출생사망

1181/82, 스폴레토 아시시
1226. 10. 3, 아시시

요약 1228년 7월 15일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0월 4일. 프란체스코 수도회 및 수녀회 설립자, 13세기초 교회 개혁운동 지도자.
(영). Saint Francis of Assisi. (이). San Francesco d'Assisi. 세례명은 Giovanni, 훗날에는 Francesco. 본명은 Francesco di Pietro di Bernar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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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프란체스코 수도회 회칙
  4. 환상과 십자가 성흔

개요

자선·청빈과 강력한 지도력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불러모았고, 가장 존경받는 종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시에나의 카테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주요 수호성인이다.

초기생애와 경력

의류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문 배경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태어날 때 아버지는 사업차 프랑스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에게 조반니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했다. 아버지는 돌아온 뒤 그의 이름을 프란체스코로 바꾸어주었고, 그로써 본명은 프란체스코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가 되었다. 산조르조 성당 근처에 있는 학교에서 라틴어 쓰기와 읽기를 배웠고, 나중에는 프랑스어와 문학, 특히 음유시인들의 문학을 배웠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하지는 못했으나 매우 좋아했고, 프랑스어로 노래를 하기도 했다.

청년시절에 도덕적으로 크게 빗나간 일은 없었던 듯하며, 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세속성 때문에 아시시 청년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의 전쟁에 참여했고, 거의 1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가 중병에 걸린 채 풀려났다. 병에서 회복된 뒤 1205년말 아폴리아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여 일어난 젠틸레 백작 휘하의 교황군에 입대하려고 했으나, 스폴레토에서 환상 또는 꿈을 통해 아시시로 되돌아가 새로운 기사직 소명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시시로 돌아오자마자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은거하면서 기도에 전념했다.

그외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그가 회개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아시시 근처 동굴에서 기도하는 도중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다는 이야기, 로마를 순례하는 동안 가난을 체험했으며, 누더기를 걸치고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걸인들 틈에 섞여 구걸을 했다는 이야기, 평소에는 늘 질색하던 문둥이에게 적선을 할 뿐 아니라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어느날 아시시 성문 밖에 허물어진 채 있던 산다미아노 부속 예배당에 들어갔다가 제단 위에 걸려 있던 십자가상에서 "프란체스코야, 가서 네가 보는 대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내 집을 다시 세워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급히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옷을 많이 가지고 나와 말을 타고 이웃마을 폴리뇨로 가서 옷과 말을 판 뒤 산다미아노 성당의 사제에게 이 돈을 주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아버지는 먼저 그를 집으로 데려간 다음 관청에 넘겼다. 관청의 소환명령에 따르지 않자 주교 앞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가 고소를 하기도 전에 프란체스코는 아무 말 없이 옷을 모두 벗어서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고행자가 입는 속옷만 입은 채 "지금까지 당신을 땅에서의 내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놀란 주교가 던져준 겉옷을 입고서 아시시 위에 있는 수바시오 산 숲 속으로 달려갔다.

프란체스코는 물질과 가족관계를 포기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다. 산다미아노 성당을 복원해 사도 베드로에게 봉헌한 다음, 아시시 남부 평원에 있는 오늘날 유명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산타마리아 델리지 안젤리)라는 조그만 부속예배당 '포르지운콜라'를 복원했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에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는 동안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사명으로 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마태 10:9~11).

프란체스코 수도회 회칙

프란체스코는 평신도로서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위해 간단한 생활규율을 작성했다. 1209년 이 탁발수사(托鉢修士:걸인 생활을 하던 제자들을 이렇게 불렀음)들의 수가 12명에 이르자 이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로 갔다. 교황은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이들의 회칙을 듣고서 칭찬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4월 16일에 있었던 이 사건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수사들은 실제로 어떠한 종류의 재산도 지니지 않고 오직 포르지운콜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거리의 설교자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옴브리아에서, 수가 늘어난 뒤에는 이탈리아 전지역에서 설교하고 활동했다. 현존하지 않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초기 회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을 새로운 삶의 목표로 삼았다.

아마 역사상 프란체스코만큼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기 위해, 또한 그리스도가 쓴 방법대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곧이곧대로 이행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노력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점을 무시하면 이 성자를 자연을 사랑한 사람, 사회개혁가, 순회설교자, 청빈을 사랑한 사람 등 균형을 잃은 모습으로 묘사하게 된다.

물론 청빈에 대한 사랑이 그의 정신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 시대 사람들도 우의적으로 쓴 작품인 〈거룩한 교제 Sacrum Commercium〉에서처럼 청빈을 그의 '부인'이라 부르거나, 아시시에 있는 '산프란체스코 지하교회'에 있는 조토의 프레스코(벽화)에서처럼 그의 '신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것은 단순히 외적인 가난이 아니라 자아(自我) 전체에 대한 부정이었다(필립 2:7에서처럼). 그는 모든 자연을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이자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간주했다. 모든 피조물을 자기의 '형제'와 '자매'라 불렀고, '피조물의 아가(雅歌)'(좀더 부적절하게 '피조물 찬가' 또는 '태양의 아가'라고도 함)에서는 '형제 태양'과 '누이 달', 바람과 물, 심지어 '누이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자기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하던 질병에게 '누이들'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고행을 할 때 '당나귀 형제, 즉 육체'에게 부당하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대신해서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깊은 형제애를 가지고 동료들을 감쌌다.

1212년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로 알려진 여자들을 위한 제2의 수도회를 세웠다.

맨 먼저 훗날 아시시의 성 클라라로 알려진 아시시의 귀부인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수도복을 준 다음 산다미아노 성당을 그녀와 몇몇 동료들의 거처로 내주었는데, 아시시 여자들이 이곳에서 그녀와 합류했다. 나중에는 가정과 친척을 떠날 수 없는 여자들을 위해 '형제자매들의 제3 고행수도회'를 세웠는데(1221경), 이 수도회는 세속을 등지거나 수사 서약을 하지 않고서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생활 원칙을 실천할 수 있는 평신도 성심회(誠心會)였다.

탁발수사들의 수가 늘어나자 이 수도회는 이탈리아 밖으로 퍼져나갔다. 아마 1212년 늦봄 프란체스코는 성지(聖地)를 향해 떠났으나, 아드리아 해 동쪽 연안에서 난파 당해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왔고, 1~2년 뒤에는 스페인의 무어족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병에 걸려 포기했으며, 1217년에는 프랑스로 가겠다고 신청했다가 추기경 세니의 우골리노(훗날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이탈리아에서 수도회를 지도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1219년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포위공격하고 있던 이집트로 갔다. 사라센 군인들의 진영으로 들어가 술탄(이슬람 군주)에게 설교하여 감화를 끼침으로써 팔레스타인 성지들을 방문하도록 허락받았다고 한다.

이탈리아 탁발수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되돌아왔다.

당시 남자 수도회는 수사들이 5,000명 이상 되었으며, 다른 어느 수도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규모가 커지고 있었는데도 늘어만 가는 수사들을 이끄는 장치란 프란체스코의 모범과 간략한 생활규율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수도회의 실제적 문제들을 전담시키기 위해 그는 피에트로 카타니를 자신의 대리자로 임명했고, 1221년 피에트로가 일찍 죽자 코르토나의 엘리아스를 선택했다.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새로운 탁발수사들을 위해 1년의 시험기간(수련기간)을 두는 법을 제정해주도록 요청했고, 기존의 생활규율을 확대·개정했다.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에게 새로운 회칙을 승인받은 뒤 외적인 일에서 점차 손을 떼었다.

환상과 십자가 성흔

1224년 여름 아시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라베르나(알베르니아) 산상 은거지로 가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서 '성모 마리아 승천축일'(8. 15)을 지키고, '성 미카엘 축일'(9. 29)을 준비했다.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한 뒤 그 답을 얻기 위해 복음서들을 펼쳤는데, 3번이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부분을 펼쳤다. '성 십자가 현양축일'(聖十字架顯揚祝日:9. 14)에 가까운 어느날 아침 갑자기 하늘 높은 곳에서 자기에게 내려오는 인물을 보았다. 1257~74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장을 지낸 13세기의 중요한 사상가 성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썼다.

"그것이 프란체스코 위에 머물자 그는 그것이 사람이면서 여섯 날개를 단 치품천사(熾品天使)임을 알아보았다.

팔은 펼쳐들었고, 발은 모았으며, 몸은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두 날개는 얼굴 위에 펼쳐 있었고, 두 날개는 공중에 떠 있느라고 펼쳐 있었으며, 두 날개는 몸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얼굴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프란체스코를 향해 잔잔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가슴은 서로 엇갈리는 감정으로 가득 찼다. 이 환상을 본 것은 큰 기쁨이었으나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깊은 슬픔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환상에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하느님의 섭리로 자기가 육체적인 순교는 아니지만 정신과 마음의 순종을 통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처럼 될 것임을 깨달았다. 환상이 사라지자 내면에 벅찬 사랑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도 놀라운 십자가 성흔들이 생겼다."

프란체스코는 생애 나머지 기간 동안 성흔들, 즉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닮은 흔적들을 감추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수사 엘리아스는 회람으로 수도회에 그 성흔에 대해서 알렸고, 훗날 프란체스코의 고해신부이자 가까운 동료로서 그 사건을 기록으로 남긴 수사 레오는 프란체스코가 죽을 때 십자가에서 막 끌어내린 사람과 같았다고 말했다. 프란체스코는 성흔을 받은 뒤 2년 동안 끊임없이 고통을 당했고,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로 살았다(동방에서 눈병에 걸린 바 있음). 리에티에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고, 시에나에 잠시 머문 뒤 아시시로 돌아와 포르지운콜라 수도원에서 죽었다.

아시시에 있는 산조르조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 엘리아스가 그를 기념하여 아시시 서쪽 끝에 세우고 있던 대성당의 지하교회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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