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선봉사지 칠층석탑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빌딩 1층 옥내 주차 공간 구석에는 오래된 석탑 하나가 아무런 안내판도 없이 강화유리에 둘러싸여 있다. 긴 세월을 견디느라 비바람에 모서리 곳곳이 깎였고 기단부(탑 아래 기초를 이루는 부분)와 1층 탑신석이 훼손된 상태지만 옛 모습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다. 가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저게 뭐냐'고 물어볼 뿐, 탑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탑의 정체는 '칠곡 선봉사지(僊鳳寺址) 칠층석탑'. 11~12세기 고려 초기에 제작된 높이 2.3m의 보물급 문화재다. 선봉사는 대각국사 의천을 기리는 '대각국사비'(보물 251호)가 있는 천태종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지난 6월 논문 '칠곡 선봉사지의 사적과 원위치에 대한 시론'을 쓴 엄기표 단국대 교수는 "옥개석(석탑의 지붕돌) 아래쪽에 커튼처럼 연꽃무늬를 새기는 치석(돌을 다듬음) 수법이 유일하게 확인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출토지가 확실한 문화재"라고 말했다. 이 탑이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선봉사가 조선 후기에 폐사된 이후 일제강점기엔 절 유물이 밭 위에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칠곡 출신으로 문화재 애호가였던 창랑 장택상(1893~ 1969) 전 국무총리는 이 소식을 듣고 훼손이나 반출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1932년 무너져 흩어진 석탑을 수습해 안양 별장으로 옮겨 조립했고, 1960년대 초 서울 신길동의 셋째 딸 장병혜(전 미국 하와이대·시튼홀대 교수)씨 집으로 옮겼다.
1963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장택상은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선봉사지 칠층석탑을 미국에 보내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의 케네디 무덤 앞에 세우려 했다. 장택상은 영국 유학 시절 주영(駐英) 미국 대사였던 케네디 대통령의 부친과 친분이 있었다. '이 기회에 우리 문화재를 세계에 알리자'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최순우·진홍섭·정영호 등 문화재 전문가들이 실물을 조사했고, 이들이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특색 있는 고려 석탑'임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1964년 1월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석탑은 일단 장병혜씨가 살던 하와이로 옮겨졌고, 케네디가(家)와 이전 협의가 진행됐다. 이때 또 다른 선봉사지 출토 유물이 함께 하와이로 갔는데, 장택상이 늘 머리맡에 둔 최고의 애장품이었다는 고려 초의 금동보살좌상(높이 14.2㎝)이었다. 6·25전쟁 중 화재로 일부 파손되고 퇴색됐지만 고려 초의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이후로 석탑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장병혜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1968년이 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밝혔다.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이 그리스 부호 오나시스와 재혼한다고 발표하자, 격분한 장택상이 '탑을 보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꾼 것이다. 장택상은 이듬해 별세했다. 1971년 장택상이 소장했던 문화재 88점이 영남대에 기증됐지만 미국에 있던 선봉사지 칠층석탑과 금동보살좌상은 여기서 빠졌다. 1973년 장병혜씨가 시튼홀대로 직장을 옮기면서 석탑과 불상은 다시 뉴저지주로 이사하게 됐다.
석탑과 불상은 1998년 국내로 돌아왔다. 장병혜씨는 "마땅히 석탑을 둘 곳이 없어서 지인 소유의 양재동 빌딩에 옮겨 놓았고, 불상은 자택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장씨는 "이 귀중한 자료를 좀 더 많은 국민이 볼 수 있는 자리에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적절한 새 소장자와 소장처를 찾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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