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서비홍 1895-1953/중국

백삼/이한백 2018. 1. 30. 08:41

 

 

서비홍(Xu Beihong 徐悲鴻, 쉬 베이홍, 1895-1953)

“홀로 편견을 견지하며(獨持偏見), 뭐든지 내 고집대로 하겠다(一意孤行)”

“명예와 금전을 위한 창작을 하지 않고, 세상에 아부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 - 서비홍

 

서비홍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미래를 고뇌하며 중국의 화단을 두 어깨에 받치고 있던 거대한 화가였습니다.

 

서비홍은 가난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미술을 배우고 22살 때엔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베이징대학에서 교수가 됩니다.

그 뒤 다시 2년 뒤엔 프랑스의 에콜 데 보자르로 유학을 가 유화와 드로잉을 배우게 됩니다.

 

파리에서 귀국한 뒤 1928년에 북경대 국립예술학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1929년엔 난징 국립중앙예술계 주임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 중국의 중국 미술원 원장이 됨으로서 중국 현대미술계의 거목이자 수많은 제자를 키워낸 중국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높은 지위와 명예만 획득한데 그친 것이 아니라 현대중국미술전을 기획하여 서유럽과 러시아연방을 돌며 순회 전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때는 동남아시아를 순회하며 전시를 하여 거기서 모인 자금을 중불전쟁(1884~1885), 중일전쟁(1894~1895), 항일투쟁 등으로 피폐해진 중국사회에 쏟아 부었습니다.

 

또한 개인전시회도 계획하여 아시아 전역을 돌았는데, 여기서 모인 자금으로도 전후 중국사회재건을 위한 기금을 조성했죠.

 

서비홍은 중국수묵화와 서양식유화 양 분야 모두에서 대가라 할 수 있을 만큼 특출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근대화 시기의 중국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서구문화, 특히 서구미술에 대해서 경멸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구의 선진 무기나 기술도입에는 우호적이었던 분위기와는 달리 문화부문에서는 중국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렇듯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중국 전통과 서구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양식 간에 빚어지는 긴장감이 팽팽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비홍은 “중국전통의 좋은 것은 살리고, 신통치 않은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채워서 서구의 회화와 융합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중국화 개량론(中國畵改良論)을 발표하여 보수적인 중국 화단을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그는 전통 수묵화에 주력하였는데, 서구의 선원근감과 제작법을 도입하여 중국식 붓과 묵으로 새로운 형태의 중국화를 탄생시켰습니다.

또한 서비홍은 중국 서사적 테마로 기념비적인 유화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첫 화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서비홍은 화마(畫馬)로도 유명한데 그가 그린 말은 마치 액자 밖을 뛰쳐나올 듯한 운동감과 박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새로 수립되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인민들이 다시 힘차게 질주하길 바라는 서비홍의 염원이 담겨 있는듯합니다.

 

영화배우 성룡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은 없지만 서비홍의 작품만은 물려주겠다 했을 정도로 서비홍은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화가입니다.

서비홍이 유학시절 그렸던 서양화와 그의 대표적인 중국화 작품을 차례대로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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