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순체 새김돌 1점 발견
10세기 고려초 유일본 판명
"조선시대 이전 천자문 처음"
[한겨레]
“허, 이거 천자문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유일본이에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수화기에서 불교문화재 전문가인 고경 스님(송광사 성보박물관장)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해 11월초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의 박찬문 팀장은 스님의 전화를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년 전부터 조사해온 서울 도봉산 기슭의 고려시대 고찰 영국사터 출토품들 가운데 정교한 글자들이 새겨진 돌덩이(석각편) 6점의 판독을 부탁했는데, 그중 한점이 1000여년 전 국내 최고의 천자문 실물로 판명됐다는 내용이었다.
10세기께 고려 초기 것으로 판명된 이 천자문 석각은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의 조사 당시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연구소 쪽이 스님 설명을 듣고 석각을 살펴보니 5~6세기 중국 양나라 문인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 250구 가운데 163구와 165구, 167구의 앞구절 일부가 새겨진 것으로 드러났다. ‘다스림은 농사로서 밑바탕을 삼는다’는 뜻의 163구 ‘治本於農’(치본어농)의 ‘治本…’ 부분과 165구 ‘남쪽 이랑에 나가 일을 한다’는 뜻의 ‘俶載南畝’(숙재남무)의 ‘俶載…’, 167구 ‘익은 곡식에 구실을 매기고 햇것을 공물로 바친다’는 뜻의 ‘稅熟貢新’(세숙공신)의 ‘稅熟…’ 부분이 반듯하고 골격 잡힌 해서 글씨체로 표기되어 있었다. 고경 스님은 “석각 글씨를 여러번 보다 천자문 뒤쪽에서 본 글귀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갖고 다니는 천자문 색인과 대조해보니 꼭 들어맞았다”며 “국내 천자문 실물은 조선시대 이전의 판본이 없어 획기적인 국가문화재급 발견”이라고 했다.
서예사가인 이완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 유행한 당나라 명필 구양순의 전형적인 서체이고, 함께 발견된 고려 석경(돌에 새긴 불경)과 서풍, 새김 방식, 재질도 같아 고려초 유물이 확실하다”며 “글귀 구성을 볼 때 1줄에 8줄씩 새긴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절에서 승려들의 한자 학습을 위해 썼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국내 학계는 주흥사의 <천자문>이 한반도 삼국에 곧장 전해졌다고 짐작해왔다. 일본사서 <일본서기>에는 3세기 백제 박사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주흥사의 <천자문>보다 일러 다른 종류의 천자문을 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천자문 실물의 경우 널리 알려진 명필 한호의 <석봉천자문>(1583년 초간)을 비롯해 조선시대 판본들만 전해져왔고 삼국·고려시대 것들은 전무했다. 15세기 안평대군의 해서·초서본과 사육신 박팽년이 썼다는 초서본이 가장 오래된 글씨본으로 꼽혀왔는데, 후대 계속 판각돼 쓰였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1575년 펴낸 <광주판 천자문>(일본 도쿄대 소장)이 꼽혀왔으나 이번 석각본 발견으로 천자문 실물의 역사는 500년 이상 올라가게 됐다.
연구소 쪽은 새로 판독된 천자문 석각을 지난 12일 한국목간학회 발표회에서 학계에 공개했다. 이날 자리에서 천자문 석각을 검토한 석경 연구자 조미영 박사(원광대)는 “서체를 볼 때 천자문 석각을 새긴 시기가 통일신라 때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 학계에 새로운 논란도 예상된다.
연구소는 이와 함께 2012년 발굴 당시 천자문 석각과 같이 나온 다른 석각 3점이 <묘법연화경>을 새긴 고려시대 유일한 석경임을 밝혀냈으며, 2017년 출토품 가운데 경전과 교리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변상도’로 추정되는, 연꽃잎무늬(연판문)가 새겨진 석각 1점도 추가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 남은 고대 석경은 구례 화엄사의 <화엄석경>과 경주 창림사터에서 나온 <법화석경>, 경주 남산 칠불암에서 나온 <금강석경>뿐인데, 모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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