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하란사(1875~1919)

백삼/이한백 2016. 10. 10. 07:41

 

하란사 [河蘭史,1875~1919]

 

photographer Unidentified

 

조선 최초의 여자유학생, 여자 미국학사, 유관순의 스승

 

하란사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것을 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하지만 공부하기 위해 찾아간 이화학당은 입학을 거부했다.

 

하란사가 기혼여성인 데다 유력한 집안이라는 게 이유였다. 하란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 학교를 찾았고 하루는 교장 룰루 프라이 앞에서 등잔불을 직접 끄면서 말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의연한 조선 여성의 발언 앞에 프라이 교장도 어쩔 수 없었다. 학비는 자비 부담하겠다는 조건으로 하란사를 입학시켰다. 이 일화는 선교사였던 프라이 교장이 미국에 보낸 보고서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1875년(고종 12)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원래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그밖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하란사라는 이름은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해 세례를 받은 뒤 영어 이름 ‘Nancy’(낸시)를 음역해 ‘蘭史’로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인천별감으로 있던 하상기의 후처가 되었으나 가정에만 매이지 않고 서구 문명을 접하는 한편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교사로 있던 룰루 프라이(1868-1921)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기혼이라는 이유로 수 차례 거절 당했으나 굽히지않고 청해 입학할 수 있었다.뒤로 가면 조혼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재학생의 결혼을 금했지만 이화학당 초기에는 기혼여성도 입학할 수 있었다.

 

하란사는 그 중에도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이화학당 시절 란사(낸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이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 딸을 낳았는데 하상기 전처의 아들 하구룡의 아내인 자신의 며느리에게 아기를 맡기고 학업을 계속 하였다. 하란사가 재학 중에 남편 하상기의 정성은 정말 지극하였다,

 

저녁 들어올 시간이 넘으면 하녀에게 마님의 진지를 가져다 주어라 하여 하녀는 소반에 식사를 차려 담아 학교까지 날라다 주었다고도 한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 기독교를 믿게 되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는 나중에 전도사까지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몄으며 하란사는 1896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게 된다.

 

당시의 이화학당 졸업식은 따로 없었고 소정의 학업을 마칠 때 쯤이면 학교에서 졸업생들을 좋은 집안으로 소개하여 결혼을 하면 혼인증서를 써 주는 것이 졸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하며 몇 년 후 정식으로 졸업식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란사는 이미 기혼이라 그런 과정도 없이 학업을 마쳤다.

 

학업을 더 하고자 유학을 생각하게 되고 남편 하상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최초 자비 여성 유학생이 된다. 하란사는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서 게이오 대학에서 1년을 공부하고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오하이오주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안 대학에 들어가 1906년 한국여성 최초의 문학사(B.A) 학위를 받으면서 졸업하였다.

 

졸업한 뒤 일본 유학 길에 올라 도쿄[東京] 게이오의숙대학교[慶應義塾大學校]에서 수학한 뒤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1900년 미국에 유학해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대학에 입학, 1906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여자 미국 학사로 알려졌다. 웨슬리언 대학교는 감리교 재단의 대학으로서 미국 전역에 걸쳐 있는데, 그 가운데 하란사가 수학한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 대학교는 1842년에 건립되고, 교양 교육이 유명한 학교이다.

 

특히 1907년부터 이화학당의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한편, 국권피탈 뒤에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은둔 중에 있던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9년 6월 파리강화회담에 의친왕(義親王)을 파송할 비밀계획을 추진하다 고종의 승하로 실패하자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한 뒤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결국 죽었는데, 단순한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부가 개설되자 그 당시 이대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가 되며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게 된다. 이화에 있으며 몇 번에 걸쳐 미국을 오가기도 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을 도와 영어와 성서를 가르치면서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이후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자모회를 구성해 가정의학·육아법 등의 지도는 물론, 계몽강연을 통해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11년부터는 터틀(O.M. Tuttle)과 함께 이화의 지교枝校)인 서대문 여학교, 애오개(아현)여학교 등 9개 학교의 지도까지 맡았다고 하며 몇 군데 교회를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 사역도 하였다고 한다.

 

하란사는 호랑이 사감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하란사 사감에게 욕을 먹지 않은 학생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화 학생의 자치모임인 이문회도 이끌었는데 유관순이 이문회 출신이었다고 한다.

 

1915년 하란사는 딸 자옥(세례명은 도로시)이 이화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는데 갑자기 죽고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은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로 이듬해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 때 미국 전역에 다니며 강연을 하고 교포들의 후원금을 모아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1918년 정동교회에 기증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었으나 아쉽게도 6.25 전쟁 중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미국을 오가며 그 당시 이슈가 되었던 민족자결주의로 하란사도 그때의 조선의 처지를 미국등 각국과 각계에 알리는 등 독립운동에도 힘을 썼으며 고종과 엄비가 궁중 예물을 주며 독립운동 군자금에 써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19년 고종이 곧 있을 파리강화회의에 한일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보내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자 적임자를 찾았는데 그 때 의친왕과 친분이 있던 하란사를 불러 그 서류를 전해주었으나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게 되어 실행을 못하게 되었다. 하란사는 고종과 엄비와도 많은 만남을 가졌으며 자문역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하란사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어느 교민이 하는 만찬에 초대되어 갔는데 그 때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게 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 때 하란사의 나이는 한창 일할 시기인 45세였다.

 

나중에 장례식에 참석하고 온 선교사 벡커(A.L.Becker)는 그녀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다고 하여 이는 독살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누구에겐가 타살을 당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까지 하였던 스파이 배정자가 일본의 사주를 받아 하란사를 독살하였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다.

 

한 번은 윤치호가 한국의 여성교육을 비판하며 여학교 학생들은 요리, 빨래, 다림질 등 살림도 모르고 시어머니에게 순종하는 것도 모른다고 비판하자 하란사는 가정 일에 불평이 나오는 것은 타당하다고 인정할지라도 알아야 할 것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여학교 졸업생이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가 될 수 있는 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반박하였다.

 

하란사는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였으나 받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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