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의 낙인
다산 정약용
그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사상가 반열에 올랐다. 2012년 유네스코는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는 정약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실용적 학풍을 의미하는 '실학'이라는 말이 나오면 바로 정약용을 떠올릴 정도다.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그의 저작의 광대함, 학문의 폭과 깊이 외에도, 우리는 18년간이나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 화성 건축에 크게 공헌한 사실 등 그의 삶의 영욕에 대해 대략 알고 있다.
정약용의 삶은 조선 후기라는 사회의 모순과 가능성을 축소한 지도와 같다. 그의 정치적 좌절이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적, 학문적 한계와 모순을 보여 준다면 그가 이룬 사상적 성취는 청대의 학풍인 고증학, 중국에 들어온 서양 학술인 서학,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고대 유학 등 당대의 사상 인자를 창조적으로 변용하고 종합해 새롭게 재창조 할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사상적 개방성을 보여준다.
지금의 우리는 이 양면을 다 볼 수 있지만 정약용의 시대에는 그럴 수 없었다.
청년 정약용, 정조를 만나다
정약용은 스무 살 때 서울에 올라와 과거 공부에 돌입했고, 스물두 살에 초시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어간다. 이 때 정조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후 성균관에서 치른 매 시험에서 승승장구하며 정조의 눈에 든다. 정조는 정약용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와 다양한 방식으로 토론하는 한편 그를 자기의 정치적 구상을 도울 중요한 인물로 발탁한다. 심지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기 위해 정약용이 고향에 돌아가 있었을 때에도 정조는 그를 불러들일 정도였다. 정약용을 만난 정조는 수원 화성 건축의 중요한 책임을 정약용에게 맡긴다. 물론 정약용은 정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약용은 정조가 하사한 서학서 가운데 기계에 관련된 책을 바탕으로 '거중기'라는 기계를 만드는 등 화성 건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조는 정약용이 서른아홉에 유배되지 직전까지 정약용의 최대 후원자였다.
거중기 모습 및 수원 화성
정조의 죽음은 정약용이 내리막길에 서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유배 이전에도 조선에서 천주교는 사회를 위협하는 이단으로 치부되었고 정약용 역시 천주교 신앙 여부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반대파들의 견제를 막아 주던 이는 정조였다. 정약용은 동부승지가 된 뒤에도 천주교를 접했다는 공격을 받고 사직하기도 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정조는 그를 신뢰했고 결국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801년 신유사화(신유박해)가 일어남으로써 정약용의 정치적 생명도 끝나고 말았다.
《천주실의》, 다른 사유의 시작
스물세 살의 전도유망한 태학생(조선시대에, 성균관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유생. 주로 장의 이하 생원과 진사를 통틀어 이른다.)이었던 청년 정약용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바로 광암 이벽 이다. 이벽은 중국에 들어온 서양 사람들이 여러 책을 썼는데 그 속에 놀라운 진리가 숨어있다고 이야기 했다. 이벽은 그 책 속에 이 세상은 '천주' 또는 '상제'라고 불리는 신이 창조한 것이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했다. 그 책들은 《천주실의》, 《칠극》 등의 서학서였다.
서학서란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기독교와 서양 철학, 과학을 소개하기 위해 중국어로 번역한 책으로 중국은 물론 조선에까지 들어와 조선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기록에 의하면 이벽은 1779년 정약용의 형 정약전, 정약종, 매형 이승훈 등이 참여한 강학회에 눈 오는 밤길을 뚫고 찾아갔다고 한다. 열흘간의 강학회는 주자학의 중요한 문제들을 토론하는 연구의 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학서를 함께 읽고 토론했던 새로운 학문의 토론장이기도 했다. 이 강학회를 계기로 이벽은 서학에서 전하는 서교 즉 천주교로 기울었고 이후 주변에 천주교를 알려 나갔다.
이벽을 따르던 사람 중의 하나가 정약용이었다. 이벽과의 토론과 배움을 통해 습득한 서학의 여러 이론들은 정약용의 사상 안에 깊이 내면화되었고 그의 사상적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외래의 사상과 종교는 그의 삶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천주교에 발을 들였다는 꼬리표가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아 18년간의 긴 유배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조선에 들어온 서양의 학술과 천주교는 18세기 조선의 정치적 갈등과 사상적 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변수였다. 천주교의 유입은 조선 사회를 내부에서 변동시켜 나갔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신,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영혼의 존재, 선악에 대한 보상과 징벌로서의 천당지옥은 유학이나 불교 등 전통적인 관념과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그러나 우상 숭배라는 명목으로 조상 제사를 금하는 천주교의 전교 정책은 조선 사회에서 큰 갈등을 낳았다. 낯선 외래의 사상과 종교는 18세기 조선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이 내파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었다.
사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정약용 스스로 천주교를 떠났다고 밝혔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핵심이 유학을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서학서에 담긴 새로운 세계관과 지식들이 정약용 철학의 중요한 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에게 서학은 현대적 개념의 '종교'였다기보다는 새로운 학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리(理)를 넘어 상제(上帝)로 18년의 유배 기간동안 정약용은 자신의 학술을 완성해 나가는 작업을 한다. 그는 유배가 끝난 이후에 언젠가 자신의 학문이 세상에 쓰일 날을 기대하며 저술을 정리했다. 그의 저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기나긴 유배 기간 동안에 남긴 그의 저작들은 그를 조선 최고의 학자로 만들어 주었다. 유배 기간 동안 정약용은 유학의 경전들을 검토하고 연구서를 새롭게 썼고 사회 제도 개혁에 관한 글을 썼다. 역사나 지리, 언어나 기기, 의학에 이르기까지 정약용이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의 사상은 백성들의 생활에 이롭게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이용후생과 국가와 사회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학문적 경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린다.
그의 사상적 기획과 실천은 단순히 있는 것들을 모아 정리하는 집대성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배지의 좁은 방에서 조선을 넘어 중국으로, 중국을 넘어 서양의 학문까지 수용한 조선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그는 당대에 갇혀있었지만, 평생에 걸친 그의 학문적 기획과 노력은 다음 시대에 이르러서야 본래에 걸맞은 평가를 받았다. 이로써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이 시대와 불화했던 것이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증명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