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 윤공단, 임진왜란 발발 즉시 왜군과 다대포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윤흥신을 기려 만들어진 제단이다. |
ⓒ 정만진 |
성실한 역사여행자는 윤공단이 지정 문화재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무처럼 문화재청 누리집을 방문한다. 누리집은 윤공단의 주소를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1동 산24번지'라고 알려준다. 이를 'Tmap'에 입력하면 '다대1동 산24-1'이 떠오른다. 지번에 '산'이 등장하는 문화재를 찾아다닐 때면 이런 경우가 많았지... 하고 생각하며 '안내 시작'을 누른다. 그런데 자동차는 돌고 돌아 산 아래 막다른 골목에 닿고, 회차할 공간도 없어서 200m 이상을 후진한 뒤에야 겨우 돌아나오게 된다.
▲ 윤공단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홍살문. 10미터쯤 올라가면 오른쪽 10m에 선정비 군, 위 40m에 당집, 위 50m에 윤공단이 있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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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의 '다대1동 산24번지'와 현지 안내판의 '다대1동 1234번지'는 전혀 다른 곳이다. '다대1동 산24번지'로는 도저히 윤공단을 찾을 수가 없다. 자동차를 몰고 줄곧 방황하던 역사여행자는 답답한 마음에서 '윤공단'을 Tmap에 입력해 본다. 그랬더니 곧장 '윤공단 앞' 지도가 화면에 뜬다. 산 아래가 아니라 대도로변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윤공단의 주소를 틀리게 공지한 것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윤공단의 주소를 잘못 공지하고 있듯이, 조선 조정도 윤흥신을 비롯한 다대포 장졸들의 장렬한 전사에 대해 그들이 죽고 164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현창하기 시작했다. <부산의 문화재>(부산직할시, 1982)에 따르면, 1761년(영조 37) 경상감사 조엄(趙?)은 윤흥신의 다대포 전투에 관한 '비교적 자세히 기록된 믿을 만한 문헌(필자 주: 구사맹의 <조망록>을 지칭)을 입수, 조정에 포상을 요청'했다.
윤흥신 기리는 일에 줄곧 노력한 조엄
조엄과 고구마 |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 1777년(정조1)에 타계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고구마를 우리나라에 도입한 인물로 특히 유명하다. 풍양(豊壤)조씨인 조엄은 동래부사, 평안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통신사로서 일본을 다녀오면서 견문을 기록한 <해사일기(海?日記)>가 전해지고 있다. 조엄이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때는 1763년이다. 그는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면서 재배법과 보관법도 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이 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일을 면했다. 그가 해사일기에 '일본인들이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라고 기록한 데 근거하여 그 이후 "고구마"라 부르게 되었다. |
그러나 윤흥신은 비록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기는 했지만 그 이후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 조엄의 포상 요청은 다대포 전투의 실상을 세상에 새롭게, 크게 알리는 첫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757년(영조 33), 윤흥신의 순절에 관심이 많았던 조엄은 <다대포첨사 윤공 전망사적서(戰亡事蹟敍)>에도 다대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조엄은 '내가 <징비록>을 본 바에는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역전하여 전사하였다고 하고, <재조번방지>에는 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을 함락하고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했다.'면서 역사서에 전해지는 윤흥신에 대해 진지하게 언급했다.
이어서 그는 '<징비록>은 선조 조의 정승 류성룡이 지은 것이고, <재조번장지>도 동양위(선조의 부마 신익성) 윤자(대를 이을 아들) 신경이 지은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쳤을터이니 믿을 만한 것'이라면서 '본인이 동래부에 부임하여 충렬사에 참배한즉 송상현, 정발만 모셔져 있고, 심지어 향리와 노비까지 제사지내고 있으나 윤공만 제외되어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다.'라고 밝혀두었다.
▲ 다대포전투를 그린 기록화(부산 충렬사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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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은 자신이 통신사 임무 수행시 종사관으로 따랐던 이해문(李海文)이 1764년 11월 다대포첨사로 부임할 때에도 윤흥신의 일을 종이에 적어주었다. 이해문은 조엄이 써 준 글을 '벽에 걸어둔 채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했다(揭壁又將竪碑, 조엄의 후손 조진실이 첨사윤공흥신순절비에 남긴 표현).'
寺樓一上世緣虛 절 누각에 올라보니 세상 인연 공허한데
黃菊丹楓任所如 누런 국화 붉은 단풍 지천으로 피었구나
勝景梵魚東賞後 범어사 아름다운 경치 동쪽에서 구경하고
流光候雁北來初 기러기 날아오는 물빛 북쪽에서 감상하네
喧添鼓角三叉浪 삼차수 물가에는 고각 소리 요란하지만
羅立兒孫七點? 칠점산 봉우리들은 손자들처럼 늘어 서 있고
仙去百年雲水地 나는 지금 신선이 떠난 지 오랜 운수사에 있네
하지만 이해문은 운수사(雲水寺)를 노래한 시는 오늘날까지 남겼지만 미처 윤흥신을 기리는 비석은 세우지 못했다. 무관이면서도 문장과 행정 업무에 능통하여 임금과 조정의 큰 신임을 받았던 이해문은 미처 비를 건립하기도 전에 승진하여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비는 동래부사 홍종응(洪鐘應)이 1841년(헌종 7)에 세웠다. 홍종응은 '첨사 윤공 흥신 순절비(僉使尹公興信殉節碑)'에 조엄의 후손 조진실(趙鎭實)이 자신에게 윤흥신의 비석을 건립하는 데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히면서 '충신을 드러내고 절의를 표창하는(闡忠表節) 일은 신하의 책임(守臣之責)'이므로 '(조진실의 뜻을 좇아) 즐거이 함께 성사시켰다(逐樂與之成).'라고 기록해두었다.
형 윤흥신과 아우 윤흥제, 그리고 군사들 마침내 모두 숨지고
비문에 따르면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몰시킨 일본군은 군대를 나누어 동래읍성과 다대포진을 공격했다. 첫날(15일)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적을 물리쳤다.' 일단 적이 물러가자 군사(軍事, 참모)가 첨사 윤흥신 앞에 나와 '적이 반드시 전군을 동원하여 몰려올 것이니 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 다대포첨사와 갑옷과 투구(부산 충렬사 진열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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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 '적들이 공에게 다가와 시퍼런 칼날이 마구 쏟아지니(敵逼公 白刃亂下) 이복동생 흥제가 공을 감싸안고 있다가 함께 죽었다(興悌抱公同死).' 그런데 흥제는 죽은 뒤에도 형을 '팔로 단단히 부여잡고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握固終不釋). 그래서 결국 한 관에 넣어 함께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逐同棺而?). 어찌 이토록 기이하고 장렬할까(何其奇且烈也)!'
윤공단은 1970년 12월 5일 현 위치로 옮겨졌다. 본래는 윤흥신이 전사한 다대객관(현 다대초등학교 교내)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현창 시설을 크게 확장하면서 새 터를 잡았다. 지금의 윤공단 자리는 도로에서 제단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60m에 이르고, 울창한 솔숲이 짙은 녹음을 사시사철 드리우고 있어 외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선열들을 기리는 현창 시설로는 아주 적절한 공간으로 느껴진다.
특히 제단으로 올라가는 60여m 계단 초입에 설치된 많은 선정비들도 윤공단의 현창 시설다운 분위기를 북돋우는 데 크게 일조를 하고 있다. 첨사 이승운, 첨사 이동식, 관찰사 이경재, 관찰사 홍종영, 진리 한광국, 관찰사 서헌순, 병조판서 민응식, 첨사 정제빈, 첨사 김정근, 겸목관 이득형, 겸감목관 고도성, 겸감목관 구정환 등을 기리는 14기의 선정비가 숲속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도시 확장 와중에 제 자리를 잃게된 비석들을 이곳에 모아둔 것이다.
제단에 닿아보면, 중앙에 높이 180cm, 넓이 60cm의 '첨사윤공흥신순절비'가 있고, 좌우로 '의사윤흥제비(義士尹興悌碑)'와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가 세워져 있다. 제단을 응시하노라니 문득, 동생 윤흥제의 비가 형 윤흥신의 비를 두 팔로 감싸안은 듯한 자세로 서 있으면 더욱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아니, 비석으로는 그것이 어렵겠고, 누군가가 현대식 조형물을 세워 그 일을 이루어준다면 좋으리라. 윤흥신을 기리는 비석이 속히 세워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 조진실이 순절비에 '이공(이해문)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夫慕義如李候者)'라는 바람을 적었고, 그래서 홍종응이 나타났듯이, 나도 윤공단 앞에서 참배를 드리면서 그런 소망을 빌어보는 것이다.
▲ 윤공단 올라가는 계단의 초입부에 세워져 있는 14기의 선정비들. 윤공단의 현창시설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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