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스크랩] 한국사학계가 100 년 전 대한제국의 압록강.백산을 모를 수가 있을까?

백삼/이한백 2015. 11. 30. 17:57

1910 년 멸망한 대한제국의 북쪽 경계는 지금의 압록강, 지금의 백두산, 지금의 두만강을 잇는 선이였을까? 

 

아니다.

후조선 중기 성호 이익과 이중환은 지관들의 말이라고 하며 백산의 위치를 `해좌사향`한다고 표현했었다. 하지만 지금 백두산은 해좌하지도 않고 사향하지도 않는다.

 

해좌사향이란 해亥 곧 11 시 방향에 앉아서 사巳인 5 시 방향으로 뻗어있는 백산 지맥인 한반도 척추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결국 후조선 시기의 백산, 백두산은 한반도 척추를 기준으로 축丑 방향 곧 1 시 방향에 있는 지금의 백두산 위치에 있지 않았었고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른다는 압록강도 당연히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였다. 따라서 현 한국사학계는 100 년 전 대한제국의 북쪽 강역을 모르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705 년 프랑스인 기욤 드릴이 제도했다는 <인디아.중국 지도>에 묘사된 당시의 후조선 북쪽 강역도 엄연하게 지금의 란하까지로 표시되어 있다.

 

이뿐인가?

서국의 25 개 정사 지리지나 정사급 역사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어떻게 100 여년 전 대한제국의 북쪽 경계선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1910 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왜구日帝倭寇는 1917~1918 년 제도된 <중국여도>의 각 개별도를 `도표`를 작성하여 묘사하는 지역을 지정하고 이 `도표`를 통하여 지도를 조작하고 지명을 이동시켰던 것입니다. 한 예로 중국 하북성 노룡 지역을 제도한 `노룡`도는 서쪽으로는 북경 지역을 제도한 `북경`도와 연결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지금의 요동반도 지역을 묘사한 `여순`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표시한 것이 `도표`인데 개별도인 `노룡`도에 묘사된 지역과 `여순`도에 묘사된 지역은 서로 연결되지도 않으며 또한 두 개별도의 축척도 명확하게 다르다. 

 

즉 지금의 란하 최하류 서쪽 강안 지역을 묘사한 `노룡`도와 지금의 요동반도 중반 이남 지역을 제도한 `여순`도를 같은 축척으로 보이게끔 같은 크기로 편집하고 두 지도의 연결점 경위도까지도 일치시켜 `노룡`도의 동쪽 지역을 `심양`도가 묘사하고 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도표`다. 

 

 

참고도 - <중국여도> 도표 

 

 

참고도- 노룡도

 

 

 

참고도- 여순도

  

 

 

 

 

 

저렇게 하면 어찌 되는 것일까?

지금의 란하 동쪽 강안에 바짝 붙어 있었던 원래의 심양.요양.해성.여순 등이 동쪽으로 옮겨져 지금의 심양.요양.해성.여순 위치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의 요하 역사는 위만 이후 란하 위치에서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는 윤내현의 주장과 같이 기간을 계산하자면 2100 여년에 이른다는 말이고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대요수가 지금의 요하라는 윤내현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윤내현의 <한서/지리지> 대요수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대요수가 지금의 요하가 된 것이나 지금의 란하 동쪽 강안에 있었던 원래의 심양이 지금의 요하 동쪽 강안으로 옮겨진 것도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 년이 채 되지도 않는다.  

 

2100 여년 전 반고가 기록한 대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로 흘러들었던 우북평군 백랑산에서 발원한 백랑수가 동북류하여 요서군 유성현 북쪽을 지난 후 꺽이어 동쪽으로 흘러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흘러들어 갔듯이 백랑수의 본류인 대요수는 백랑수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역시 지금의 란하로 흘러들었으며 란하로 흘러들기 전에 백랑수를 받아들인 것으로 어쨋든 한 시기의 대요수나 청 시기의 요하는 모두 지금의 란하 서쪽 지류나 북쪽 지류를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란하 하류를 설명한 중국 정사 지리지나 수많은 고지도를 지금의 요하 하류를 설명한 것으로 환치시킨 그 수법을 곰곰히 생각하니 처음 발상한 자 곧 일제왜구 육군 참모본부 편찬과원 횡정충직을 비롯한 참모본부 수뇌들의 머리가 대단히 비상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 오늘날까지 알게 된 횡정충직의 해독본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그는 먼저 1884 년 7~12 월에 영락태왕 비의 석문과 그 고증문, 영락태왕비문의 쌍구탑본을 가져온 밀정 사코오의 견문 보고에 기초한 <비문지유래기>를 쓰고, 거기에 그가 1882 년에 쓴 <임나고>와 <임나국명고>를 권말에 붙여서 참모본부 편찬과에 제출했었다.

                                                                                <광개토왕비의 탐구> 68 쪽 이진희 저 이기동 역 1982 일조각 

 

기가 막힌다.

 

후조선에서는 갑신정변.임오군란 등으로 어수선한 때에 일제왜구들은 밀정을 파견하여 조선과 청의 경계 지역을 쑤시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밀정 사코오가 집안 현지에서 영락태왕비문 일부를 석회도부하고 탑본하여 귀국 후 참모본부에서는 탑본의 실수를 발견하고 참모본부 차원에서 전면에 석회를 도부하여 새로운 글자를 새겨 넣는 등의 짓거리를 거치고 더욱 엄청난 짓거리를 기획하여 영락태왕비를 일본으로 반출.실행하려 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구 참모본부는 광개토왕릉 비문에 손을 대었을 뿐 아니라 비 그 자체를 일본으로 운반하려고까지 했다. 동양사의 대가인 백조고길(학습원 교수, 뒤에 동경제대 교수)은 1905 년 8 월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비문이 유명한 것은 조선 남부에 치우쳐 있는 신라.백제.임나 3 국이 일본의 신민이었음을 명백히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상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 역사에도 이 3 국이 일본에 조공했다든지 혹은 속국이 되었다든지 하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일본 역사 등은 소위 전설이며 역사상 가치가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 비문은 당시에 있어서 가장 신용할 역사상 유물이다. ... 나는 이 비를 일본에 가지고 와서 박물관이나 공원이나에 세우는 것은 실로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국이라든지 독일.프랑스 같으면 몇만 원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자기 나라에 가지고 왔을 것에 틀림없다. ...` 

 

학습원보인회잡지의 <만선여행기념호>를 보면 그 중의 `만선여행일기`(1906.7.29) 항에,

 `백조선생은 오래전부터 교장 안팎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바 압록강의 한 지류인 동가강 상류지방에 있는 고려 광개토왕의사적을 새긴 석비를 발굴 운반하는 계획이 무르익었다 하여 이에 일행과 떨어져 단독으로 입한의 길에 올랐다. 우리들은 7 시 봉천을 출발, 철령을 향해 진행하여 남북으로 서로 헤어졌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101,102 쪽

  

광개토왕릉비를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해 해군이 압록강 하구까지 군함을 돌려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연구자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 당사자의 한 사람이였던 押上森藏(1855~19270) 퇴역 중장은 1918 년 10 월 일본역사지리학회 예회 석상에서 그의 현역시대에 비를 운반할 계획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압상삼장은 비를 운반하지 못했던 이유를 `아무래도 컸으므로 운반이 곤란하였고 또한 자면이 손상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중지`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백조는 `한국 것을 갖고 돌아와 물의를 일르킨다고 하는 것이 그 밖에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103 쪽


그 조작 짓거리가 참으로 해괴하여 말이 안나올 지경이다.

그러면 위와 같이 비 반출은 기획에 그쳤으니 다행으로 생각하여야 할까?

 

아니다.

일제왜구는 위와 같이 공개적으로는 비의 일국 반출을 부인한 듯 하였지만 한국고대사를 지리적으로 축소시키기 위하여 영락태왕비를 일국이 아닌 지금의 압록강 대안으로 이전했다.  

 

관야정.금서룡의 조사로부터 4 년 뒤인 1917 년에는 조선주차군 사령부 부관이었던 죽내영희 중좌가 `친히 현지를 방문하고 릉비 그것을 검토`하고, 이듬해 1918 년에는 흑판승미가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고 비를 자세히 조사했다. 그 때의 조사 결과는 공표되지 않고 겨우 일본역사지리학회 예회에서의 강연 개요와 그 때의 사진이 동양문고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역사지리> 기사에 의하면 흑판은 이 때 주구 쌍구본 이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비문의 일부에 의문을 품고, 석회를 떼어내서 다른 원비문을 확인하였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115,116 쪽>

  

흑판승미의 조사 이래 중단되어 왔던 집안의 고구려 유적 조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만주국`이 만들어진 뒤인 1935 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것은 집안에서 고구려 벽화고분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하여 만주국 문교부와 일만문화협회의 의뢰하에 많은 학자가 함가하여 행해졌다. 이 때의 조사 결과는 <통구>(상권은 1938년, 하권은 1940년)로 정리되었고, 조사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지내굉은 <광개토왕릉비 발견의 유래와 비석의 현상>(<사학잡지>제49편제1호,1938)로 따로 발표하였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117쪽

 

위와 같이 1918 년~1935 년 사이에 영락태왕비를 조사하였다는 기록이 없는데 과연 일국 본토로까지 반출을 기획했던 일제왜구들은 그 기간에 무엇을 했을까? 

 

지도조작.지명이동 그리고 영락태왕비의 신 압록강으로의 이전이였을 것이다.

  

지금의 란하 위치에 있었던 요하를 지도를 조작하여 지금의 요하로 만들면 지금의 란하 주변에 있었던 지명들도 몽땅 지금의 요하 주변으로 옮겨져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였던 옛 낙랑군의 열수이며 고구려.고려.후조선의 압록강 상류 서쪽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있었던 광개토왕비가 지금의 압록강 변에 있다는 것은 비를 원래 위치에서 반출하여 이전시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식민.반도사관에 푹 빠져 있는 현 한국사학계는 한반도 대동강 지역이 2000 여년 전 한나라가 낙랑군을 설치한 지역이라고 강변하고 있고 대다수의 한국인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강단 사학계 밖에서 한반도 낙랑설을 부정하고는 있지만 역시 강단사학계와 마찬가지로 일제왜구들이 저지른 지도조작이나 지명이동 및 광개토왕릉비의 이전 등의 사실을 도외시하는 한국현실이 안타깝다.

  

이러한 한국 역사학계의 역사지리 인식은 결국 중국으로부터 조롱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 대체 무엇을 근거로 어디까지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임승국.신용하.윤내현.이덕일.심백강.송준희 등이 주장한 바와 같이 위만 시기 이후 또는 요 시기 이후에 지금의 북운하나 지금의 란하 위치에 있었던 요하가 지금의 요하 위치로 옮겨왔는가?

 

천만에.

이들은 서국의 <한서><후한서><위서><수서><당서> 등 10 세기 이전의 지리지는 물론이고 <요사><명사><청사고> 등 11 세기 이후 20 세기까지의 지리지마저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1392 년 건국된 후조선의 서북쪽 국경은 명과 청나라의 동북쪽 국경과 맞닿아 있었고 <명사>나 <청사고> 지리지에 기록된 저들의 동북쪽 국경은 지금의 란하였기 때문이다. 

  

아래의 서양 고지도를 보라.

후조선의 서북쪽 경계가 지금의 압록강인가?

아니다.

지금의 란하다.  

 

고지도 - 인디아.중국지도 CARTE DES INDES ET DE LA CHINE

             Netherland, Guillaume, Delisle, 1750, 62.7×60.9㎝

 


 

주)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 1675– 1726)은 18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도 제작자로 1718년 최초의 왕실지리학자가 됨. 이 지도는 원래 1705년 프랑스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간행된 것을 1750년 네덜란드에서 재 간행한 것이다. 지도의 내용은 1705년 지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 지도에서는 동해 해역을 ‘동양해 또는 한국해(MER DE ORIENTALE OU MER DE CORÉE)’로 표기하였다. 그는 그의 초기 지도에서 동해 명칭을 동양해와 한국해로 병기하였다. 이전의 지도에서는 동해 해역을 동양해라고만 표시했으며, 이후 지도에서는 한국해로만 표시했다.  

                                                                                                                                            <동북아재단.독도연구소> 

 

청 강희.건륭제 시기 청 강역을 측량하여 제도한 지리가들 중 가장 유명한 당빌의 <중국.달단 지도>나 그 모사도 들에 표시된 조선과 청의 경계를 표시한 적.녹색 경계선과는 사뭇 다르다.

 

왜 다를까?

왜 청 경계가 지금의 란하 부근일까? 

지금의 란하가 당시의 요하였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대의 요수는 란하`라 했던 것은 그 란하가 1705 년 당시에도 요하였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그러면 기욤의 고지도와 단재만 그렇게 말했을까? 

 

천만에.

서국의 25 개 정사에 딸린 지리지와 정사급 역사지리지를 몽땅 훑어보아라.

서국 유방이 한을 건국한 이후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멸망하는 1911 년까지 2100 여년 동안 요하가 어느 물길이였는지를.

 

<한서>부터 <당서> 지리지까지의 요수는 중국 하북성에 있는 지금의 승덕 서남쪽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내려 지금의 란하로 합쳐졌었고 남쪽의 송과 대치했던 거란족이 세운 거란국.요국에 와서야 요하가 약간 동북쪽으로 옮겨져 승덕 동북쪽에 있는 위장 부근에서 흘러내렸고 이 요하는 명.청 시기 변하지 않았다. 즉 <요사>부터 <청사고>까지 약 1000 여년 동안 지리지에 설명된 요하도 지금의 란하로 합쳐졌었다.

 

서국은 2100 여년 동안 기껏 동쪽으로 영토를 넓혔다는 것이 바로 지금의 란하를 건넌 것이였고 무제 유철이 설치했다는 낙랑군 역시 지금의 란하 동쪽에 있는 능원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쌍산자.천안.노룡 사이를 지나 란현 부근에서 란하와 합쳐지는 지금의 청룡하 유역에 불과하였다. 

 

이 청룡하가 낙랑군 탄열현에 주석된 820 리 길이의 열수였으며 고구려 시기에는 압록강이라 불렸고 이 압록강과 란하가 합쳐지는 부근에는 옛 열구였을 안평이 있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도 이 지역을 지켜냈었다. 고려 말 최유가 덕흥군을 앞세우고 원 군사 1 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 서쪽 강안에 위치했던 고구려 박작성인 파사부로 진입하였었으며 정몽주.권근 등은 개성과 명 남경을 오가면서 안평 서남쪽에 있는 철산곶.여순을 항로 기점으로 삼았었고 후조선에 들어서도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 시 회군한 위화도도 지금의 청룡하에 있었으며 신숙주가 명 사신들을 압록강 건너 파사부에서 전송했던 곳도 이곳 청룡하였으며 임진왜란 시 선조가 몽진한 곳도 지금의 청룡하 동쪽 강안에 있는 의주였었으며 명 말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된 모문룡이 있었던 가도 역시 지금의 청룡하인 당시의 압록강 하류에 있었다. 

 

또한 1894 년 청.일 전쟁을 승리하여 얻었다가 3 국 간섭으로 빼앗긴 여순의 금주와 북쪽으로 복주까지의 반도라는 요동반도도 지금의 요동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와 지금의 청룡하가 만나는 북쪽 지역의 남쪽 끝 지점이였다. 

 

 

고지도 - 청 건륭제 시기 홍양길이 편찬한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산해관과 심양 지역 약도

  

  

즉 지금의 란하와 지금의 청룡하가 만나는 북쪽 지역을 조선 시기에는 열양이라 불렀으며 백제가 내려온 마한 땅이였으나 고려.요 시기 이후에서야 요동이란 지역개념이 열양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후조선 시기 안정복 등 역사지리가들이 낙랑과 요동을 언급하면서 혼선을 빚었던 것이다. 

 

위 <건륭지>에 보이는 반도가 지금의 요동반도라 보는가?


천만에. 

고지도 상에 적색으로 표시한 것은 <신당서> 지리지에 인용된 가탐의 <사이지로> 중 영주에서 진국 곧 발해.고구려까지의 로정을 표시한 것인데 당 시기나 청 시기의 요하가 비록 상류는 다르나 하류에서는 합쳐졌기 때문에 결국 그 위치에는 변동이 없었다. 따라서 청 시기에 제도된 지도에서도 당 시기의 지리 기록을 적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국의 25 번째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는 경사 즉 지금의 북경에서 지도에 표시된 산해관까지가 약 620 리, 영원까지가 대략 700 리 안팎, 금주까지가 980 리, 심양까지가 1470 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고지도에 대릉하로 표시된 지역 중 상류인 서남쪽 지역이 요서군 유성현 지역이고 요하와 합쳐지는 곳이 요동군 방현 지역인 것이다.  

 

현대지도에 표기된 북경과 금주 사이가 몇 리나 될 것 같은가?

조사한 바도 없고 필요도 없지만 명.청 시기 사행로 기준으로 보면 압록강 의주까지 2100 리이니 대략 3000 리는 족히 됐을 것이다.

 

저러한 추정거리와는 상관없이 어쨋든 북경에서 동쪽으로 620 여리 떨어진 산해관을 지나 이제까지의 방향과는 약간 다르게 동북쪽으로 향하여 360 여리 떨어진 곳이 금주며 대릉하가 경유하는 한 시기 요동군 방현 지역이였는데 저 대릉하가 발원하는 곳은 산해관이 있는 한 시기 요서군 보다 더 서쪽에 설치되었던 우북평군 소속의 백랑.석성현 등이고 우북평군 치소는 무종현이였으며 당 측천무후가 통치했던 만세통천 2 년 옥전으로 개칭되었었다.  

 

옥전이 어디일까?

지금의 북경.천진.당산 사이에 있지 않는가?

그 옥전에서 약간 동북쪽에 위치한 한 시기의 우북평군 백랑현 곧 지금의 흥륭 부근에서 발원한 것이 바로 대릉하다.

이 대릉하 곧 백랑수가 동북쪽으로 흘러 요서군 유성현 곧 영주 북쪽을 지나 대요수로 흘러들었으니, 옥전 부근에서 시작하는 물길이 동북쪽으로 흐르면 어디까지 흐를 수 있을까?

 

기껏 흘러야 지금의 란하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지금의 란하는 한 시기의 요동군을 흐르는 대요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쨋든 중국 2 번째 정사인 <한서/지리지>부터 25 번째 정사인 <청사고/지리지>까지 명확하고 일관되게 기록된 대요수.요하의 위치가 지금의 란하였고 진 시황, 한 무제, 당 태종, 요 성종, 원 살례탑, 홍건적 등이 건너 온 곳도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청룡하와 지금의 대릉하 유역이였다.       

 

그렇다면 압록강도 지금 위치가 아니라 당연히 서쪽에 있었을 것이고, 압록강이 발원하였다는 백산도 너무나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요하는 당시 뭐라 불렸을까?

 

지금의 서요하는 <당서>에는 흑수라 기록되어 있고 후조선 영조 20 년(1745) 편찬된 <해동지도>에 실린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에는 흑룡강이라 표시되어 있으며 그 `서북양계도`에 백산도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동요하 이하는 아직 기록을 찾지 못하였고 아마도 바다로 불렸을 것 같다. 왜냐하면 백산 토문에서 발원하는 분계강인 도문강이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고대 지리지에서 언급되는 바다를 잘 숙고해야 한다. 

 


고지도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주)              산해관        영원                          심양   흥경     길림                      백산 영고탑 도문.어윤강흑룡강   바다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글쓴이 : 덕림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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