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암살의 계기가 된 '부마항쟁'.. 학살을 각오하며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박정희,
차지철과 국민과 대화를 주장했던 김재규가 대립했다.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재판 도중 김재규의 발언-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1심 최후진술 中-
이 나라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혁명은 필연적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10.26 민주 국민혁명인 것입니다.
나는 정보부 책임자로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7년 이라는 유신체제의 억압이 계속되는 사이에, 국민의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한 누적된 항거의식은 전체 국민사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작년의 부산과 마산사태는 그러한 국민적 항거의 표본이었고, 삽시간에 전국의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혁명의 마지막 순간에, 국민의 회생을 뒤늦게나마 염려하여 하야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과는 다릅니다. 그는 끝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생명이 희생될 것임이 명약관화하였습니다.
나는 부마사태의 본질과 그것의 전국에로의 확산될 조짐을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박대통령은 국민의 항거가 거세지면 스스로 저항하는 국민에 대해 발포명령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10.26 사태가 없었더라면 과연 그 결과가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길이 없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나 개인에게 있어 사적으로 친형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개인적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독재체제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각오하였습니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 희생을 줄이는 것이 나의 대의였습니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똑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신체제는 그 자체가 꽉 짜여진 억압과 폭력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풀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구멍이 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는 한 지속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 것을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긴급조치로 학생을 묶었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하고, 또 구속 기소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야당이 설 땅이 없었습니다. 모든 출구는 막혀 있었습니다.
주변은 깜깜한 절벽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찬성과 반대가 있어야 합니다.
99% 대통령 선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2심 최후진술 中-
이 사건으로 나는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을 받았지만, 또 한 차례의 재판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하는 심판입니다.
하늘의 심판인 역사의 4심에서는 나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나는 기쁘게 갑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꽃 피우고 편안히 사십시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 김재규 사형 전 유언 -
한가지 확실한건 10.26으로 인해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피 흘릴걸 막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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