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 敬惠公主경혜공주와 駙馬부마 寧陽尉영양위 鄭悰정종의 생애 年代記연대기 ]

백삼/이한백 2013. 11. 12. 14:44

.[ 敬惠公主경혜공주와 駙馬부마 寧陽尉영양위 鄭悰정종의 생애 年代記연대기 ]

 

1452년[문종 2년] 5월 14일

 

문종 昇遐승하, 端宗단종 즉위.

金宗瑞김종서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종친들을 견제하고, 문종의 후궁 惠嬪혜빈 楊양씨는 궁궐 내에서 실세가 됨.

 

1453년[단종 원년] 10월 10일

 

癸酉靖難계유정난 발생.

首陽大君은 김종서를 비롯 여러 勳舊훈구 대신들을 죽임으로써 정치권력을 획득함.

 

1455[단종 3년, 세조 원년] 6월 11일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을 숙청 지시.

금성대군과 친하다는 이유로 영양위 정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감.(이때의 유배는 정종 혼자 감)

경혜공주 충격으로 쓰러짐.

 

1455년 6월 17일

 

단종은 정종의 석방을 수양대군에 요구.

정종의 유배지가 강원도 영월에서 경기도 楊根양근으로 변경

 

1455년 6월 경

 

왕의 자리를 포기한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 즉위

 

1455년 8월 2일

 

영양위 정종의 유배지 경기도 수원으로 다시 변경.

경혜공주 남편을 따라 감.

이후 삼사의 항의로 다시 김포 통진으로 유배지 변경.

역시나 경혜공주 따라 감.

 

1456년[세조 2년] 6월 1일

 

사육신 사건 발발

 

1456년 6월 27일

 

사육신 사건으로 인해 정종 전라도 光州로 유배지 변경되고,

연금된 상태로 지냄. 역시 경혜공주 따라 감.

 

1456년 7월 -12월

 

경혜공주 아들 鄭眉壽정미수 출산.

정미수를 1459년에 출산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공식기록은 1456임.

 

1457년[세조 3년] 9월 2일

 

세조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 사망.

 

 

1457년 10월 21일

 

단종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등, 강원도 영월로 유배. 얼마 되지 않아 賜死사사 됨..

금성대군 사약 받고 사사.

 

1457년-1461년

 

단종 사사 이후 정종은 스님들과 어울리며 엄청난 분노 표출.

정종의 모든 행동이 垂下수하 諜者첩자들에게 探知탐지되어 세조에게 그대로 보고 됨.

 

1461년[세조 7년] 7월 26일

 

정종은 서울로 압송되고, 경혜공주는 전라도 順天순천의 官婢관비로 내쳐 내려감(정종의 행동을 반역으로 판단한 듯, 그리고 脈絡맥락으로 보아 반란 모의를 한 듯 함)

당시 경혜공주는 딸을 임신한 만삭 상태.

 

1461년 7월-10월

 

고문을 받을 때의 영양위 정종의 發言발언들‘

"내가 충신이 되어 주상에게 죄를 얻었으니 무슨 고통이 있겠는가?" (단종에게 있어 충신이란 뜻)

"앞으로 어쩔 작정이냐"는 질문에

"빨리 상은(上恩)을 입고 싶다"고 응수.(즉, 빨리 죽여 달라는 말)

 

1461년 10월 20일

 

정종 陵遲處斬능지처참 형으로 四肢사지가 찢기는 酷刑혹형을 받아 죽음.

 

1461년 10월 23일

 

세조는 경혜공주를 漢陽한양으로 불러올리라 명령을 내림.

 

1461년 11월 말-12월 초

 

경혜공주 한양에 도착. (세조가 명령을 내린지 1개월~1개월 보름 걸렸음) 노비이므로 걸어서 이동했을 것을 고려하면, 적절한 시간임. 게다가 그녀는 産母산모였음.

 

1461년 12월 14일

 

貞熹王后정희왕후 윤씨尹氏가 세조에게 경혜공주를 薄待박대하지 말 것을 요청하자, 세조는 재물을 주라고 명령 내림.(아마도 한양으로 불러 올려놓고 박대한 듯.) 그런데, 이 시기 경혜공주는 노비신분이었음. 따라서 한양도착 후 보름가까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는 조처가 나라에서 내리지 않았음. ,더욱 갓 낳은 자식은 딸. 갓난아기.

 

1461년말 - 1462년

 

경혜공주는 아들[정미수]과 딸을 궁 안으로 들여보내고,(정희왕후가 거둬들인 듯) 공주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됨.

 

1465년[세조 11년] 3월 경

 

경혜공주 갑작스레 스님생활 청산하고 환속하여 세조가 내린

집에서 생활함.

 

1465년 4월 1일

 

경혜공주 궁으로 들어가 세조를 만남. 세조는 이 자리에서 경혜공주의 자식들에게 걸려 있는 "연좌제"를 풀어주겠다 함. 하지만 경혜공주와 그 자식이들 宗親종친으로 대우받은 것은 睿宗예종 때임.

 

1465년 4월 이후

 

경혜공주 궁 출입이 잦아 짐.

 

1468년[세조 14년 말년] 9월 6일

 

온 몸에 난 腫氣종기로 난 피부병에 고생하던 세조가 세상을 하직함..睿宗예종 즉위

 

1469년[예종 원년] 12월

 

예종 승하. 成宗성종 즉위

 

1473년[성종 4년] 4월 5일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敦寧府돈녕부 直長직장 벼슬에 오름.

신하들이 정미수의 벼슬 오름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垂簾聽政수렴청정하던 貞熹王后정희왕후가는 그대로 밀어붙임

 

1473년 12월 28일

 

경혜공주 오랫동안 앓아오던 지병持病으로 세상을 떠남.

남편 영양위 정종 墓所묘소의 곁인 경기도 高揚고얀에 海州해주 鄭氏정씨 先山선산에 묻힘.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으나 왕의 딸이다”

 

문종의 1남 2녀 중 장녀로서 어머니는 仁孝順惠顯德王后인효순혜현덕왕후) 권씨權氏이다. 세종 32년(1450) 참판 鄭忠景의 아들 정종鄭悰과 결혼하였다. 정종에게는 寧陽尉영양위가 봉해졌으며, 단종 초 형조 판서로서 왕의 깊은 신임을 얻었으나, 단종 3년(1455) 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과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 수양대군 즉위 후 문종의 유일한 부마인 점이 참작되어 楊根양근으로 이양移讓이 되었으나,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으로 通津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光州광주로 안치. 1461년 사사 되었고 광주에서 아들 정미수를 낳았다. 이후 공주는 순천관비가 되었다. 府使부사가 관비의 使役사역을 시키려 하자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으나 왕의 딸이다” 라고 호통하여 부리지 못하였다 한다.

나는 2005년 7월 26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한 경혜공주 묘소를 참배했다. 위치를 정확하게 몰라서 대종친회 사무실에 문의를 했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대자동은 많이 갔지만 그곳에 경혜공주 할머님과 영양위 할아버지묘소가 있는지는 몰랐다. 어렸을 적에 최영장군 묘소는 많이 참배를 했었다. 그런데 그 앞쪽에 경혜공주 할머니와 영양위 할아버지 묘소가 있을 줄이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양시청 홈페이지 들어갔지만 경혜공주에 대한 글 한줄 올라와 있지 않았다. 단지 경혜로 라는 길이 있단다. 그곳을 찾아봤지만 지도에도 나 와 있지 않았다. 또한 경혜공주 묘소를 동네 주민한테 물어봐도 모른단다.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셨던 경혜공주와 영양위 정종 할아버지, 단종대왕이 그리워하셨던 두 분인데……. 사당은 들어갈 수 없어서 밖에서만 구경을 하였다. 대령사와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사당 왼쪽으로 나있는 길로 올라가다 보면 큰개들이 있어서 주춤했다. 계속 오르다보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종친회 사무실에서 개천을 건너야 한다고 한말이 생각나서 개천을 무작정 건 넣다. 길도 없어서 숲을 헤치면서 올라갔다. 땀은 말 그대로 비 오듯 했고 모기떼와 거미줄과 싸우면서 힘들게 올라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옆쪽으로 그나마 잘 닦여진 길이 있었다. 그렇게 10여분을 올라갔더니 경혜공주 할머님과 영양위 할아버지묘소가 보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일단 큰절을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잘 정돈된 묘소의 모습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풀들이 무성했고 공주님묘소에는 아카시 나무까지 자라고 있었다. 순간 무연고 묘도 아닌데 하면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조금 풀을 뽑고 영월 단종 莊陵장능에 다녀온 걸 말씀드렸다.

경혜공주께서는 단종의 누님이 되신다. 문종 때에 영양위 할아버지는 교동에 사셨다고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문종대왕께서 어린 단종이 걱정이 되어서 힘이 되어줄 영양위를 교동에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단종께서는 경혜공주가 있는 교동 영양위궁을 자주 방문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영양위 할아버지와 단종임금의 허물없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훗날 단종대왕이 영월유배지에서 정순왕후 송 씨와 경혜 누님과 영양위를 그리워했고 한다. 또한 적소인 광주에서 경혜공주의 출산소식을 들은 단종께선 슬피 우셨다 한다. 아마도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지 않을까 한다. 귀향지에서 출생하신분이 후에 해평부원군 정미수 할아버지다. 정미수 할아버지는 정희왕후(세조 비)가 몰래 데려다가 딸이라고 속이면서 키웠다고 한다. 후에 세조가 경혜공주의 아들인 것을 알고 “미수” 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요즘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저 출산과 고령화 사회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 그리고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성씨를 없애자는 사람들도 있다. 말 그대로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사(뿌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보면 안타깝다 나도 물론 젊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다. 내가 뿌리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내 뿌리를 알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요즘 역사교육이 중요한 걸 느끼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독도문제와 고구려사 문제 역사를 몰랐더라면 그나마 있던 역사마저 이웃나라에게 빼앗겨 버렸을 것이다. 이처럼 내가 내 뿌리를 알면 내 행동도 조심스러워지고 내 자신이 조금은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분들의 피로서 가문을 지키셨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해정인 들은 경혜공주 할머님께서 말씀하신 “내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으나 왕의 딸이다.” 라고 하신 것처럼 해정인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았으면 한다. 자존심이란 별게 아니다. 내 뿌리를 알고 그분들의 업적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의 삶은 본받는 것 그것이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해정인의 자존심이 아닐는지

해정 젊은이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