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임진왜란때 조선 호랑이를 사냥한 왜인들

백삼/이한백 2015. 9. 21. 13:20

섬나라인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생태계의 가장 상위 동물은 일본 늑대였다. 그랬으니 ‘백수의 왕’ 호랑이는 일본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예로부터 ‘한반도에서의 호랑이 사냥’은 무술을 뽐내고 싶어했던 일본 무사들에게 ‘로망’이었다. 545년 3월 <일본서기> ‘흠명기’는 백제를 방문했던 일본 무사 가시와데하테스(膳臣巴堤使)가 “자식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퇴치했다”고 일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이 처자식을 동반하고 사신으로 백제에 갔습니다. 항구에서 하룻밤 머무는데 아이가 실종됐고, 다음날 아침 호랑이 흔적을 찾았습니다. 제가 암석동굴에 가서 외쳤습니다. ‘천황의 뜻을 받들어 백제에 왔는데…내 자식을 잃고…찾아왔다.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보복하겠다.’ 그 때 호랑이가 나와 입을 벌리고 저를 삼키려 해서 제가 왼손을 뻗어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손으로 찔러 죽인 뒤 껍질을 벗겨 돌아왔습니다.”
 이미 1500년 전에 일본인이 한반도의 백제 땅에 들어와 한국 호랑이를 죽인 기록이다.

 

 ■가등청정의 호랑이 사냥 신화
 임진왜란 때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군의 ‘호랑이 사냥’ 전설은 기록과 그림 등으로 남아 일본인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됐다. 
 예컨대 임진왜란의 그 악명높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호랑이 사냥 기록은 140년 후인 1739년 출간된 영웅호걸담 <상산기담(常山紀談)>에 나와 있다.
 “가토는 조선의 어느 곳, 큰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 가토의 몸종인 고즈키 사젠(上月左膳)을 물어 죽였다. 화가 난 가토가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한마리 호랑이가 갈대숲을 헤치고 가토를 향해 달려왔다.… 맹렬하게 달려온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덮쳐온 것을 조총으로 쏘았다.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둥대다가 급소를 맞고 결국 죽었다.”
 정설로 확인된 기록은 없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귀국했을 때 호랑이 가죽 5장을 가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주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1853년 류테이 다네히데(柳亭種秀)가 펴낸 그림 ‘화한영웅백인일수(和漢英雄百人一首)’는 일본과 중국 영웅 100명 가운데 맨 첫번째로 가토 기요마사를 다뤘다. 그림 옆에 쓴 글을 읽어보면 의미심장하다.
 “가토 기요마사, 일본의 영웅. 자국을 떠나 멀리 삼한의 땅에 이르고 한토(漢土·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쳐 나쁜 호랑이를 물리쳐서 모든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여….”
 특히 가토가 호랑이에 올라타 머리 위쪽에서 창을 내리찍고 호랑이는 앞발을 허공에 휘두르며 입을 벌려 고통스러워하는 그림을 보면 왠지 섬뜩하기만 하다. 1862년 우타가와 구니토라(歌川芳虎)가 그린 ‘좌토정청 조선원정 선상의 그림(佐藤正淸朝鮮遠征船上の圖)’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향하는 가토 기요마사가 등장하고 있다. 사토(佐藤)는 가토가 분명하다. 이렇듯 19세기 들어 가토의 호랑이 사냥은 한반도와 중국대륙 침략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즈음 정한론의 등장하고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 하는 일본의 행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최경국의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무사그립과 호랑이 사냥’, <일본연구> 제40호, 2009)

 

 ■조선호랑이를 보양식으로 먹은 풍신수길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은 또 어떤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편집과장으로 교과서 편찬에 관여했던 역사학자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1934년 경성제대 의학부 고고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얇은 책으로 엮는다. 그 책은 <조선출병과 가토 기요마사>였는데 끝부분에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원년(1592년) 일본의 무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가 부산 기장성을 점령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한마리를 보냈다. 드물게 보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도요토미는 교토에 있던 고요제이(後陽成)천황에게 보인 뒤 호랑이를 수레에 실어 장안을 돌아다녔다.”
 이 때 도요토미는 기뻐서 미친듯이 춤을 췄고, 그러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 무장들은 경쟁적으로 호랑이를 보냈다는 것이다..
 예컨대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는 동래에서 한마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창원에서 두마리를 잡아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호랑이를 잡아 보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호랑이를 사냥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에 출병했던 나베시마(鍋島) 가문의 문서를 보면 “방금 전 호랑이를 보내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빨리 사냥해서 보내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출병과 가토 기요마사>를 쓴 오다는 ‘도요토미가 요양 때문에 호랑이가 필요했던 것”이라 해석했다. 오다는 도요토미의 부하인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보낸 문서를 근거로 삼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님의 요양을 위해 머리고기, 장 등을 남김없이 소금에 절여 보내주시오.”

 


 도요토미 측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보낸 공문서를 봐도 알 수 있다.
 “호랑이의 가죽, 머리, 뼈와 고기, 간과 담 등을 목록 그대로 잘 받았습니다. 도요토미 님이 기뻐하며 드셨습니다.”
 호랑이는 당시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혔다. 호랑이 가죽, 즉 호피는 고관대작들의 융단으로 사용됐다. 뼈와 피, 담, 고기도 최고급 정력 장강제였다. 호랑이의 뼛가루와 골즙은 호정(虎精)으로 일컬어졌다. 이것을 섞어 만든 독한 술은 호정주라 해서 고가로 팔렸다. 또 호골고(虎骨膏)라 해서 호랑이 뼈를 바짝 조린 고약의 효력은 신기에 가깝다고 했다.
 특히 앞다리의 경골에서 나오는 호골고가 유명했는데, 호랑이의 기력이 모두 앞다리에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전란에 휩싸인 임진왜란 와중에서 조선호랑이 마저 왜장들의 무용담을 위해, 혹은 침략 수괴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양강장제로 쓰려고 무참히 살해됐음을 알 수 있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침략의 속죄양' 조선 호랑이 절멸 사건 ]에서 임진왜란부분만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