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안중근의 행적과 위치 추적

백삼/이한백 2015. 8. 26. 17:22

1845년 순흥안씨 족보소(순흥안씨족보)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1864년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생일: 1879년 9월 2일

장소: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망:1910년 3월 26일

장소: 일본 제국 뤼순(Lushunkou 旅顺口)




 

1879년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친 안태훈,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1879년 황해도(黃海道) 해주목(海州牧) ≒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South Africa)




1879년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海州)에서 

1879년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1879년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거부가 되어 재산을 

1879년 축적하였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1880년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었다. 

1880년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1880년 어릴 때에는 안응칠(安應七)이라 불렀다. 

1882년 이완용=증시별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File:Anglo-egyptian war.jpg


1882년 임오군란(이집트 우라비 혁명)

1882년 http://en.wikipedia.org/wiki/Urabi_Revolt

1882년 http://blog.daum.net/han0114/17050559




 

인천도호부 제물포 

(이게 확실한것인지는 알수없음)


 

 





 




 

 

1882년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

1882년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연방과 일본과 체결된 조약이다(불평등)


1882년 조선측의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 부관 김홍집(金弘集)과 

1882년 일본측의 하나부사 공사 사이에 협상이 성립되어, 


1882년 8월 30일 본조약 6개조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 2개조를 조인하였다.

1882년  그 내용은 조선측의 50萬원 배상, 일본경비병의 일본공사관 주둔,

1882년 조선측의 공식사과를 위한 수신사(修信使) 파견, 군란 주모자 처벌 등이다.

 

 

인천(仁川)의 옛 이름 ≒ 제물포(濟物浦)≒ 제물량영(濟物梁營)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제물포(濟物浦) ≒ 텔아비브(Tel Aviv 이스라엘 )



 


 

제물포 조약 전문 ...1882年(고종 19) 7月 17日(음)체결, 일명 ‘조일선후조약朝日善後條約’


제1조,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범인을 제포하여 엄징할 것.불이행시 일본이 개입
제2조, 일본국 피해자를 후한 사례로 장사 지낼 것.
제3조, 5만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에게 급여할 것.
제4조, 배상금 50만원을 지불할 것.
제5조, 일본 공사관에 군대를 주둔시켜 경비에 임하는 것을 허용할 것.
제6조, 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여 일본국에게 사죄할 것.


 




 

1884년 이완용=육영학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워 그후 주미공사관에서 

1884년 이완용=참찬관를 거쳐 주미대사에 임명되게 된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1884년 청나라(존재않함)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1884년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정변(쿠데타)이다. 

188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 막바지에

1884년 이를 무렵 밖에서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축하연은 피비릿내 

1884년 나는 혼란으로 변한다. 이 때, 제일 먼저 피를 흘린 사람이 

1884년 당시 정권의 실세인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었다.

1884년  민영익이 밖으로 나오자 유혁로가 이끄는 일본인 자객 쇼시마가 

1884년 민영익을 찔렀고, 행동대원 윤경순과 이은종도 

1884년 민영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1884년 동맥이 끊기고 귀와 볼 등 일곱군데나 찔린 민영익은 사력을 다해 

1884년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구원을 요청했다. 

1884년 민영익은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와 

1884년 푸트의 보호 아래 묄렌도르프 집으로 몸을 피한 뒤, 

1884년 미국 공사관 주치의 알렌의 치료를 받고 겨우 목숨을 구했다.

1884년 민영익의 목숨을 구한 장소인 묄렌도르프의 집은 지금 수송공원 일대이다. 

1884년 우정총국으로부터 묄렌도르프의 집까지는 불과 200m도 되지 않는 거리이다. 

 

 





파일:Kim Ok-kyun youth's.jpg

청년 시절의 김옥균



1884년 저녁의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킵니다. 

1884년 고종 내외와 왕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884년 12월 6일 오후,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1884년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1884년 개화파가 당시에 내놓은 정책 중 현재 전하는 기록은 14개 조항이다(오리지날 친일파들)


1884년 12월 7일 오후 청나라(존재않함) 군대가 들어왔고, 

1884년 치밀하지 못한 준비로 3일만에 진압되었다. 

1884년 청나라 군대의 진짜 정체는?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1884년 안중근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1884년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1884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千鳳山) 밑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1884년 냥가니산( Mount Nyangani )





 


1884년 안씨 일가 해주에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함. 

1884년 조부 안인수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음.


 

1884년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1884년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1884년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



1884년 12월 말 조선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 등을 특차전권대사로 파견, 

1884년 12월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측의 개입을 문제삼았다가 

1884년 12월 오히려 한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1885년 한성조약(漢城條約,)

1885년 고종 22년= 1월 9일 조선의 한성부에서 조선측 대표 의정부좌의정 김홍집

1885년 조선측 대표단일본 제국 외무부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외

1885년 일본측 대표단이 조선과 일본의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 및 보상에 대해 체결한 조약이다.

1885년 1884년 12월 말부터 여러 차례의 교섭과 회담 끝에 1885년 1월 9일에 타결되었다.





 

1885년 2월 3일 윌리엄 스크랜턴=아펜젤러 목사 부부·아내·어머니와 함께 출발함

1885년 2월 윌리엄 스크랜턴=인천에 도착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조선 정국이 불안하여 

1885년 2월 윌리엄 스크랜턴=잠시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거기서 수신사 박영효에게서 조선어을 공부하였다. 











1885년 4월 카를 베베르(1840~1940)=조선에 있어서 러시아 최초의 

1885년 4월 공식 대표자로서 서울(어디인가?)로 부임합니다.

1885년 4월 카를 베베르=독일 여성 손탁(Sontag:한자명 )와 함께 서울에 도착합니다



1885년 프랑스계 독일 여인으로 한국의 러시아 초대 공사로 부임해온 웨베르의 처형이다. 

1885년 이름은 안토니에트 존타크(앙투아네트 손탁 Antoinette Sontag) 으로 내한 당시 32세 과부였다

1885년 태어난 날이 일요일이면 존타크(sontag·손탁)이다.


 



1885년 4월 손탁(孫鐸)=외빈 접대를 담당하였다. 

1885년 4월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내부에 들어가 외국인 접대 업무를 맡았다. 

1885년 4월 손탁(앙투아네트 손탁 Antoinette Sontag)은 

1885년 4월 미모와 교양을 갖추었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가 능통했다, 

1885년 4월 프랑스 요리 실력이 탁월했다. 

1885년 4월 궁내부에 채용된 손탁은 대조선이 주관하는 서양식 연회를 도맡았고, 

1885년 4월 고종이 경복궁에 건청궁을 건립할 때는 거실과 주방을 서양식으로 꾸미는 역할을 했다. 





1885년 5월 3일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조선 지방정부에 도착합니다.

1885년 5월 윌리엄 스크랜턴=의사이자 장로교 선교사인 앨런 박사가 설립한 

1885년 5월 윌리엄 스크랜턴=광혜원에서 6주간 근무한 후 정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합니다.



1886년 윌리엄 스크랜턴=병원을 세우고,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886년 윌리엄 스크랜턴=어머니 스크랜턴(Scranton.M.F) 여사는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1886년 손탁(孫鐸)=사교성이 뛰어난 데다 궁내부에 근무하면서 조선어 실력도 늘어 





1886년 손탁(孫鐸(앙뜨와네뜨·손타크/앙투아네트 손탁 Antoinette Sontag))
188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886년 손탁(孫鐸)=당시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서양 요리였던 
1886년 손탁(孫鐸)=손탁의 프랑스 요리는 한국에 체류하던 서양인뿐만 
1886년 손탁(孫鐸)=아니라 고종과 명성황후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1886년 손탁(孫鐸)=손탁은 한국 정부와 러시아공사관 사이의 중개자로서 
1886년 손탁(앙투아네트 손탁 Antoinette Sontag))=제2차 한러밀약(1886)




 

1886년 안중근=동생 안정근출생(安定根 ) .1885.1.17 ~ 1949.3.17

 

1886년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상하이에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886년 1919년에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이 되었다. 임시정부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1886년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 선전과 군자금 모금에도 앞장섰다



 

1889년 안중근=동생 안공근 출생(安恭根, 1889년 7월 11일 ~ 1939년 5월 30일)

1889년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교육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889년 외교관이자 한인애국단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889년 1909년 형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연좌되어 

1889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다가 러시아로 망명, 러시아 교민들을 지도하였으며 

1889년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된 뒤 

188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889년 1922년에는 한때 이동휘, 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1889년 레닌으로부터 지원금 교부를 위해 노력했다.




유사사진

http://www.freerepublic.com/focus/f-news/1693618/posts



1889년 안중근=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1889년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1889년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1년 여동생 안성녀 출생. 

1892년 조부 안인수 별세.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1894년 아버지 안태훈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1894년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1894년 안중근 아버지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1894년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다.

1894년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


 


1894년 정동구락부=사교적 모임을 표방하고 설립된다.

1894년 정동구락부=주요회원은 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서재필(徐載弼)·이완용(李完用) 

1894년 정동구락부=미국공사 실, 프랑스 영사 플랑시,르장드르·다이, 

1894년 정동구락부=선교사인 언더우드·아펜젤러 등 주한 외교관·선교사들이었다



 






1894년 정동=정동(貞洞)정치적 사교·외교의 중심지로, 

1894년 정동=미국 공사관이나 러시아 공사관 등 각국 공사관과 선교사들의 주택, 

1894년 정동=외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음식점·상점들이 많았다. 

1894년 정동=그러므로 당시 조선 정계의 인사들도 사교의 목적으로 이곳에 

1894년 정동=자주 출입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자연스럽게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1894년 정동=이 세력을 정동구락부 또는 미국파·정동파·영어파라고 불렀다. 

1894년 정동=정동구락부는 소위 외국물을 먹었다는 유학파 관료과 

1894년 정동=개화세력들(일본 유학파)이 만든 사교집단으로써 친미/친러 세력들이 수두룩했다. 



 

 

 

생일 1876년 8월 29일

출생 조선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사망 1949년 6월 26일 (72세)

사망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경교장 2층 거실






1894년 황해도(黃海道) 해주목(海州牧) ≒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남아프리카)

1894년 안중근=황해도 재령군 거주 향반 김홍섭의 딸 아려(17세)와 결혼함. 

1894년 안중근=황해도 지역 동학군에 대항해 부친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 

1894년 안중근=선봉장으로 출전하여 용맹을 떨침. 

1894년 안중근(15세)=부친의 초청으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天奉山) 밑 청계동에 온 백범 김구(18세)와 상면함



 

짐바브웨의 가장 높은 곳은 냥가니산(Mount Nyangani)

고도 2,592m (8504피트)

황해도 천봉산(天奉山) 






1895년 안중근=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하관조약)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 馬關條約 마관)은 

1895년 예전에는 아카마가세키[赤間關] 또는 바칸[馬關繭]이라 불렸다.

1895년 3월 20일부터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시에서 

1895년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으로 

1895년 한국어 발음으로 하관조약이라고도 불렸다. 

1895년 4월 17일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와 

1895년 청나라의 이홍장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1895년 이 조약은 5개 항목으로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물리치고 

1895년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하관조약)








1896년 안중근=부친 안태훈, 동학당으로부터 빼앗은 군량미 문제로 

1896년 천주교 종현성당(鐘峴聖堂 1892년착공~ 1898년 완공)으로 피신하였다가 

1896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天奉山) 밑 청계동으로 귀향함. 




1897년 안중근을 비롯한 안태훈 일가가 

1897년 홍석구 신부(J.Wilhelm, 빌렘)로부터 ‘도마(Thomas)’로 세례를 받음.

 

1897년 안중근=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도마, 다묵)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897년 안중근=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1895년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1895년 농민군을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1895년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

1895년 박석골전투(朴石谷  박석골마을 Paksekori  )등에서 

1895년 기습전을 감행하는데 참여하였다.

 


 


1899년 전 참판 김중환(金重煥)이 옹진 민재(民财) 군민의 돈 5000냥을 강탈한 문제 해결을 위한 총대로 선출됨. 

1899년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 건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어 학습 단념. 

1899년 안중근 만인계 채표회사(彩票會社) 사장 취임.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tag/%EB%AF%BC%EB%8D%95%ED%9A%A8


뮈텔 Mutel, Gustave Charles Marie (1854-1933)

대주교.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8대 조선 교구장. 

한국명 민덕효(閔德孝). 

프랑스 블뢰메리에서 출생

조앵빌 중등학교와 랑그르 소신학교를 졸업하여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하여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고 만주에 머무르면서 

1866년 전교활동 준비와 한국에 관련된 여러 문서들을 정리하는 

1866년 한편 일본에서의 시복수속 등을 견학하기도 하였다.(1866~1873)


 

1873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고 ( 10월11일 )

1877년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한반도로 온것은 아님)로 임명되어( 02월24일 )

1877년 만주(동북삼성은 절대아님)에 도착하였다. (12월 )


1880년 리우빌 신부와 함께 입국하려 하였으나 조선 관헌들의 엄한 감시로 성공하지 못하고(  05월 )

1880년 황해도 장연(長淵)에 상륙할 수 있었다.( 11월 )






1881년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로베르 신부와 잠입하였으나, 

1881년 황해도(黃海道) 백천군(白川郡) ≒ 가보로네(Gaborone, Botswana)




1881년 당시 천주교 탄압교서인 신사 척사윤음(辛巳斥邪綸音)이 공포된 때라서 

1881년 은거생활을 하며 한국어와 한문공부에 몰두하면서 순교자에 관한 

1881년 자료와 기록 정리에 열정을 쏟았다. 

1885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파리로 소환되었으나 

1886년 한불조약(1886.6.4) 조인(  ◀이것은 무언가 이상한것이라고 봅니다)



 

1886년 뮈텔 주교는 한불조약 이후 지하교회에서 

1886년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더 확연히 하기 위하여 예수성심신학교,

1886년 종현성당(鐘峴) ,약현성당(藥峴)  등을 준공시키는 이외에 

1886년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활동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1886년 카톨릭교(기독교)는 둘다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사랑과 평화...헛소리에 불과하죠.


 

1890년 8월에는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대목)으로 임명되어 

1890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성성식(成聖式)을 거행하고 

1890년 나서 뒤테르트르, 샤르즈뵈프 신부와 함께 


1891년 2월 조선에 재입국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1891년 뮈텔 주교는 1890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교구장으로 재임, 한국천주교회를 이끌었다. 

1895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상황을 수집하여≪치명일기≫(致命日記)를 편찬하였다.

1899년 안중근=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 건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어 학습 단념. 


 

1904년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순교행적을 기록한 현석문(玄錫文)의 ≪기해일기≫(己亥日記) 

1904년 한 벌이 발견되었는데 앞뒤의 일부가 상하여 이를 보충하고 

1905년 서문을 붙여 1905년 ≪기해일기 뮈텔판≫을 간행하였다.

 

1910년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를 용납하지 않았고 안중근 순국시 빌렘 신부의 뤼순행도 반대하였다

1910년 (뮈텔 주교란 사람은 하는짓이 왜구놈같습니다..)



 

 

1925년 1894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의 원본이 발견되자 곧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1925년 각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은 교황에게 진상하였으며(1925년), 

 



 

유사사진


 

1900년 안중근=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의 

1900년 채표회사(彩票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1900년 그러나 복권형식의 채표의 추첨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1900년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난리가 생긴 것이다.

1900년 채표의 추첨날에 벌어진 군중들의 항의소동을 겨우 진정시켰다. 

1900년 이후 사업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그는 채표 사업(복권)을 곧 그만두었다.





 

 

손탁빈관(Sontag賓館)

손탁은 프랑스의 알자스 로렌 출신이지만, 

보불전쟁(普佛戰爭: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전쟁. 1860∼1871년) 결과 

이곳이 독일령이 되어 독일국적으로 내한, 

러시아공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활약하였다


 

1902년 손탁호텔/손탁빈관(Sontag賓館)=서양식 호텔(한반도는 절대로 아닙니다)

 

1902년 안중근= 장녀 안현생 출생.




이집트 카이로 모습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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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안중근=평양(平壤)에서 석탄 장사를 합니다.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양키)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1904.04.20)

1904년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1904년 데리고 서원훈(舒元勛)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1904년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1904년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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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안중근이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1904년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舒元勛)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1904년 어렵게 만들었다(1904.4.29)

 

1904년 청국인 7~8명(양키)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1904년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하였다(1904.05.02)


1904년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 한국과 중국이라는 말이 언어조작임 ....조선연방(중국=조선)

1904년 삼화항(三和港)청나라(청나라는 존재않함)  영사가 한국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하였다. 

1904년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하였다.

1904년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1904년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1904년 체포령이 내려집니다. 


1904년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1904년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하였다.(1904.07.10 전후)

1904년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1904년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904년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합니다.

1904년 황해도 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1904년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1904년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1904.07.22)






 

1905년 01월 22일 -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1905년 02월 22일 - 일본이 독도(獨島)를 병합, ‘다케시마[竹島]’로 명명.

1905년 05월 27일 - 러일 전쟁: 쓰시마 전투에서 러시아가 패하다.

1905년 06월 07일 - 노르웨이, 스웨덴과의 동군연합(同君聯合) 종식.

1905년 0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1905년 08월 12일 - 런던에서 제2차 영일동맹 조약 조인.

1905년 09월 05일 - 러일 전쟁: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간 포츠머스 조약 체결.

1905년 10월 15일 - 친일단체 일진회, 한일보호조약 촉구 성명.

1905년 10월 16일 - 인도의 벵골이 분할되다.

1905년 10월 17일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즉위.

1905년 10월 27일 - 고종황제 칙령 제47호 제정반포, 대한적십자사 설립.

1905년 11월 06일 - YMCA 창설자 조지 윌리엄스 사망.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체결.

1905년 11월 20일 - 장지연(1864.11.30 ~ 1921.10.2),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1905년 11월 28일 - 에이레 독립당인 신페인당 결성.

1905년 11월 30일 - 고종의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보호조약 늑결을 개탄하며 자결.

 

1905년 11월 30일 - 주한 영국공사관 철수.

1905년 12월 12일 - 베이징에서 청일조약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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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어디일까?)에 도착하고(1905.11.09)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서명을 부탁하면서 고종황제에게 편지를 주었다. 

1905년 그는 한국의 황실 궁전을 둘러싸하는 일본군을 주문하고 

1905년 그 조약에 동의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고종황제를 위협했다.(1905.11.15)

 

1905년 을사늑약 체결(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1905.11.17)

 

1905년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 정부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1905년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1905년 (이부분이 요상합니다...한반도로 인위적으로 축소시키고 조작된것을 빼버리면 

1905년 이게 무얼 의미하는것인지가 애매모호해지더군요 )

 

 

1905년 안중근=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5년 안중근 아버지(안태훈)와 상의하여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 산동반도,상하이를 방문함. 




1905년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1905년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1905년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1905년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1905년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안중근 귀국. 

1905년 안중근 장남 출생 안분도, 12세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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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로 이사했다. 

1906년 대동강(이집트 나일강) 하구에 있는 진남포(鎭南浦)

1906년 3월 안중근 일가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주함.

1906년 3월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다

1906년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1906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1906년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1906년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6년 안중근=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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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학교 [한] 敦義學校 

평양교구 진남포본당이 운영하던 초등교육 기관으로 1900년에 설립되었다. 

초대교장 이평택(파트리치오)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성장한 돈의학교는

설립 몇해 만에 평안도에서 손꼽히는 사립학교로 부상하였다. 

2대 교장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을 맞아 더욱 충실하게 성장하였으며 

민족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전통 있는 학교가 되었다. 

1908년 교사를 증축하여 300여명을 교육시키는 커다란 학교로 발전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본당주임 르레드(Jules Lereide, 申)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면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1916년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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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1907년 안중근=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1907년 안중근=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1907년 안중근=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안중근=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1907년 안중근=서북학회에 가입합니다.

1907년 안중근=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함. 

1907년 안중근=석탄 광산사업을 위한 삼합회(한재호, 송병운과 동업)설립함. 



1907년 안중근=2남 준생 출생. 

1907년 안중근=고종의 강제 퇴위군대해산을 목격하고 

1907년 안중근=부상자들을 제중원(濟衆院)(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 1885년 3월 12일 이름변경 )으로 입원시킴. 











1907년 안중근=망명을 결심하고 부산(釜山)-원산(元山)-청진(淸津)-회령(會寧)을 거쳐 

1907년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에 김동억과 함께 도착함. 

1907년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동포들의 상황을 시찰하고 명동촌 선바위 부근에서 사격연습을 함. 

1907년 종성, 경흥을 거쳐 포시에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감. 

1907년 이곳에서 계동청년회에 가입하고 임시 사찰로 활약함. 

1907년 수청에서 안중근, 엄인섭, 김기룡과 결의 형제를 맺음. 





1907년 고종황제=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합니다. 

1907년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납니다.

1907년 안중근=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907년 안중근=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

1907년 안중근=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1907년 안중근=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1907년 안중근=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1907년 안중근=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로 

1907년 안중근=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1907년 안중근=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15])에 선출되었다.



1908년 안중근=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1908년 안중근=2차례 진입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1908년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1908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1908년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다.

1908년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1908년 해조신문에 「인심결합론」을 발표. 동의회

1908년 평의원으로 참가함.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합니다.

1908년 의병부대(총독 김두성, 대장 이범윤)중 최재형 부대 우영장으로 참가함. 

1908년 이강이 설립한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함.


1908년 6월 안중근은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1908년 6월 출정하여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1908년 6월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1908년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1908년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1908년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1908년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8년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1908년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08년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1908년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1908년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02-15 일심회 발기. 

1909-03-02 김기용 등 11인과 단지동맹 결성. 


1909-03-02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합니다. 

1909-03-02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9-03-02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1909-03-02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1909-10-00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1909-10-00 이토 히로부미=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1909-10-00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1909-10-00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하였다. 


1909-10-18 이토가 일본을 출발하여 요동반도 대련항에 도착함. 

1909-10-19 안중근, 엔치야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1909-10-19 이치권의 집에 머물면서 이토의 만주 방면시찰 소식을 들음. 


1909-10-20 대동공보사에서 이토의 만주 시찰을 확인함. 

1909-10-20 거사자금 100원을 이석산(이진룡)으로부터 강제 차용함. 

1909-10-20 우덕순 동지와 이토 처단 계획을 합의함. 


1909-10-21 8시30분발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남. 

1909-10-21 도중 포브라니치나야에서 한의사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를 러시아어 통역으로 

1909-10-21 대동하고 10시 34분에 하얼빈으로 출발. 


1909-10-21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1909-10-21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1909-10-21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1909-10-21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1909-10-21 남창춘(南長春),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1909-10-21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1909-10-21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차이쟈거우에서

1909-10-21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09-10-22 오전 9시 15분경 안중근 일행 하얼빈 역에 도착하여 

1909-10-22 유동하의 사돈 김성백의 집에 숙박함. 

1909-10-22 이토는 뤼순을 거쳐 봉천(심양)에 도착. 


1909-10-22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1909-10-22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1909-10-22 그러나 차이쟈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1909-10-22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909-10-23 안중근, 김성백 집에서 이토의 만주 방문 기사가

1909-10-23 게재된「원동보」를 읽음. 오전에 이발을 하고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1909-10-23 중국인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음. 김성옥 집에 유숙하던 조도선을 방문,

1909-10-23 정대호가 안중근 가족을 대동하고 하얼빈에 오는 것을 마중하기 워해 

1909-10-23 통역이 필요하다고 요청함. 이날 저녁 안중근 거사자금 차용과 고나련, 

1909-10-23 김성백에게 50원을 부탁하기 위해 유동하를 보냄. 이때 유동하는 

1909-10-23 갚을 방법을 요구함. 이강에게 거사계획과 차용금을

1909-10-23 갚아 달라는 편지를 안중근, 우덕순이 연명함. 


1909-10-24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함께 우편열차를 타고 남행, 

1909-10-24 채가구(지야이지스고)역 도착. 유동하에게 채가구 도착을 알리고 일이 

1909-10-24 있으면 전보를 치라고 타전함. 유동하, 이튿날 아침 이토가 도착한다는 

1909-10-24 내용을 전보로 보냄. 안중근, 우덕순과 이토 저격 거사에 대해 논의함. 


1909-10-25 안중근, 채가구를 떠남. 

1909-10-26 안중근, 7시경 하얼빈 역 도착. 

1909-10-26 이토 일행, 9시 15분에 열차에서 하차. 


1909-10-26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1909-10-26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1909-10-26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1909-10-26 9시 30분 안중근, 러시아 의장대 사열 후 일본 환영단으로 향하던 

1909-10-26 이토에게 3발을 발사하여 부상을 입힘. 


1909-10-26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10-26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1909-10-26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1909-10-26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1909-10-26 만주 철도 이사를 맞혔다


1909-10-26 이때 러시아 군인이 덮치자 권총을 떨어뜨리고 “코레아 우라”를 세번 외침. 

1909-10-26 이토, 10시에 절명함. 


1909-10-26 오전 10시경, 

1909-10-26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1909-10-26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됩니다.

1909-10-26 안중근, 하얼빈 역 구내에서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조사받음. 

1909-10-26 러시아 당국, 11시 35분에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함.

1909-10-26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히게됩니다. 


1909-10-26 11시55분 채가구에 있던 우덕순, 조도선 체포당함. 


1909-10-27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 안중근 재판을 관동도독부로 넘김.

1909-10-27 대한매일신보 안중근 의거를 국내에 소개함. 

1909-10-30 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1회 신문. 

1909-10-30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1909-10-30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1909-10-30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10-02-14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http://blog.daum.net/johagnes/1890731


1910-03-26 안중근=뤼순에서 처형된다. 

1910-03-26 유해는 오늘날(2013년)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1918년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안중근의 15대조 안효신의 존재등장

1936년 순흥안씨 족보 간행=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안중근의 15대조 안효신의 존재등장


1945년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1945년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1945년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1945년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1945년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하였다)

1945년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하였다)


1961년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

1945년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으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1945년 부친 한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