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고갱

백삼/이한백 2015. 7. 14. 12:39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서울시립미술관

2013.9.27

 

♬ 타이스의 명상곡/마스네

 

전시장 내의 작품에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돼 있어

엽서와 카드 및 작품해설집을 스캔하여 포토샵으로 보정한 것임.

그의 유명한 작품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제목부터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며 작품 내용도 이를 잘 표현한 것이어서

배경음악도 명상곡으로 설정하였다.

한글판 작품해설 책자는 품절이어서 영문판으로 구입하여 작품명을 영문 그대로 표기하였다.

관람객으로 엄청 북적거려 또다른 분위기에서 놀랐다.3개월반 동안 내내 이런 성황이었을까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우리도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현상일 것이다.

교향악 연주회에도 가 본 지가 수 년이 됐으니 문화인으로 부끄럽던 차에

차일피일 미루다 막바지 마감일 가까워서야 관람하게 되어

비문화인 비교양인에서 최소한 면피한 기분이었다.

입장권은 1만3천원이나 국가***증을 제시하여 무료입장.

 

고갱(Eugéne Henri Paul Gauguin1848 ~ 1903)

 

고갱의 '황색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91년)

 

프랑스의 화가. 부친은 신문 편집장, 모친은 페루 혈통. 파리에서 출생.

은행원이 된 후, 여가 있을 때마다 회화에 전심, 살롱 전에 입선했다.

피사로를 알게 되어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후, 1880년의 제5회 인상파전에 참가, 화가 생활을 했다.

1886년부터 인상파의 회화에 만족치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타방(Pont-Aven)파를 창립했다.

1888년 남불(南佛) 아를(Arles)에서 고흐와 함께 생활하다가, 고흐의 발광으로 결별하고

1891년 문명 사회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는 동시, 원시적 자연을 동경하여

동남 태평양의 타히티(Tahiti) 섬을 방문,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3인의 타히티 인등 우수품을 제작했다.

세잔고흐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으로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취재하고,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했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했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화풍은 후세 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The Ancestors of Tehamana OR Tehamana Has Many Parents (Merahi metua no Tehamana), 1893

 

Two Tahitan Woman, 1899

* 이 작품은 전시되지 않았으나 유명한 작품이라 인터넷에서 채집한 것임

 

 

The Yellow Christ, 1889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서 와서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Te tamari no atua(The Child of god ), 1896

 

Vision of the Sermon(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Still Life, Vase of Flowers at the Window, 1880

 

Manao tupau(The 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2

 

Te arii vahine(The Noble Woman),1896

 

Landscape with Two Breton Woman, 1889

 

Nave Nave mahana(Delightful Day),1896

 

Self-Portrait with Yellow Christ, 1890-91

황색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캔버스에 유화, 139.1.2x374.6㎝, 1897~1898년 제작, 보스턴 미술관 소장

 

고갱의 작품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무척이나 독특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화려한 채색이 주를 이루는 폴리네시아 시기의 작품들과 달리, 푸른색이 지배적인 이 작품에서는

아득한 깊이가 느껴진다. 오른쪽 하단의 자고 있는 어린 아기에서 시작해 왼쪽 죽음을 맞이하는 늙은

여인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인생의 깊이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젊음이나 아름다움은 금새 지나가고 머지않아 모든 이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한쪽으로 고개가 돌아간 채 깊이 잠자고 있는 아기에게서는 편안함보다는 긴장감이 느껴지는데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인간의 고난을 시사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이 감도는 보라색 옷을

입고 걸어 나오는 두 인물은 선악과를 먹은 후의 인간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작품 중앙에는 양손을

 위로 올려 열매를 따려는 인물이 있다. 열매를 따는 모티브는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라는 주제를

연상시킨다. 왼쪽 하단에 그려진 늙은 여인은 어둡고 침울해 보이는데, 눈동자에선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왼편에는 또 푸른색으로 채색된 우상이 보이는데 바로 사후세계의 여신 히나를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사후 세계로 삶이 순환하고 있다는 점을 이 대작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서울경제 2013.9.16

* 투박한 삼베에 그렸다고 하는데 폭이 무려 4m가까운 대형 그림이다.


고갱 더 알아보기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르 나시오날》이라는

신문의 정치부 기자였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되면서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게 된다. 클로비 고갱은 이때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서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하고 가족을

데리고 페루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페루로 가는 여객선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페루 리마에서 불행하게 시작되었다. 그가 리마에서 보낸 시기는

 1849~1854년까지 였으며 리마에서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된다. 오를레앙에는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의 가족은 가난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1865년 12월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견습 도선사(사관후보생)가 되어 상선(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지구촌 여러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그가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 알린 고갱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1872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그의 일자리는 어머니의 친구인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1873년에는 덴마크인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고

에밀(1874), 알린(1877), 클로비(1879), 장 르네(1881) 폴(1883) 5명의 아이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회화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어머니의 친구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의 영향이었다. 그는 미술품 수집뿐만아니라 조금씩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때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위해 이를 피사로와 의논하였다.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주식거래인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재능으로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이후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고갱은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이사를 하게된 동기는 보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 였다. 그곳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게 된다. 퐁타방에서 알게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하지만 곧 향수병에 시달리게 되고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적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되었다.

파리에서는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으며 고흐의 동생

테오의 추전으로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예술적 견해로 종종 대립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두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판화·도기(陶器)

 제작에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고갱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퐁타방이 번잡하게 느껴져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89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이 전시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였다. 점차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가다가 마침내 1891년 2월

그의 작품을 처분하여 원시세계로의 여행자금을 마련하였다. 코펜하겐에 들러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해 4월 1일 마르세이유를 출항하여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타히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하니?》 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고갱은 약 2개월간의 항해를 마치고 1891년 6월 9일 타히티섬 파페에떼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산업혁명으로 오염된 서양의 문명을 벗어나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의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원시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하지만 타히티 파페에떼는 그의 이상과 달리 척박한 곳이었다. 고갱은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파페에떼는 식민지 지배자들과 술주정뱅이 백인들이 득실거리는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고갱은

그해 9월에 파페에떼를 떠나 마타이에아 섬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고갱은 안정을 되찾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점차 가난과 빈곤, 고독에 시달려 가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돌아가 가족들과 재회하기를

갈망했다. 1893년 6월 4일 그는 타히티를 떠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프랑스로 향했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1893년 11월 10일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고갱은 자신이 경험한 타히티섬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였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소개를 위해

그림을 목판으로 제작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그에게는 매우 절박한 것이었다.

그가 프랑스로 돌아온 1년 동안 깊은 좌절감만 쌓여갔다. 코펜하겐그의 가족들도 그에게 냉담했다.

 고갱은 다시 타히티섬으로 돌아갈 것으로 결심하였고 1895년 6월 말 프랑스를 떠나 다시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이 당시 파리에서 열렸던 그의 작품은 피카소 등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타히티 파페에떼에 돌아온 고갱은 병마에 시달렸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 겪었던 처절한 패배감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때 마지막 유언으로 여기며 제작한 그림이 유명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그의 건강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이곳에서 정착하여 집을 짓고

 '쾌락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채를 든 여인》 《해변의 말 탄 사람들》등의 작품을

남겼다. 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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