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李承晩박사는 '친일파'를 비호했나?

백삼/이한백 2015. 6. 2. 09:26

李承晩박사는 '친일파'를 비호했나?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이 연재물은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 글이 아니다.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李박사의 사상과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李承晩觀'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1) "李박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친일파들이었다?"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李박사가 친일파를 자시의 추종세력으로 만들어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대한민국 건국 후 협력 친일파를 비호하고 고관으로 많이 기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는 ①李박사가 45년 10월 귀국하면서 친일파들의 자금지원을 받아 정치활동을 했고, ②李박사가 해방직후 먼저 친일파 숙청을 하고 건국추진은 뒤에 하자는 좌익세력의 주장을 완강하게 거부했으며, ③대한민국 건국운동과정에서 李박사를 추종한 사람들은 친일파들이며, ④李박사가 국회에서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 반민특위)의 친일파 조사활동을 방해하였고, ⑤대통령 재임기간 중 친일파들을 행정부의 고위직에 대거 기용했다는 것 등이다.

 

2) 오히려 친일파들에게 피선거권.선거권 박탈

李承晩박사를 친일파 비호자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5가지 논거들 가운데 ③항과 ⑤항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건국운동 과정에서 李박사를 추종한 사람들 가운데는 확실한 친일파들이 없다. 건국운동 과정에서 李박사를 추종한 인사들의 주력은 독립축성국민회, 민족통일총본부, 민족대표자회의 등의 간부들이었다. 그러한 단체의 간부로 활동한 인사들 가운데 친일파로 규정될 만한 악질적 친일경력을 가진 인사들은 전무하며, 일부 비자발적 친일경력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매우 소수이다. 친일파로 의심받을 만한 친일경력자들은 주로 다른 정당에 많이 참여했고, 위의 3개 단체의 간부구성에서는 그러한 인사들이 기피되었다.

 

李박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의 선거법이 친일파들의 피선거권은 물론이고 선거권마저 박탈했다는 사실은 李박사의 지도하에 건국운동을 전개한 세력이 친일파들이 아니었음을 잘 입증해준다. 대한민국 건국운동 세력들이 친일파들이었다면, 선거법에서 친일파들의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박탈하는 자해행위를 할리가 없는 것이다.

 

李박사는 대통령 재임기간 중 친일분자들을 행정부의 고위직에 기용한 사실이 없다. 李박사가 구성한 초대 내각에서 장관으로 임명된 인사들 가운데 친일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뿐만 아니라, 비록 비자발적으로하도 친일활동 경력이 강한 자들도 없다. 李박사는 대통령 재임기간 중 일제치하에서 관리나 군장교로 복무했던 인사들이 고위직에 임면된 경우가 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李박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李박사가 악질 친일분자들을 대한민국 경찰에 대거 기용했다고 주장하나,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경찰 기용은 미군정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李박사가 대통령 취임 후 경찰에서 그들을 숙청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 까닭은 그들 친일분자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공산당과 싸우기 위한 숙련된 치안일꾼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李박사는 그들 친일분자들을 경찰에서 실무전문가로서 일하게는 했지만 결코 그들을 고위직으로 승진시키지는 않았다.

 

3) "정부구성 후 법 만들어 친일파 처벌하자"

李承晩박사를 친일파 비호자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5가지 논거들 가운데 ①, ②, ④ 등 3개항은 사실과 부합하나 그것들을 근거로 해서 李박사를 친일파 비호자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李박사가 귀국한 후 기부받은 정치자금들 가운데 친일파 혹은 친일경력자들이 제공한 자금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해방 직후 정치자금을 기부할 재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일제하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며, 일제하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들 치고 일본인들과 대립적 관계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친일파 혹은 친일경력자들이 제공한 자금은 李박사에게만 제공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제공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李박사가 친일파 숙청부터 먼저하고 건국추진을 뒤에 하자는 좌익세력의 주장을 완강히 거부한 것은 틀림없다. 李박사는 먼저 민족의 전체 구성원들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의 독립정부를 구성한 다음 친일파 처벌법을 제정하여 법에 따라 질서있게 친일파를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李박사가 그런 입장을 취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독립된 정부도 없고 따라서 친일파를 처벌할 민족의 법률도 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친일파 숙청을 전개한다면 정치노선 및 사상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자기의 반대파를 제멋대로 친일파로 규정하여 혼란이 극심해지고 국가건설이 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좌익세력의 그러한 주장은 우익진영의 중요한 구성부분인 한민당을 무력화하여 남한에서 좌익정권 수립을 용이하게 하려는 정략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친일파 숙청을 먼저하고 건국추진을 뒤에 하자는 좌익의 주장을 거부한 것을 놓고 李박사를 친일파 비호자로 규정한 것은 옳지 않다.

 

李박사가 대한민국 건국 후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자료들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李박사가 처음부터 반민특위의 활동이나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李박사는 반민특위의 활동이 자유민주주의국가의 3권분립 체계에 부합하게 전개될 것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과 반한에 시달리고 있는 신생국가의 시급 사항인 치안유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전개될 것을 피력했고, 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를 처벌하되 친일파에 대한 '보복'보다 그들의 '개과천선'에 초점을 두어 처벌할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李박사의 주문은 친일파를 비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건설과 민족역량 강화를 위해서 제시된 것이다. 반민특위가 그러한 李박사의 정당한 주문을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특경대, 특별검찰, 특별재판부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직접 체포하여 처벌하려 하고 공산당과 싸우는데 긴요한 경찰간부들을 체포하여 국가의 대공능력을 크게 손상시키자 李박사는 반민특위의 특경대를 강제 해산시키는 등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반민특위가 李박사의 이러한 주문을 수용하였더라면 반민특위의 친일파 숙청정신과 李박사의 충정이 절충되어서 친일파 숙청은 훨씬 더 광범하면서도 온당하게 이루어져서 오늘날 그에관한 논란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