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힘들고 어두운면

피묻은 펜쪽으로 80년 광주를 내리찍은 김대중주필

백삼/이한백 2015. 5. 19. 11:37

피묻은 펜쪽으로 80년 광주를 내리찍은 김대중주필






















우리 나라에서 사주를 뺀 언론인 가운데 7년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은 그 보수적인 성향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조선일보사의 보도에 항의 방문하러 온 이인제 후보 지지자들을 향해, "내일 모레면 끝날 것들이 왜 이리 까부냐"는 거친 설전도 마다하지 않던 과격성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하는 신문의 주필은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개인의 의식은 특정한 순간에 적나라하게 나타나곤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지난 80년 5월의 뜨거운 광주를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는 중요한 판단의 자료가 될 것입니다.



다음 기사는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잘 나가던 김대중 주필이 5.17 계엄 발포로 촉발된 항쟁의 현장인 광주(엄밀히 말하면 광주 근교)를 다녀온 뒤 쓰고 5월 25일 사회면 머리에 실은 르포입니다. 찬찬히 읽어보시면 김대중 주필에 대해 새삼 느껴지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80 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 밀려 3위권을 유지하던 조 선일보가 80년대 중반 이후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쭉쭉 클 수 있었던 숨은 힘이 깔려있는 탁월한(!) 기사입니다.


## “무정부 상태의 광주 …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탈취한 군트럭으로 과격파들이 거리를 무질서하게 누비고 있다.”(위) 1980년 5월25일치 사회면 머릿기사로 실린 현 <조선일보> 주필인 김대중씨의 광주 르포 기사에는 이런 내용과 사진 설명이 달려 있다.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인간 전두환” 등 광주민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뒤부터 언론은 학살의 주역인 전두환씨를 `민족의 새 지도자'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不安感만…



「無政府 상태 光州」1週



銃들고 서성대는 「과격파」들 길목서 저지…武器 반납 지연



市民들 "生必品 동나 苦痛스럽다"



光州 화정동에서=金大中 기자】光州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光州」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그 뒤편의 거리는 차가 없어 더욱 넓어 보였다.



그 바리케이드를 마주보면서 6백여m 쯤 떨어진 이쪽 도로 중앙에 철조망과 함께 「무기 회수반」이라는 글자가 쓰인 5개의 입간판이 길을 막고 있다. 바로 이곳이 총기의 반납을 기다리고 있는 당국의 전초선이다.



24일 오후 光州의 지도층 인사들로 구성된 시민 수습대책위는 얼마의 총기를 가져다 놓고 갔다고 했다. 여기서 총기의 반납을 기다리고 있던 한 관계자는 『수습대책위에서 총기를 반납하려해도 바리케이드 저쪽에 있던 과격파들이 이를 저지하거나 감시하고 있어 대책위 측에서는 골목길을 돌아 이 무기 반납소에 무기를 놓고 간다』면서 무기 반납에 아직도 「방해」라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일부 사람들이 이 지역을 「대치장소」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이 관계자는 몹시 못 마땅해 했다. 『우리는 지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외곽차단을 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대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관계자는 『문제는 광주 시민의 생업입니다』라고 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광주에는 식품과 의약품 등 생필품의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타지에서 반입되던 생필품이 끊긴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상점과 시장들이 가게를 열었을 때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고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온 몇 사람들은 얘기했다.



바리케이드와 무기반납소 사이에는 인도에 수십 명의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일요일에 교통이 차단된 어느 번화가의 모습과도 흡사했지만 사람들은 그 번잡했던 거리가 벌써 7일째 텅 비어있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에는 간간이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했다. 시민들에게 계엄당국의 전단을 뿌리려 가거나 뿌리고 오는 헬리콥터라고 했다.



24일 정오(나중에는 오후 6시로 연장)까지 무기를 회수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가져오면 과거를 일체 불문에 붙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광주통합병원이 바로 이 화정동 무기반납소를 의미한다. 무기를 반납하러 오는 사람들 보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30분간 기다리는 동안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다만 오토바이를 탄 어느 사람이 잠시 반납소의 종사원에게 접근하더니 다시 횡 돌아서 질주해 갔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어느 관계자가 『아마 뭣인가 물어보려 온 사람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오후 2시 30분쯤 도청의 수습위원들로부터「허락」을 받고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본사의 徐淸源 李榮培 朴來明 曺光欽 네 기자가 마치 4총사처럼 무기반납소 쪽으로 걸어올라 왔다. 7일 동안 마치 몇 년씩 늙은 것처럼 느껴지는 얼굴들이었다.



막혔던 얘기를 나누고 얼마의 돈을 건네주고 그동안 찍었던 필름과 새 필름이 교환된 뒤 네 기자는 올 때처럼 그렇게 길을 걸어내려 갔다. 글들의 모습이 바리케이드 저쪽으로 아스라이 사라질 때까지 불안했다. 이 불안은 광주사태가 해소될 때까지 남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불안인지도 모른다.






## 옆 사진의 인물은 현 조선일보 김대중주필,임 ##




참으로 뛰어난 기사입니다. '바리케이드 이쪽과 저쪽'이라는 상황 설정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선입견과 '관계자'의 입을 축으로 한 현장감 빈약한 작문성 기사입니다. '바리케이드 저쪽'은 '난동자'들이 장악한 '무정부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심혈을 기울인 이 르포는, 그러난 기사의 기본이 안돼 있습니다. 즉 기자 자신이 직접 확인을 한 사실(fact)를 전달한다는 기사 작성의 원칙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입니다.



자세히 읽으면 알 수 있는데, 김대중 당시 사회부장은 '바리케이드 저쪽'의 무엇을 봤길래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난동자'라는 난폭한 표현은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김대중 기자는 적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김대중 기자는 '바리케이드 이쪽 관계'의 입을 빌려 계엄군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나마 '바리케이드 저쪽의 무정부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바리케이드 저쪽에서 온 몇몇 사람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현장에 투입된 '7일 동안 마치 몇 년씩 늙은 것처럼 느껴지는 얼굴들'의 조선일보 기자 '4총사'가, '바리케이드 저쪽'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지는 생략하고 있는 점입니다.



사실 이 르포 기사에는 조선일보의 한 쪽으로 몰아붙이기에 사용되는 각종 수법, 즉 자신의 편견을 뒷받침하는 유리한 내용은 살리고 이에 반하는 것은 버리는 취사선택의 묘, 현장에 들어가는 대신 주변에서 맴돌면서도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쓰는 부풀리기의 묘, 비슷한 맥락으로, 겉에 보이는 현상 뒤의 본질은 생략하는 뒤틀기의 묘 등이 총망라된 '조선일보식 기사 작성'의 원류라 할 만합니다.



여기에다 그 어느 신문사보다도 도전적이고 선정적인 제목을 잘 뽑는 편집기자들의 노고도 김대중 기자의 르포를 빛내주고 있습니다. 시커먼 컷의 '무정부 상태 광주', '총들고 서성대는 「과격파」', '길목서 저지' 등은 독자들의 눈을 한껏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먼저 이 명기사의 내용만 띄웁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기사 원문을 스캐너로 읽어 올리고, (언제가 될 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5.18 당시 긴박했던 몇 일 동안 각 신문들은 어떻게 보도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 빠른 시일 안에 이 기사와 관련해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로 밝힌 내용을 좀 보십시요. 계속..




다음 글은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이 한겨레의 창간과 관련해 보낸 고언으로, 한겨레 1999년 5월 15일자에 실렸습니다. 내용으로야 별로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주필의 고언 한 마디 한 마디를 한겨레가 아닌 조선일보와 자신에게 적용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김대중 주필을 비롯한 이른바 조선일보 논객들의 주장은 그럴 듯 하다 싶은 올바른 주장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같은 도덕성의 잣대를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들이밀어 본 적이 (적어도 지면상으로는)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김대중 주필은 지난 80년 5월 광주를 모독하는 낯뜨거운 기사를 쓰고도 단 한 번도 참회나 사과의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지난 97년 「5·18 특파원 리포트」라는 책에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기는 했지만 역사 앞에서의 사과와는 무관해 보이는 내용입니다.



그 글에서 김대중 주필은, '나는 지금 그럴 바에야 그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다면서도, 바로 다음에'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고 "결국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 밖에 없다는 초라한 자위를 하'는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능한 빨리 그 글을 올리겠습니다.)



김대중 주필의 또다른 문제점은 (위와 같은 맥락입니다만) 매우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밑의 김대중 주필의 글을 살펴볼까요?'자신의 잣대 만이 정의이며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이념은 그것 자체를 부도덕하고 옳지 않다는 도그마를 지면 곳곳에서 발견'한다며 한겨레에 쓴 말을 퍼붓고 있는 김대중 주필은, 자신이 속해 있는 조선일보가 이제까지 조금이라도 진보적이라는 평을 들었던 사람들-최장집 교수, 한완상 교수, 김정남씨 등-을 얼마가 뜯어 물었는지 모르는 것일까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 극우 보수 기득권 세력이 아닌 일반인들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조선일보가 오늘날까지도'우리만이 의롭고 너 희들은 모두 불의,부도덕 그 자체다라는 선과 악의 잣대 만으로 일관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고,'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정치적 사상적 흐름을 가진 쪽을 의도적으로 뒤틀고 깎아내리려는 지면 편 집'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틀릴 말일가요?



더욱이 '북한 때리기'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자진해서 맡고 있는 김대중 주필은 '통일과 그 방법에 대한 진보적 시각이 자칫 현 북한 정권과 북의 인권 상황에 대한 무비판적 긍정으로 인식되는 것을 (한겨레)가 어떻게 수용 할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고 있는데, 필자는 조선일보와 김대중 주필이 고수하고 있는 '통일과 그 방법에 대한 극우적 시각이 과거의 정권이 저질렀던 남한의 인권 탄압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으로 인식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현 정권에서도 계속되는 반 통일적 반 민족적 반동세력에 대한 맹목적이 추인으로 인식되는 것을' 심각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자신은 반성을 잘 하지 않으면서,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히 독선적이면서,다른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독선을 경계하라고 감히 충고하는 이 분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이랍니다.



독선을 경계하라



지난 시절 우리나라의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알려면 두 가지 일 간지를 봐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나는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신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겨레) 신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모든 사물을 보는 시각과 이치를 따지는 분석법이 오로지 보수와 진보( 리버럴)로 이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는 또 있었다. (한겨레)는 군사권위주의의 '피해 '로서 탄생한 신문이다. 우리 정치가 암울했던 시대, 대부분의 언 론이 권위주의의 장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절, 그것에 저항 해서 만들어진 신문은 그 탄생의 이력만으로도 주목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한겨레)가 10년의 연륜을 쌓은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본래 의지와 창간 정신으로 신문을 만들고 있는지 (한겨레)를 읽고 있는 모든 독자들은 질문을 할 때가 됐다. 나는 (한겨레)가 점 차 독선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잣대 만이 정의이며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이념은 그것 자체를 부도덕하고 옳지 않다는 도그마를 지면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한겨레)의 출발점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 러나 신문은 역사책이 아니다. 시대가 달라진 상황에서 시각의 차이 를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상의 분화로 보지 않고 '우리만이 의롭고 너 희들은 모두 불의, 부도덕 그 자체다'라는 선과 악의 잣대 만으로 일관하는 자세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정치적 사상적 흐름을 가진 쪽을 의도적으로 뒤틀고 깎아내리려는 지면 편 집은 때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한겨레)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았나 생각해볼 일이다 .



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한겨레)의 정체성에도 어떤 변화를 가져오 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 한겨레)의 비판의식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퇴색하고 있다는 것을 느 낀다. 일부 사람들은 '한겨레 맛'이 없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기에 따라서



한겨레)가 점차 무게를 잡아가는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무게'가 다른 모든 편집에 보편적으로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한겨레)가 진정 한국 진보의 어느 한 부분을 자임하려 한다면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편향성을 타파하고 명실공히 객관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지난날의 교훈이다 .



내가 유독 (한겨레) 신문에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 신문의 대북 문제를 보는 시각이다. 한겨레가 대북문제를 진보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견해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대북문제가 보수적 잣대로만 다루어질 수 없는 논리와 같다. 그러나 통일과 그 방법에 대한 진보적 시각이 자칫 현 북한 정권과 북의 인권 상황에 대한 무비판적 긍정으로 인식되는 것을 (한겨레)가 어떻게 수용 할 수 있을 것인지 문제로서 제기하고 싶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 두 날개로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이라 면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공존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존 인프라를 이끌어 나갈 수밖에 없다. 민주적 보수와 민주적 진보의 뿌리는 전 체주의를 배격한다는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의 공동 자산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견해 차이에 따른 논쟁과 토론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하나가 다른 것을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려 한다면 모두가 설 땅을 잃게 될는지 모른다.



한겨레)는 그 정신 면에서, 그 정체성에서 우리 사회에 하나의 시각과 접근법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소화하는 사람에 따라 필요한 자양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겨레)는 이제 하나만을 쳐다보고 가는 결사체적 매체가 아니라 좌우를 살피며 공동체의 이익을 조절해가는 공공기능의 신문으로 일반인들에게 수용 돼야 할 것이다.

(김대중 주필에 대한 이 글은 1999년 8월 16일에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