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남침 당일의 박정희
고향에 가 있다가 연락 받고 복귀 |
전투정보과는 유양수 과장의 지도하에 ‘年末(연말) 종합 적정 판단서’를 만들고 있었다. 연례적인 보고서였지만 북한의 전쟁 준비 상황이 감지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남침 가능성을 검토하는 데 主眼點(주안점)을 두었다. 1949년 12월 17일에 육본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이 판단서의 총론 부분은 박정희가 썼다고 한다. 판단서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全(전) 기능을 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갖추고 나면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 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柳陽洙(유양수)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은 6월 15일쯤 장도영 국장에게 ‘남침 임박’을 강조하는 정보 보고를 다시 한 번 했는데 국장이 화를 냈다고 한다. 대강 이런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유 과장, 당신 보고는 말이야, 순수한 군사적 입장에서만 본다면 설득력이 있을 수 있어.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이 문제를 너무 강조하지 않는 게 좋겠어. 같이 근무하기가 곤란해.”
다음날 유양수 과장은 6월 26일자로 6사단 정보참모로 부임하라는 전근 명령을 받았다. 후임 과장은 발령이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군은 6·25 남침을 당했을 때 핵심 중의 핵심인 전투정보과장이 空席(공석)이었다. 과장뿐 아니라 북한반장도 공석이었다. 북한반장 白(백) 대위는 그 며칠 전 자살했다.
백 대위는 그때 남북무역을 이용한 정보 수집을 관장하고 있었다. 무역업자를 지정하여 북으로는 약품과 차량 부속품을 보내고 북으로부터는 명태 같은 것들을 받아오면서 이를 기회로 삼아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백 대위는 이 일을 하다가 돈을 만지게 되었고, 그 돈으로 외도를 한 사실이 밝혀져 다른 부대로 좌천되게 되었다.
그 며칠 뒤 백 대위는 육본 근처에 있던 김종필 중위의 하숙집을 찾아왔다. 2층 방으로 올라온 백 대위는 김 중위에게 편지를 건네더니 계단을 뛰어서 내려가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김 중위는 따라서 내려갔다. 백 대위는 권총을 꺼내더니 심장 부위를 겨냥하고는 “김 중위, 나 간다”란 말을 남기고 방아쇠를 당겼다. 백 대위의 등 뒤 벽에 붙어 있던 거울이 산산조각나는 소리와 함께 백 대위는 쓰러졌다. 김 중위가 그의 입과 코에 손을 대보니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때 잠옷 바람으로 있던 김 중위는 그대로 뛰쳐나가 육본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북한반의 선임 장교가 된 김종필 중위는 과장과 반장이 공석이 된 상황에서 다가오는 인민군의 남침을 맨 앞에서 받아내게 되었다. 6월 8일 포천 파견대 양문리 초소에서 ‘일단의 장교를 대동한 인민군 고급지휘관이 전방 고지에 나타나 종일 정찰을 했다’고 보고해 왔다. 9일에는 같은 현상이 동두천과 高浪浦(고랑포) 건너편 고지에서도 목격되었다. 全谷(전곡) 지방 도로를 따라 차량행렬이 南下(남하)하는 것도 관찰됐다.
19일, 동두천 파견첩보대장 金正淑(김정숙) 대위는 전곡─연천 사이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기동하는 전차 수 대를 발견했다. 다음날엔 더 많은 戰車群(전차군)과 自走砲群(자주포군)이 보였다. 6월 22일 고랑포 파견대장 金炳學(김병학) 중위는 ‘남천에 있던 인민군 1사단이 38선 바로 북쪽 구화리까지 남하했다’고 보고해 왔다. 도강용 주정이 강변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도 김종필 중위에게 들어왔다.
이 무렵 작전정보실장으로 불리던 비공식 문관 박정희는 어머니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구미로 내려갔다. 그는 떠나기 앞서 김종필, 이영근 중위 등을 불러 놓고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 경찰서를 통해서 연락해 달라”고 당부했다. 23일 24시를 기해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인민군의 대규모 훈련(사실은 훈련으로 위장한 개전준비)에 대비하여 78일간 유지해온 대북 경계령을 해제하고 예하부대는 휴가를 실시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6월 24일은 토요일이었다. 오전 10시, 김종필 중위는 장도영 국장에게 급박한 상황을 보고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적의 전면공격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전방부대에서 외출을 내보낼 텐데, 저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듭니다. 뭔가 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응, 나도 동감이야. 일반 참모들을 데리고 갈 테니 상황실에 브리핑 준비를 해두게.”
30분 후, 김종필 중위는 육본 인사국장 申尙澈(신상철) 대령, 작전국장 張昌國(장창국) 대령, 군수국장 楊國鎭(양국진) 대령, 고급부관 黃憲親(황헌친) 대령, 그리고 장도영 정보국장 앞에서 “적이 기습을 한다면 내일 같은 일요일의 未明(미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김종필은 긴급대책을 건의했다.
<전군에 비상 태세를 명령할 것. 대통령에게 긴급한 상황을 보고하고 정부의 대비를 건의할 것. 적의 주공로로 예상되는 동두천과 조공로로 예상되는 개성 정면에 강력한 정찰조를 침투시켜 적정을 확인할 것. 비상 경보망의 정비. 이 시간 이후 정보국과 작전국이 합동근무반을 편성하여 작전상황실에서 근무토록 할 것>
김종필 중위의 이 보고에 대해서 작전국장과 군수국장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전방부대에 경계강화를 지시하고 장병들의 외출 외박은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조절하도록 했다. 육본의 다른 참모들을 움직이는 데 실패한 장도영 국장은 정보국 차원에서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한다. 동두천과 개성의 전면에 결사 정찰조를 침투시키기로 했다. 김종필 중위가 起案(기안)한 정찰계획에 따라 김경옥 대위가 인솔한 분대병력은 기관단총과 무전기를 휴대하고 深夜(심야)에 개성 송악산 서쪽 기슭을 타면서 38선을 넘어갔다. 김정숙 대위가 인솔한 정찰조는 전곡을 동쪽으로 돌아 연천으로 향했다. 두 정찰조는 38선을 넘어간 뒤 ‘적에게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는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김종필 중위는 24일 밤 정보국 야간 당직장교였다. 저녁 7시 그는 정보국의 각 지구 파견대와 전방 4개 사단 정보참모에게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상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밤 9시 옹진반도와 춘천에서 가벼운 총격전이 있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38선 일대에서는 호우, 서울에서도 기온이 내려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종필 중위는 ‘불안, 초조, 그리고 야릇한 기대마저 뒤섞인 기분으로’ 벽에 걸린 둥근 시계를 응시하곤 했다.
이 시각 육군본부 장교구락부에선 開館(개관) 연회가 질펀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관들과 수도권의 국군 지휘관들이 참석했다. 술과 춤과 여인들이 있었다. 장도영 국장도 이 파티에 끼었다가 자정 무렵에 관사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25일로 바뀌어 새벽 3시, 포천에 나가 있던 첩보파견대장이 김종필 중위에게 제1보를 전해왔다. ‘전차군을 동반한 대병력이 양문리 만세교 일대에서 공격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7사단 정보장교가 전화를 걸어왔다.
“떨어집니다. 大口徑(대구경) 포탄이 아군 진지에 떨어집니다. 전차도 밀려오고 있습니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숨이 넘어가듯 절규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리고 있었다. 김종필 중위는 “왔구나. 드디어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중얼거리면서 한동안 넋 잃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1975년 6월 25일자 일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25년 전의 그날을 적었다.
<1950년 6월 25일 나는 고향집에서 어머님 제사를 드리고 문상객들과 사랑방에서 담화를 하고 있었다. 12시 조금 지나서 구미읍 경찰서에서 순경 한 사람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왔다. 장도영 대령이 경찰을 통해 보낸 긴급전보였다. ‘今朝未明(금조미명)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목하 전방부대는 적과 교전 중. 급히 귀경’이라는 내용이었다. 새벽 4시에 38선에서 전쟁이 벌어졌어도 12시까지 시골 동네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리에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했다. 경부선 上行(상행) 열차에 병력을 만재한 군용열차가 계속 北行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일 야간 北行 열차를 탔으나 군 병력 前送(전송)관계로 도중 역에서 몇 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 열차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7시경이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불안에 싸여 있고 위장을 한 군용차량들이 최대한도로 거리를 질주하고 서울의 거리에는 살기가 감돌기만 하였다. 용산 육본 벙커 내에 있는 작전상황실에 들어가니 25일 아침부터 밤낮 2晝夜(주야)를 꼬박 새운 작전국, 정보국 장교들은 잠을 자지 못해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고 질서도 없고 우왕좌왕 전화통화로 실내는 장바닥처럼 떠들썩하기만 하였다>
1950년 6월28일 밤2시쯤 육본이 용산에서 철수할 때 박정희의 거동에 대한 목격증언으로서는 전투정보과 소속 육사 8기 출신 서정순 중위의 그것이 유일하다. “한강 다리가 끊어진 뒤 뚝섬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 후의 목격담은 정보국 5과장 車虎聲(차호성) 소령에 의하여 이어진다. 그의 생전 증언.
“27일 밤에 저는 미아리 전선을 시찰하고 자정이 지나서 육본에 돌아왔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버리고 간 서류와 지도가 널려 있었어요. 부하 장교들을 데리고 한강다리 쪽으로 가 보았더니 폭파된 뒤였어요. 다리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강에는 추락한 차량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헤엄쳐서 건넜습니다. 천호동 쪽에 도착하니 동이 터 훤해지더군요.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니 ‘차 형! 접니다’ 하고 불러요. 박정희였습니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의 이야기인즉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함께 시흥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관악산 근방에서 적의 야크기가 격추되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박정희는 아직 폭탄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점심 때 누렇고 길쭉한 오이를 따 가지고 오는 아주머니를 만나 갖고 있는 돈을 주고 한 광주리를 다 샀습니다. 저, 박정희, 부하 세 사람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오이를 다 먹었는데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박정희와 헤어졌어요. 그는 시흥으로 가고 저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서 강변에 남았습니다.”
육군본부는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전했다. 장도영 정보국장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직후 김백일 육본 참모부장과 함께 새벽에 작은 보트를 타고 손바닥을 노 삼아 저으면서 한강을 건넜다. 아침 일찍 보병학교에 가보니 전투정보과 장교들은 보이지 않았다. 장도영 국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요원들 가운데 ‘좌익 전력자’ 박정희가 끼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육본은 28일 오후 다시 수원으로 옮겼다.
김종필 중위 일행은 시흥의 임시 육본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갔다. 일제시대에 만든 수원청년훈련소에 정보국이 들어갔다고 해서 거기로 갔더니 박정희가 정문에 서서 자신들을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김 중위는 마음이 놓였다. ‘저분은 역시 북으로 가지 않으셨구나’ 하는 안도감. 박정희에게 있어서 6·25 남침은 자신에 대한 사상적 의구심을 해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날 한강을 남쪽으로 건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11년 뒤 그 한강을 반대방향으로 건너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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