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우리는

서낭당

백삼/이한백 2015. 4. 30. 14:53

마을신앙의 중심, 서낭당


서낭당



마을 어귀나 고갯길에 돌무더기,
서낭목 따위와 함께 있던 작은 집이 있으니 이를 서낭당이라 하였습니다.
이 서낭당은 선왕당, 성황당으로 불리는데,
어원은 선왕당(仙王堂, 先王堂)과 천왕당(天王堂)으로 선왕이며,
천왕인 한인, 환웅, 단군을 모시던 곳이었습니다.

김교헌은 <신단실기>에서
서낭당 제사와 유래는 단신제라 말하는데
왜냐하면 만주땅 여러 곳에는 수풀 속에 단을 쌓아 제사지내던
유적이 있고 그곳 전설에 따르면 태고 때 단시제를 지내던 터로 고구려,
발해를 거쳐 줄곧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어 길손들의 지킴이로,
그리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곳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서낭목의 돌무더기를 보면 몽골, 시베리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지금까지 전승되어
옴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시베리아, 몽골, 알타이 지방에는
나무에 천을 걸어두는데 우리가 서낭당에 천을 걸어두는 것과 유사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신 신당(神堂)

서낭당 /서낭당서낭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선왕당·천왕당·국수당·국시당 등으로 불리며 한자로 표기하여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개마루에 원뿔 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神樹) 또는 장승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형식은 5색 헝겊을 걸어놓은 서낭나무와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누석단(累石壇)이 결합된 것이 일반적이나
누석단 또는 서낭나무만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이밖에도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거나,
입석(立石)의 형태인 것도 있다.
서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한국 전래의 천신(天神)과
산신(山神)이 복합된 것으로 여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성황신앙(城隍信仰)이 융합되었다고 한다.

성황신앙은 성읍의 둘레에 못을 파놓고
그 못에 깃든 신(神)이 성읍을 지켜준다고 믿는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송대(宋代) 이후 보편화되었다.

이 성황신앙이 재래의 서낭신앙의 마을수호라는 기능과 일치하고
서낭과 성황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서로 혼합되어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서낭당은 지역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전쟁시 석전(石戰)에 대비하여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실제적인 기능보다는 마을수호·액운퇴치·
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종교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서낭당과 관계된 것으로, 서낭나무에 입던 옷의 저고리 동정이나
5색 헝겊 조각을 걸고 치병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거나,
새 집으로 이사할 때 옛 집의 잡귀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옷을 찢어 걸어놓기도 하는 속신이 있다.

이밖에도 서낭당을 지날 때에 누석단에 돌 3개와 솔개비를 얹어놓고
침을 3번 뱉은 다음 왼쪽 발꿈치로 땅을 3번 구름으로써 행로의 안전과
행운을 기원하는 등 민간에서 전해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풍속이 있다.

서낭당에 올리는 제의(祭儀)에는 마을수호와 질병의 예방을 위하여
마을굿의 형식으로 해마다 지내는 서낭제와 잡다한 개인적 소망을
기원하는 개별적인 제의가 있다.

또한 서낭신은 무속에 수용되어 무신(巫神)의 하나가 되었으며
서낭굿이 굿의 한 마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성금리 서낭당



중곡리 서낭당



서낭당



문이골 서낭당







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서낭당의 모습.













고흥군, '팔영산 몬짓재 서낭당 복원.정비'



오대산 서낭당



강릉 초당동 서낭당



문경새재 서낭당 (山王堂)





부안 내소사의 서낭당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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